최진실

이름최진실(崔眞實)
출생1968년 12월 24일, 서울특별시
사망2008년 10월 2일, 서울특별시
본관전주 최씨
가족어머니 정옥숙, 남동생 최진영, 아들 최환희, 딸 최준희
신체163cm, 46kg, B형
종교개신교
학력선일여자고등학교
데뷔1988년 한국화장품 '센시티브' 광고
팬 페이지만인의 연인 최진실과 함께
SNS미니홈피
" /> 연기대상 대상
김혜수
(1996)
최진실
(1997)
김지수
(1998)
대종상 여우주연상
윤정희
(1994)
최진실
(1995)
심혜진
(1996)

1 개요

대한민국의 1990년대를 상징하는 국민배우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었지만, '귀여움'이라는 매력으로 대중의 마음을 오랫동안 사로잡았다. 더불어 훌륭한 연기력를 보여 전 연령층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만인의 연인' 또는 '국민배우'라는 별칭으로 불리었다.[1] 1988년 광고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한 이래 20년 동안 지속적인 인기를 누렸다.#

2 생애

최진실은 1968년 12월 24일에 태어났다. 고등학생 시절에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 최국현이 가출을 했고 이후 어머니 정옥숙, 남동생 최진영과 생활한다.[2] 정옥숙은 화장품 외판원 혹은 포장마차 운영을, 최진실은 아르바이트로 햄버거 가게 점원을, 최진영은 아르바이트로 교복 모델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최진실과 최진영이 공식적으로 연예인의 길을 걷게 되는데 최진실은 1988년, 최진영은 1990년을 공식적 연예계 입문 연도로 본다. 별거하며 각자 생활하던 부모는 1998년 합의 이혼하면서 법적으로도 남남이 된다.# 2000년 12월 야구 선수 조성민결혼했고 2004년 9월 이혼했다. 조성민은 가출을 통해 2002년부터 떨어져 나가준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더 들러붙는 짓을 저질러 떼어내느라 애를 먹는다.# 2001년 아들, 2003년 딸을 출산하면서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최국현은 고등학생 시절 연극을 했고 KBS 탤런트 공채 1기였다. 배우 최재성은 6촌 오빠였고 최재성의 아버지이자 최국현의 사촌 형은 KBS의 연출가였다. 중학생 시절에 아역 배우로 유명했던 배우 강수연은 같은 재단 고등학교를 다녔다. 이런 배경 속에서 성장한 최진실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고 연기에도 재능을 보이는 등 예체능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88년 최진영의 모델계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일단 광고 모델로 연예계에 공식적으로 데뷔를 한다. 삼성전자에 출연한 광고가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최진실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였다. 초창기 광고 모델 시절에는 성우 권희덕이 목소리를 맡았는데, 권희덕이 목소리를 담당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는 광고 대사는 널리 알려져 유행했다. 이 대사가 담긴 광고는 최진실이라는 사람을 처음으로 대중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치솟는 인기 속에 활동 영역을 넓혀 1989년에는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한다. 1992년에 MBC 드라마 '질투'에 출연하여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면서 배우로서 강인한 인상을 남겼다. 1994년에 6촌 오빠 배우 최재성과 연인 연기를 할 뻔 했으나 배우 이병헌이 선택된다. 1997년에 MBC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 '그대 그리고 나'에서 주연으로 출연했고 연말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는다. 2005년에 KBS 드라마 '장밋빛 인생'에서 주연으로서 연기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08년에는 MBC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 주연으로서 출연하여 '줌마렐라 신드롬'을 일으켰다. 또한 '남부군',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마누라 죽이기', '편지' 등의 여러 영화에도 출연하여 다수의 인기상을 받았다. 이를 통해 1990년대 대한민국 영화계 부흥을 견인하였다. 그 결과 1990년대 청룡영화상 최다 '인기 스타상' 수상자로서 이름을 떨쳤다.

'질투'는 한국 최초의 트렌디 드라마였고 중국으로 수출된 첫 한국 드라마였다. '별은 내 가슴에'는 최초의 한류드라마라고 할 만큼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끈 드라마였다. 이렇듯 최진실은 1990년대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상징적 인물이었고 한류 배우 1세대였으며 한국 영화사에서도 한 획을 그은 인물이었다.

