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in 『천 일의 앤 Anne Of The Thousand Days』 런던탑 안에 갇힌 사랑, 권력, 욕망의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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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의 아들에 대한 집착은 공주 엘리자베스를 낳은 앤 볼린을 떠나게 했다. 앤 볼린은 세 번의 임신과 유산을 반복하며 헨리 8세의 꿈과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 했지만 ‘반역과 간통’이라는 죄명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이 비극적인 사랑과 권력이 버무려진 ‘욕망의 서사시’가 바로 1969년작 『천 일의 앤』이고, 그녀가 죽기 전에 눈으로 본 마지막 모습이 런던탑이다. 이처럼 런던탑은 왕국의 희노애락 역사를 담고 있다.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희극보다 비극에 눈이 간다. 그 비극의 정점에 앤 볼린이 있다.

위키피디어@Pan Tau


▶런던은 왕조의 상징이다

인류 역사에서 세계의 중심이던 도시들이 있다. 그 도시의 원형은 제국이었다. 로마, 이집트, 페르시아는 물론이고 원나라와 당나라가 있었고, 근대에 들어 대영 제국이 세계를 지배했다가 지금은 미국의 워싱턴이 세계의 중심이다. 세계사에서 분류하는 제국의 패권과 그 이동, 즉 로마 제국, 대영 제국, 팍스 아메리카로서 로마, 런던, 워싱턴이 인류 역사와 제국의 흥망성쇠에서 단연 세계의 중심지인 것이다.

우리는 런던에서 ‘왕조의 향기’를 맡는다. 군주제를 시행하는 영국의 전통도 있지만 런던은 ‘왕조’의 상징적 단어다. 근대 시민운동과 민주 제도의 정착으로 왕조는 멸종한 제도가 되었지만 영국은 독특한 입헌 군주제를 통해 역사와 국민 화합의 구심점으로서 왕조를 아직도 잘 활용하고 있다. 런던에는 이런 왕조 시대의 건물들이 현대적 문물의 홍수 속에서도 ‘조상의 선물’로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버킹엄 궁전, 웨스트민스트 사원, 트라팔가 광장, 빅벤, 국회 의사당, 그리고 런던탑 등이 영국이 한때 왕조의 전성시대였고 지금도 왕이 존재하는 국가라는 것을 보여 주는 증명서다.

런던의 역사는 로마 시대에 브리타니아로 불리던 시대가 그 출발점이다. 정복자 카이사르가 척박한 브리타니아를 정복할 당시 런던 지역에는 이곳의 원주민 격인 켈트족이 살았다. 로마는 이 야만 부족을 다스리고 그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와 돌로 요새를 건설하고 그 지역을 ‘론디니움’이라고 불렀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런던이다. 런던 역사는 로마의 흥망으로부터 시작한다. 5세기경 로마군은 브리타니아를 떠났다. 빈 곳에는 새로운 주인이 들어오는 법. 게르만 민족 계열의 앵글, 색슨, 유트족 등이 런던 지역에 정착,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런던은 조금씩 커져 갔다.

런던이 왕국의 중심으로 그 가치를 인정한 것은 노르만족이다. 유럽의 북쪽 추운 지역에 살던 이 바이킹의 후예들은 무작정 남쪽으로 내려와 프랑스에 정착했고 ‘롤로’라는 탁월한 지도자 덕분에 손님에서 주인으로 인정받았다. 이에 만족치 않았다. 11세기경, 그 후예인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바다 건너 런던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앵글로색슨족이 터를 잡고 있었지만 월리엄의 세는 이들을 압도했다. 윌리엄은 뛰어난 지도자였다. 그는 정복자로서 위엄을 보이기 위해 요새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궁전을 짓고 탑을 세우고, 성을 쌓았다. 그리고 템스강변에 요새를 지었다. 그것이 런던탑의 시작이다.

센트럴런던의 템스강 북안에 있는 런던탑. 지금은 한 해 관광객 약 300만 명이 찾는 명소가 되었지만 애초에는 방어를 위한 요새이자 국왕의 궁전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곳에서 화려한 왕조의 자취보다는 ‘감옥과 처형장’ 역할을 했던 런던탑 이야기에 더 집중한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런던탑에는 귀신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있다.

에드워드 5세를 비롯한 영국 왕이 이 런던탑에 갇혀 있었지만 런던탑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이는 ‘앤 볼린’이다. 우리가 ‘천 일의 앤’으로 부르는 앤 볼린은 헨리 8세의 왕비였으나 1536년, 런던탑에 투옥되고 이곳에서 목이 잘리며 처형을 당했다.

이 이야기를 담은 것이 영화 『천 일의 앤』이다. ‘천 일’이 주는 느낌은 묘하다. 누구에게는 긴 시간이며, 또 누군가에는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이 천 일은 ‘완성’을 뜻한다. 그것이 사랑이든, 권력이든, 세속적 영화든, 미움과 비극적인 종말까지도. 우리가 흔히 ‘아라비안 나이트’라 부르는 『천일야화』에서 세헤라자드는 샤리아르에게 무려 천 하루 동안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샤리아르가 다시 사람을 믿고 사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영화 속 앤 볼린은 헨리 8세의 사랑을 독점하고, 자신의 혈통으로 영국 왕위를 이으려는 야심가였다. 그녀는 권력과 사랑, 모두를 원했지만 결국 두 가지 다 얻는 데 실패했다. 헨리 8세의 아들에 대한 집착은 공주 엘리자베스를 낳은 앤 볼린을 떠나게 했다. 앤 볼린은 세 번의 임신과 유산을 처절하게 반복하며 헨리 8세의 꿈을, 또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 했지만 ‘반역과 간통’이라는 죄명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이 비극적인 사랑과 권력이 버무려진 ‘욕망의 서사시’가 바로 『천 일의 앤』이고, 그녀가 죽기 전에 본 마지막 모습이 런던탑이다. 이처럼 런던탑은 왕국의 희노애락 역사를 담고 있다.



▶헨리 8세, 앤 볼린에 한눈에 빠지다

이쯤에서 영화 『천 일의 앤』으로 들어가 보자. 16세기, 영국은 튜더 왕조의 국왕 헨리 8세(리처드 버튼)의 치하였다. 헨리 8세의 본명은 헨리 튜더. 아버지 헨리 7세가 창업한 튜더 왕조의 두 번째 계승자였다. 원래 헨리 8세는 아버지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하지만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형 아서 튜더가 어린 나이에 죽은 이유로 헨리 튜더는 11세에 왕세자가 되었다.

헨리가 왕위에 오르려면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형수인 캐서린(이렌느 파파스)과의 결혼이었다. 캐서린은 당시 유럽 강국 에스파냐의 공주로 헨리보다 여섯 살 연상이었다. 사실 캐서린은 영국과 에스파냐 동맹의 상징으로 아서 튜더와 결혼한 것이다. 그녀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의 왕실 출신이었다. 어머니는 카스틸라의 이사벨라 1세, 아버지는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로 두 왕국이 연합한 에스파냐는 물론이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더구나 당시 에스파냐와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였고, 교황청의 지지 또한 얻고 있었다. 영국은 이러한 캐서린을, 또한 그녀가 가져온 막대한 지참금을 포기할 수 없었다. 헨리는 형수와 결혼하고 1509년 18세에 국왕이 되었다.

영화는 헨리 8세의 집무실에서 시작한다. 헨리 8세는 재상 크롬웰(존 콜리코스)이 가져온 서류를 한참 쳐다본다. 그리고 잠시 후, 결심을 굳힌 듯 서류에 서명한다. 이 서류에는 헨리 8세의 왕비 앤 볼린(제너비브 부졸드)을 무려 다섯 가지 죄목으로 처형하라는 국왕의 명령이 적혀 있다. 서명을 하면서 헨리 8세는 3년 전, 말도 잘하고, 재치 있고, 활동적이며 매력적인 앤 볼린을 처음 만났던 장면을 회상한다.