나아가 코미디언 유재석을 방송 진행자로 추천하는 등 예능계에서도 타고난 감각을 드러냈다.[3] 이 때문에 예능 프로그램이 새로 편성되면 첫회에 출연하는 단골 연예인이었다. 이러한 발군의 능력과 인기로 인하여 2008년에 진행자로 나선 OBS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 출연료가 예능계 최고 주가의 유재석의 출연료보다 높아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금융실명제 광고와 도산 위기에 처한 기아자동차 광고에 무료로 출연하는 등 공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면모도 보였다. 더불어 자신의 범죄 피해 경험을 사회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을 공익에 부합되게 사용하였는데, 범죄 현장을 언론에 공개했다는 이유로 피해자인 광고 모델에게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광고주의 행동에서 사회적 모순을 목격하게 되고 사회가 가정폭력을 인권의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변호사 강지원 등 여성운동계와 연대한다. 또한 2008년 법원의 허가를 받아 자녀들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줌으로써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온전한 성장에 일조했다. 나아가 2008년 5월 미국산 소고기 수입과 관련하여 정부의 시행에 비판적 견해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3 사망

매니저 배병수의 사망과 관련된 거짓 소문을 겪은 바가 있고#, 이혼 과정에서도 유책 배우자라는 거짓 소문을 겪은 바 있으며[4], 배우 안재환의 사망과 관련된 거짓 소문도 겪었다[5]. 이러한 끝모를 허위사실유포에 심적으로 큰 고통을 토로하다가 2008년 10월에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향년 39세. 사망 후 산 기슭에 위치한 사립 묘원에 묻혔다. 2009년 8월 최진실의 유골함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한 남성 자영업자가 최진실이 자기에게 빙의해 지금 묏자리가 답답하니 자신을 꺼내달라고 부탁해서 유골을 훔쳤다고 한다. 유골을 되찾은 후 유족들은 2009년 9월 유해를 재안장하면서 묘원 내부에 최진실을 기념하는 공간을 꾸몄다. 참배객들이나 등산객들은 그 공간에서 최진실을 추억하기도 하고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세상을 떠날 당시 광고 모델 최진실은 2심 판결에 불복한 광고주 <신한>으로부터 소송을 당해 3심 재판을 앞두고 있었다. 2004년 11월 건설사 <신한>은 범죄 피해자 최진실이 범죄 현장을 언론에 공개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금을 청구했었다. <신한>의 이런 행태는 그 범죄가 가정폭력이 아니라 교통사고였고 그 현장이 가정폭력 현장이 아니라 교통사고 현장이었어도 소송을 제기했을지 의문을 갖게 한 것이었다. 이 소송이 최진실 개인에게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는 생전 인터뷰에서 헤아릴 수 있다.

4 사후

최진실/사건사고 참조

2008년 11월 청룡영화상에서 '명예 인기 스타상'을 받게 되고 영화 '남부군'에 같이 출연한 배우 안성기가 대신 이 상을 수상했고, 2008년 12월 MBC 연기대상에서 '공로상'을 받게 되고 텔레비전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 같이 출연한 배우 정준호가 대신 이 상을 수상했다.

2010년 3월에 남동생이자 배우인 최진영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2011년 어머니 정옥숙은 생전에 거짓 소문에 시달린 딸과 아들을 위해 자전적 에세이를 출간하였다. 이 에세이에는 최진실과 최진영 남매의 어린 시절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생애가 개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2012년 9월 아들인 최환희와 딸인 최준희가 KBS 남자의 자격 '패밀리 합창단'에 함께 출연했다. 최환희는 '섬집아기'를, 최준희는 '하늘나라 동화'를 불렀고, 듀엣곡으로는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을 불렀다. 이들 남매는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을 고른 연유에 대해 모친의 생일이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2013년 5월 최준희는 아프리카TV에서 개인 방송을 하였는데, 방송 채팅창에 최진실과 최준희 모녀를 모독하는 글이 도배되어, 이들 악플러들은 사회적 공분을 샀다. 이후 큰 상처를 받은 최준희는 방송을 중단했다.# 2013년 9월에 최환희는 제주도에 있는 국제중학교에 입학했다.#

2013년 9월 9일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에서 최진실의 사망에 대한 언론의 선정적 보도 행태가 베르테르 효과를 일으켰다고 지적했다.# 2013년 11월 17일 방영된 MBC 섹션TV 연예통신에서 '연예가 5대 사건' 중 '최진실의 사망'이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최진실의 죽음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4.1 친족법 개정

사후에 자녀들의 생부인 조성민의 친권이 다시 유효한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있었다. 관행상 단독 친권자의 사망은 생존 부모의 친권 부활로 여겨졌지만, 해당 법 규정은 없어서 갈등의 소지가 있었다. 2011년 친족법이 개정되면서 단독 친권자 사망시 생존 부모 친권 부활과 관련하여 생존 부모에 대해 가정법원이 자격 심사를 하도록 되었다.