젊은 야망으로 가득한 헨리 8세의 눈이 번뜩인다. 그의 눈에 아름다운 한 여인이 들어온다. 그때 울지 추기경(앤서니 퀘일)이 헨리 8세를 사로잡은 여인과 한 남자를 같이 왕에게 데려온다. 그리고 “폐하, 여기 아름다운 남녀의 결혼을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한다. 바로 앤 볼린과 퍼시다. 헨리 8세는 이미 앤 볼린에게 한눈에 마음이 빼앗긴 상태. 이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다. 오히려 앤 볼린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 생각을 감추지 않았다.

앤 볼린의 아버지는 외교관이고 어머니는 명문가인 하워드 출신. 앤 볼린은 일찍 프랑스로 건너가 그곳에서 공부하고 자랐다. 당시 앤 볼린이 무려 5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녀가 매우 영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자유분방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또한 미모를 갖췄고 정치, 외교,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아 박식했다.

이렇게 당찬 성격의 앤 볼린은 헨리 8세의 수많은 여인 중 한 명이 되는 것을 절대 승낙하지 않았다. 캐서린과 결혼한 뒤에도 헨리 8세의 숱한 염문은 귀족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하던 터였다. 앤 볼린은 단호하게 자신의 의사를 헨리 8세에게 전달했다. 앤 볼린이 헨리 8세의 요구를 거절한 이유는 또 있었다. 바로 언니 메리 볼린(발레리 거론)이 헨리 8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들로 앤 볼린은 “나는 절대로 왕의 여자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앤 볼린의 냉랭함이 더할수록 헨리 8세의 ‘욕망’ 역시 더 커졌다. 그는 수시로 앤 볼린을 만나고, 때로는 앤 볼린의 집에 기거하면서 마음을 전달했지만 앤 볼린은 단호했다. 때로는 이 거절의 강도가 너무 강해 주변에서는 혹시라도 앤 볼린이나 그 가족들이 입을 피해를 걱정할 정도였다. 앤 볼린의 심약한 약혼자 퍼시는 다른 여자와 결혼해 버렸다. 그는 헨리 8세의 다혈질적이고 강한 성격 때문에 앤 볼린은 물론이고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종교와 동맹을 버리다

앤 볼린을 포기할 수 없던 헨리 8세는 한 가지 꾀를 냈다. 앤 볼린을 왕비 캐서린의 시종으로 궁중에 불러들인 것이다. 그러면 매일 앤 볼린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앤 볼린에게 왕궁은 또 다른 세계였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다 있었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다. 손가락으로 영국을 움직이는 권력, 왕의 이름으로 소유한 돈, 화려함의 극치인 무도회 등. 앤 볼린은 점차 왕궁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왕궁의 이 무한한 특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헨리 8세의 집요하고 뜨거운 구애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대신 조건을 붙였다.

“좋아요. 조건이 있어요. 결혼해서 나는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아들이 영국의 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수많은 왕의 여자 중 한 명이 아닌 영국의 왕비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공은 헨리 8세에게 넘어갔다. 헨리 8세는 고민에 빠졌다. 앤 볼린을 정식 왕비로 맞아들이기 위해선 우선 캐서린 왕비와 이혼해야 했다. 그러자면 교황청의 승인이 있어야 했다. 신성 로마 제국을 지배하는 에스파냐 왕실의 눈치를 살피는 교황청에서 이혼을 허락할 리 없었다. 그는 이 ‘이혼 프로젝트’를 울지 추기경에게 맡기며 “하루빨리 교황청의 허락을 받아 내라”고 명령했다.

울지 추기경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헨리 8세의 이혼과 결혼은 해결되지 않았다. 헨리 8세는 그럴 때마다 애가 탔다. 그는 이미 앤 볼린의 매력에 흠뻑 빠져 포로가 되어 있었다. 앤 볼린은 영리했다. 그는 헨리 8세와 종교와 신학, 철학에 대해서도 밤새워 토론할 정도로 똑똑했고, 무엇보다 젊은 육체에서 발산하는 매력을 헨리 8세는 포기할 수 없었다.

헨리 8세는 울지 추기경을 내치고 새로운 재상을 임명했다. 그는 당대의 세력가이며 책략에서는 영국 내 최고라는 크롬웰(존 콜리코스)이었다. 크롬웰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헨리 8세와 캐서린 왕비의 결혼을 ‘원천 무효화’하는 것이다. 그 무효화의 논리는 교황청도 난감하게 구약성서에서 찾아냈다. 즉 ‘레위기에서 형수를 취한 자는 자손이 끊어진다. 형수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구절이었다. 이를 근거로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은 교회법상 애초부터 무효라는 주장이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임 교황인 율리오 2세가 허락한 결혼을 자신이 뒤집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보다 교황 클레멘스는 당시 에스파냐의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카를 5세는 캐서린 왕비의 조카였다. 위기에 빠진 헨리 8세는 캐서린을 공략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 캐서린은 헨리 8세와 이혼하겠다”는 말이 나오게 하려고 갖은 회유와 협박, 유혹을 다했지만 캐서린은 끝까지 “잉글랜드의 진정한 왕비는 나 캐서린이며, 나와 헨리 8세와의 결혼은 신성하고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앤 볼린은 애가 탔다. 그녀는 헨리 8세와 크롬웰을 뒤에서 조종하며 영국의 왕비가 되고자 했지만 왕비 자리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7년의 시간이 흘렀다. 헨리 8세는 마지막 방법을 동원했다. 바로 교황청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수장령을 선포하고 교황의 영국 교회에 대한 지배를 부정했다. 즉 영국 교회를 독립시키는 ‘영국식 종교 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당시 유럽 대륙, 즉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등에서 활발하게 종교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헨리 8세는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위키피디어@Nev1
▶사랑과 권력을 다 가지려 한 야망의 왕비

헨리 8세는 강제로 캐서린을 왕궁에서 내보냈다. 그리고 1533년 1월, 앤 볼린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미 앤 볼린은 헨리 8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랜 사랑의 결실에 행복했고 앤 볼린은 자신이 낳을 아이가 왕자로 이 왕국의 계승자가 될 것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는 헨리 8세도 마찬가지였다. 그해 9월, 앤 볼린은 아이를 낳았다. 당시 모든 점성가, 궁중의 시종들이 왕자를 예상했다. 하지만 태어난 아이는 공주, 엘리자베스였다. 앤 볼린은 실망했지만 헨리 8세는 오히려 앤 볼린을 위로하고 기뻐했다. 헨리 8세는 앤 볼린의 젊은 나이를 믿은 것이다. 헨리 8세에게는 이미 캐서린 왕비가 낳은 메리 공주가 있었다.

앤 볼린은 조급해졌고 임신과 유산을 반복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자 헨리 8세의 바람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헨리 8세는 앤 볼린을 멀리했다. 그토록 원했던 여인, 그래서 정비인 캐서린과 이혼하고, 에스파냐는 물론 교황청과 등을 돌리고, 심지어 국민의 원성을 사면서까지 왕비로 앉힐 만큼 영원히 식지 않을 것 같던 앤 볼린에 대한 애정이 식기 시작한 것이다. 그럴수록 앤 볼린은 왕자를 낳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헨리 8세의 시선은 앤의 시녀인 제인 시모어에게 가 있었다. 심지어 앤이 보는 앞에서도 그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앤 볼린은 또 유산했다. 유산한 아이는 불행하게도 왕자였다. 앤은 절규했고 이 보고를 받은 헨리 8세 또한 낙담했다. 그는 “우리에게는 아들이 없나 보다”라고 나직이 신음했다.