5 최진실 사단

최진실은 톱스타였지만, 대단히 소탈한 성향의 인물이었고, 다양한 분야의 연예계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었다. 특히 이영자, 이소라, 홍진경, 김희선, 엄정화, 정선희, 최화정, 신애 등과 특별히 가깝게 지낸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들은 최진실 사망 당시에도 장례식에 참여했으며 동생 최진영이 사망했을 때도 조문을 하여 애도를 표했다.[6]

6 여담

어머니 정옥숙은 해방둥이였고 다섯 살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중 가족과 함께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중 정옥숙의 아버지는 북한군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보국대에 끌려가 며칠동안 고문을 당했다. 물증도 없이 혐의만으로 무리하게 체포한 것이라 아버지는 곧 풀려나오게 된다. 그러나 누명을 쓴 억울함과 고문으로 정신이상증세가 나타나 집안이 초토화되어버렸고, 결국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정옥숙의 어머니는 재혼을 했고 정옥숙은 서울에서 친척 등의 도움을 받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정옥숙은 미용사로서 일을 하다가 결혼을 하게 되고 1968년 최진실을 낳았다. 정옥숙의 외가는 시골에서는 부자에 속하는 집안이었다고 하고 정옥숙의 동복 동생 중 한 명은 소설가라고 한다. 최진실의 외할아버지가 한국전쟁이 벌어지던 와중에 벌어진 이념전쟁의 희생자였던 반면에 최진실의 친할아버지는 경찰 공무원이었다고 한다.

배우 최진실, 배우 김희애, 배우 채시라 등을 두고 1990년대에 언론에서는 '트로이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소탈한 이미지로 넓은 연령층의 지지를 받았고 그 덕에 정당 모델 활동도 한 적 있다.

2007년 SBS <좋은 아침>에 배우 신애 등과 출연해 자신이 즐겨 만들어 먹는 '참치고추장수제비'를 소개했다. 최진실이 사망하자 신애는 최진실이 해주던 김치찌개와 수제비를 못 먹게 됐다고 하며 최진실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했다.[7]

사망 전에는 인터넷에서 "사실이냐?"는 뜻으로 "최진실?" 혹은 "최트루?"라는 식의 문장이 유행하며 널리 쓰였었다. 하지만 사망 이후[8] '허참', '트루' 등으로 대체되어 쓰이다가 '레알'이라는 단어로 완전히 대체된 상태.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는 것, 배우로서 엄청난 인기인이었다는 것, 요절했다는 것, 배우자가 야구선수에 가정폭력범이었다는 것 등을 공통점으로 들며 미국 배우 마릴린 먼로와 비교하는 사람도 있다.#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친 이혼 과정에서 유책배우자로 몰려 세상으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아 자존감에 상처를 받게 되고 이를 선행으로 치유하게 되는데 도시락 수십 개를 직접 싸서 노숙인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보육원을 방문하며 입양에 관심을 두기도 했다고 한다.

이혼과정에서는 고수(高手)의 면모도 보이는데 이혼할 생각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일타다피의 성과를 낸다. 이혼 소송 당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자기를 유책배우자로 몰았던 자들을 보기좋게 제압해 버렸다. 그 결과 이혼 후에도 승승장구하게 된다.

2008년 1월에 개정된 친권법이 시행되면서 자녀들의 성을 '조'에서 '최'로 바꾸게 되고 이를 지상파 메인 뉴스에서도 다루면서 자녀가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다는 사실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친족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2008년 9월에 악덕 사채업자라는 거짓 소문이 떠돌 때 이와 관련되어 인터넷상에서 쏟아져 나온 악플들을 모두 다 읽었다고 한다. 당연히 멘탈이 버티지 못하고 울다가 실신하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자결(自決)과 그 여파로 엄청난 수의 사망자를 냄으로써 20년간 벌여온 대중과의 한판 승부를 마무리지었다. 최진실은 20년간 대중의 허위사실유포행위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생전에 황색언론의 밥이었다. 사망 후 그 여파로 사망자들이 많았던 게 언론의 책임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옐로 저널리즘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물리치듯 언론의 역할을 조명하는 데 일조했다.