헨리 8세의 앤 볼린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을 확인하자 그동안 본 모습을 숨기고 있던 앤 볼린의 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족, 성직자, 관리들이 ‘반 앤 볼린파’를 형성했다. 그들에게 앤 볼린은 국제 관계, 교황, 가톨릭 등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한 원인 제공자였다. 이런 중에 앤 볼린에게 더 큰 위기가 닥친다. 헨리 8세가 또 다시 결혼 문제를 꺼낸 것이다. 헨리 8세는 제인 시모어와 결혼하겠다고 발표했다. 역사는, 시간은 되돌아가는 것일까. 앤 볼린은 자신이 캐서린 왕비에게 주었던 아픔과 상처를 고스란히 되돌려 받게 되었다. 헨리 8세는 앤 볼린과의 이혼을 선언했다. 그동안 헨리 8세를 사로잡았던 앤 볼린의 매력, 즉 활달한 성격, 거침없는 언행, 다양한 지식이 예의 없고, 무례하고, 말 많고, 참견만 하는 단점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앤 볼린은 영국 왕비에서 하루아침에 죄인이 되어 런던탑에 갇혔다. 재판은 형식적이었고 이미 처벌은 정해져 있었다. 헨리 8세의 명을 받아 앤 볼린과의 이혼 협상에 나선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크롬웰이었다. 크롬웰은 “이혼을 선언하면 목숨만은 건질 수 있다”고 회유했지만 앤 볼린은 거부했다. 그녀는 “나는 영국의 왕비다. 절대로 이혼하지 않겠다.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왕위 계승권을 부여해 달라”고 주장했다. 헨리 8세는 한시라도 빨리 제인 시모어와 결혼하기 위해 앤 볼린의 목숨을 빼앗기로 결심했다.

크롬웰은 앤 볼린의 죄명을 적어 헨리 8세게 보고했다. 앤 볼린의 죄명은 반역, 근친상간, 마녀적 행위 등이었다. 특히 근친상간과 간통에는 무려 여섯 명의 남자가 엮였는데 그중에는 앤 볼린의 남동생도 있었다. 앤 볼린에게 최후가 다가온 것이다. 먼저 앤 볼린의 남동생 등 간통 혐의를 받은 남자들이 처형되었다. 그리고 앤 볼린에게 사형 명령이 내려졌다. 런던탑에 갇힌 앤 볼린은 침착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죽음만이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고통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고 말할 정도였다. 헨리 8세는 앤 볼린에게 마지막 관용을 베풀었다. 그것은 앤 볼린의 사형에 도끼가 아닌 칼을 쓰도록 한 것이다. 도끼는 잘못 쓰면 한 번에 죽지 않고 고통을 안겨 주기도 했다. 해서 헨리 8세는 프랑스에서 칼을 가장 잘 쓰는 사형 집행인을 불러왔다. 이 소식을 듣고 앤 볼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나를 단칼에 죽이기 위해 프랑스에서 사형 집행인을 불렀다고요? 그는 칼을 잘 쓰는 사람이라지요. 하지만 내 목은 참 작은데…” 그리고 런던탑에서 걸어 나와 단두대에 올랐다. 수많은 사람이 앤 볼린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운집했다. 앤 볼린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헨리 8세를. 하지만 헨리 8세는 앤 볼린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도, 눈맞춤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앤 볼린은 조용한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남겼다.

“오늘 나는 죽음을 맞으러 여기에 왔습니다. 영국 법에 의해 내게 사형 판결이 내려졌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변명도, 책망도 하지 않겠습니다. 또한 한없이 자비롭고 온화하시고 영특하신 지금의 국왕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영국과 국민을 잘 다스리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저에게는 항상 선하신 최고의 왕이셨습니다. 미래에 지금의 제 일에 대해 누가 다시 언급하기라도 한다면, 가장 좋은 결론의 말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세상과 당신들을 떠납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하나님께 제 영혼을 드립니다.”

그렇게 앤 볼린은 죽었다. 누구도 앤 볼린의 장례식을, 시신을 챙길 준비를 하지 않았다. 처형이 끝나고 군중들이 사라지고 난 후, 런던탑의 근무자가 앤의 머리와 몸을 초라한 나무 상자에 담았다. 그리고 세인트 피터 애드 빈큘라 성당에 묻었다.

왕의 창녀, 손가락 여섯 개의 마녀, 요망한 정부 등 수많은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3년간 영국 왕비로 있던 앤 볼린은 그렇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헨리 8세는 앤 볼린이 처형된 지 불과 11일 만에 제인 시모어와 결혼식을 올렸다.