7 출연 작품

7.1 드라마

방영 연도 방송사 제목 배역
1988년MBC조선왕조 5백년 한중록장미
1989년MBC잠들지 않는 나무찬주
조선왕조 오백년 파문박선아
제 5열
당신의 축배김범경
1990년MBC각시방에 사랑 열렸네도희
두 권의 일기양해리
추억여행심미리
우리들의 천국승미
1992년MBC약속정인
질투유하경
매혹이지훈
1993년MBC폭풍의 계절이진희
1994년SBS사랑의 향기영진
1995년SBS아스팔트 사나이오화련
째즈채송화
MBC아파트차나리
1997년MBC별은 내 가슴에이연이, 소피아
그대 그리고 나윤수경
1998년MBC추억서인영
1999년MBC장미와 콩나물손미나
2002년MBC그대를 알고부터이옥화
2004년MBC장미의 전쟁오미연
2005년KBS장밋빛 인생맹순이
2007년MBC나쁜 여자 착한 여자이세영
2008년MBC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홍선희

7.2 영화

개봉 연도 제목 배역
1990년남부군민자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2다혜
꼭지딴혜지
나의 사랑 나의 신부미영
1991년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수잔 브링크
1992년미스터 맘마영주
숲 속의 방소양
1993년사랑하고 싶은 여자 & 결혼하고 싶은 여자유라
1994년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민주
마누라 죽이기소영
1995년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주영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은재
1996년고스트 맘마인주
1997년베이비세일지현
홀리데이 인 서울교환수
편지정인
1999년마요네즈아정
2000년단적비연수

8 수상

연도 시상식 수상
1992년MBC 연기대상최우수상
1993년MBC 연기대상최우수상
1994년백상예술대상영화 부문 최우수상
1995년대종상 영화제여우주연상
1997년MBC 연기대상대상
2005년KBS 연기대상최우수상
2008년청룡영화상명예 인기스타상
MBC 연기대상공로상
  1. 21세기 표현으로 설명하자면 끼가 넘치고 '타고난 연예인의 느낌'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2. 여담이지만 정옥숙은 최국현에게 아들 두 명이 있다는 사실을 결혼 후에 알게 됨. 이 결혼이 최국현의 재혼인지는 알려진 바 없음.
  3. 당시 무명 개그맨에 지나지 않았던 유재석을 최진실은 평소 자신과 친분이있던 PD에게 MC로 적극 추천하였는데, 그 프로그램이 바로 목표 달성 토요일의 '동고동락'이었다. 따라서 최진실은 유재석에게 있어서 정말 은인과도 같은 존재이다. 훗날 유재석은 '해피투게더 시즌 3'를 통해 최진실에게 고마움을 전했고, 또한 최진실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였다.
  4. 2002년 12월 조성민은 언론을 통해 최진실이 유책 배우자라고 주장했으나 이후 3년 동안 그 주장을 입증하지 못하는 걸 대중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허위사실유포자임을 입증한다.
  5. 최진실이 수십 억 원을 안재환에게 빌려주었고 그 돈을 갚으라고 압박을 가하자 안재환이 자살했다는 쪽지가 유포된다.
  6. 최진실 사망 당시 김희선은 임신 중이였으므로 조문하지 못했고, 대신 자신의 미니홈피를 통해 최진실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7.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해서 수제비를 먹는 건 질색이라고 했다고 한 적도 있다고 한다. 1991년 어느 방송에 나와 "아직도 수제비를 먹는 사람도 있어요?"라고 말했다고 하고, 이에 대해 언론은 수제비 좋아하는 이들이나 식당들이 분노했다고 기사를 썼다고 한다. 어느 기자는 가난한 시절을 잊는 것을 넘어 남까지 비웃는다며 칼럼으로 최진실을 비난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최진실은 자신이 워낙 수제비를 질리게 먹어서 그랬다고 해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8. 사망 초기에도 그대로 사용하다가 고인드립 취급받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