▶영국의 종교 개혁을 불러오다

이 비극적인 일화는 개인적으로 앤 볼린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 갔지만 영국의 역사 또한 바꾸었다. 헨리 8세와 앤 볼린 두 사람의 약 3년, 그러니까 천 일 동안의 지배로 영국은 두 가지를 얻었다. 첫째는 수장령에 의한 왕권의 교회 지배력 강화와 로마 교황청에서의 분리, 둘째는 찬란한 대영 제국 여왕의 시대를 연 것이다.

헨리 8세는 여느 왕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왕위를 이을 적통 아들을 간절히 원했다. 특히 아버지 헨리 7세가 장미 전쟁까지 치르면서 연 튜더 왕조를 계승하고 싶었고 후계가 단단하지 않으면 내란이 일어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캐서린, 앤 볼린을 포함에 모두 여섯 번이나 무리수를 두어 가면서 결혼했지만 끝내 아들을 얻지 못했다.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을 위해 헨리 8세는 울지 추기경은 물론이고 자신의 심복들을 교황 클레멘스에게 보내 혼인 무효를 청원했다. 하지만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의 눈치를 봐야 했기에 헨리 8세의 청원을 거절했다. 오히려 교황청의 정확한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헨리 8세의 이혼은 물론이고 결혼도 금지시켰다. 헨리 8세는 결단과 용기를 갖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혼과 결혼은 교황의 승낙이 아닌 대외적인 명분과 논리만 있으면 됐다. 그때 크롬웰이 등장해 헨리 8세에게 솔깃한 제안을 했다. 바로 로마 교회와 영국 교회를 분리시키는 것. 크롬웰과 함께 대법원장 토마스 모어가 움직였다. 토마스 모어는 옥스퍼드대학 법학과 교수들을 움직여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이 원천 무효라는 법률적 해석을 얻어 냈다.

1553년 던스터블 수도원에서 특별 회의가 소집됐다. 이곳에서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은 무효라는 결과를 도출하고, 이를 근거로 헨리 8세와 앤 볼린의 결혼은 합법이라고 선언했다. 로마 교황청은 이미 헨리 8세가 자신이 설계한 길로 가리라 짐작했다. 결국 서기 6세기 이래 교황의 지배를 받던 영국 교회는 독립했다.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청의 파문을 당했다. 한때 독실한 신앙 생활로 1521년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은 헨리 8세가 자신만의 교회를 세운 것이다.

헨리 8세는 자신의 결혼에 반대하거나 무효를 거론하는 이를 반역죄로 다스렸다. 그리고 1534년 소위 ‘왕위지상령’을 선포했다. 이는 ‘영국 교회를 다스리는 자’는 ‘영국의 국왕’이라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수장령을 발표해 영국 교회의 수장 역시 지금까지 천 년 동안 그 지위를 인정받았던 로마 교황이 아닌 영국 국왕임을 선포했다. 로마 교황청은 이에 파문과 교황청 대사를 영국에서 철수시키는 것으로 맞섰지만 헨리 8세 역시 굽히지 않았다. 이후 헨리 8세의 후계를 이은 에드워드 6세가 공식적으로 영국이 프로테스탄트 국가임을 선언했다.

헨리 8세의 종교적 변혁은 마틴 루터에 의해 불길처럼 번지던 대륙의 종교 개혁과 그 궤를 달리했다. 헨리 8세는 여러 가지 목적으로 교황청과 대립각을 세웠지만 루터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개혁적 기독교를 위험한 이단으로 판단했다. 당시 대륙의 개신교 책자나 인쇄물의 영국 반입을 금지한 것이 그 증거다.

헨리 8세에 의해 시행된 영국 수장령과 로마 교황청과의 결별의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앤 볼린과의 결혼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헨리 8세는 강력한 왕권을 원했다. 그러기 위해 당시 잉글랜드 내에서 많은 권력과 재산을 가진 교회를 어떤 식으로든 ‘건드릴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 시민 사회에서 새로운 계급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젠트리 계층’의 지지를 받기 위한 것도 그 목적이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가톨릭 세력의 절대적 지지를 받던 캐서린 왕비에 대항하기 위해 개신교를 지원함으로써 자신과 앤 볼린의 새로운 지지 세력을 형성한 것이었다.

헨리 8세의 영국 교회와 로마 교회의 분리 시도는 당시 많은 종교 개혁가들과 유럽 왕가에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이후에는 대륙의 많은 국가가 로마 교황청의 직접적인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영국식 모델도 그 중 하나였다.

▶대영 제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빅벤과 처칠 동상
헨리 8세 이후 영국 통치자로서 국왕 신분에도 변화가 생겼다. 헨리 8세가 그렇게 원하던 왕자가 아니라 그의 딸들인 메리, 엘리자베스가 차례로 왕위에 올라 영국 왕실에 처음으로 ‘여왕의 시대’를 연 것이다. 영국에서 전통적인 의미에서 왕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켈트족과 로마의 지배를 거친 약 9세기 무렵이다. 당시 웨섹스가의 엑버트가 829년 왕으로서 영국을 처음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후 댄가를 거치면서 롤로에 의해 노르만 왕조가 열렸고 플랜테지넷 왕조, 랭카스터 왕조, 요크 왕조를 거쳐 헨리 7세 때 튜더 왕조가 탄생한 것이다. 물론 헨리 8세의 후계는 제인 시모어 소생의 유일한 아들인 에드워드 6세가 이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6세 대신 섭정공들이 통치를 했고 그는 왕위에 오른 지 불과 6년 만에 죽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다음 후계는 캐서린 왕비의 소생인 메리 공주였다.

하지만 헨리 8세 이후 권력의 중추로 등장한 영국 개신교 세력과 귀족들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면서 가톨릭 국가인 에스파냐와 혈연으로 연결된 메리의 왕위 등극을 반대했다.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영국 성공회의 핵심인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는 자신의 며느리 제인 그레이를 에드워드 6세에 이어 왕위에 올렸다. 제인 그레이는 헨리 8세 누이동생의 손녀딸로 왕가의 일원이지만 왕위를 이을 직계는 아니었다. 그러자 가톨릭 세력은 물론이고 영국민 대부분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헨리 8세, 에드워드 6세의 후계는 당연히 메리 공주가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심에 의해 제인 그레이는 영국 왕위에 오른 지 9일 만에 쫓겨나고 메리가 여왕으로 즉위한다. 영국 최초의 여왕이 탄생한 것이다. 이때가 1553년이다. 메리는 쿠데타를 주동한 존 더들리 공작을 사형에 처하고 제인 그레이를 살려주었다. 하지만 1년 뒤 제인 그레이를 앞세운 반역 사건이 벌어지자 제인 그레이를 처형하고 만다.

메리는 왕위에 오른 지 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은 것은 그녀의 이복여동생인 엘리자베스다. 1558년 엘리자베스가 영국 여왕이 되었다. ‘내 아들이 영국의 왕이 되어야 한다’던 앤 볼린의 집요한 야망은 딸인 엘리자베스에 의해 결실을 맺은 것이다. 25세에 영국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 1세는 그야말로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가 되었다. 유럽 변방의 조그마한 섬나라에 불과하던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그녀다.

어머니인 앤 볼린의 처형, 왕위 계승권의 박탈, 이복 언니인 메리 여왕과의 갈등으로 불행한 성장기를 보낸 그녀는 단 하루도 편안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지만 탁월한 판단력, 뛰어난 지성, 천재적인 영특함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제인 그레이의 쿠데타 때는 언니 메리를 지지했고, 메리 여왕 집권기에 일어난 토마스 와이엇의 반란 때는 어머니 앤 볼린이 감금되었다 처형된 런던탑에 갇히기도 했다. 이런 험난한 여정에도 그녀는 의연하고 침착하게 대처해 결국 영국 여왕에 오른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나는 국가와 결혼했다”고 선언하며 오로지 영국의 번영을 위한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예민하게 대립했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모두에게 공정하게 개입해 영국 내에서의 종교 분쟁의 불씨를 잠재웠다. 엘리자베스 1세의 가장 큰 업적은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며 해양 패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영국은 아프리카와 서인도 제도, 아메리카 등을 연결하는 거대한 식민지와 상권을 확보해 이후 대영 제국 시대를 연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재위 기간 동안 어머니 앤 볼린에 대한 신성화나 법적 복권을 꾀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살아 있는 권력이었다. 처음에는 앤 볼린을 ‘마녀’라 부르던 사람들이 후에는 ‘신성한 여왕의 어머니’로 격상하기 시작했다. 불꽃 같은 일생을 살다 간 앤 볼린, 그녀는 죽어서 그토록 원하던 아들 대신 딸 엘리자베스에 의해 복권되고 하나의 역사이자 신화가 되었다.

▶아들을 원한 국왕, 사랑을 원한 왕비

영화는 앤 볼린과 헨리 8세의 결혼에서 처형까지 약 3년, 천 일 동안의 기록을 담고 있다. 영국에서는 앤 볼린을 그녀의 왕비 재위 기간에 비유해 ‘천 일의 앤 Anne of Thousand Days’이라 불렀다. 지금도 영국인들은 앤 볼린이 죽던 날, 유난히 파란 하늘을 빗대서 슬플 정도로 영롱하게 파란색을 ‘Anne blue(슬픈 파란색)’라고 부른다. 영화는 앤 볼린을 왕의 사랑과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찬 여인으로 그리며 비난하지만, 또한 그녀를 역사의 희생자로만 보지도 않는다.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당시 권력의 심장부인 궁중에서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볼 뿐이다.

앤 볼린은 재색을 겸비한 뛰어난 여인이었다. 오랜 프랑스 생활에서 익힌 세련된 매너와 화술은 당시 촌스러운 런던 왕궁에서는 매우 색다른 매력이었다. 더구나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내전에서도 가부장적인 권위를 앞세운 헨리 8세에게 당당히 자신의 요구를 제시했던 앤 볼린은 당찬, 그러면서도 주체성이 강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끌렸다’는 말은 반대로 ‘그것 때문에 싫어졌다’와 동전의 양면이었다. 그래서 삶은 유동적이다. 앤 볼린의 주체성과 사교성이 헨리의 마음을 끈 매력임이 분명했지만 싫어지는 순간 그것은 ‘이혼 사유’가 되었다.

영화는 앤 볼린의 일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 시간, 약 3년 동안 일어난 영국의 역사도 중요한 포인트이다. 영국 성공회의 탄생, 프로테스탄트 그룹의 형성, 시민 사회로 가는 주 계층인 젠트리 계급의 성장이 이루어졌고, 여왕의 탄생과 섬나라 영국이 엘리자베스 1세라는 탁월한 군주를 맞아 대영 제국으로 가는 시작점들이 모두 담겨 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단두대로 향하는 앤 볼린의 모습과 그녀의 독백이다. 앤 볼린은 마지막 순간까지 영국의 왕비로서 위엄을 지키려 했지만 주위를 둘러보며 헨리 8세를 찾는다. 권력, 왕위, 종교를 떠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여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앤 볼린은 마지막 말을 남긴다. 자신을 사형에 처하게 한 헨리 8세를 찬양하는 말이다. 사실 앤 볼린의 성격으로 보아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할 거라 예상했지만 앤 볼린은 끝까지 냉정했다. 그녀는 자신의 사후 홀로 남겨진 다섯 살짜리 엘리자베스의 안위를 걱정한 것이다. 거짓이든 진심이 조금은 섞여 있든, 헨리 8세를 죽는 순간까지 원망하지 않고 칭송함으로써 훗날 엘리자베스는 왕위 계승권이 복위되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만약 앤 볼린이 처형장에서 헨리 8세를 저주했다면, 헨리 8세의 강력한 성품으로 봐 엘리자베스는 한낱 여염집 여자로 평생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이는 캐서린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죽는 순간까지 헨리 8세의 이혼 요구를 거절했지만 헨리 8세를 비난하거나 욕하지 않았다. 오히려 앤 볼린과 마찬가지로 순응하고 칭송함으로써 메리 공주의 안전을 도모했다고 볼 수 있다. 권력, 왕위, 사랑 모두 소중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남겨진 이들에 대한 사랑과, 모성애라는 뜨거움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글 정유진(프리랜서) 사진 위키피디아, 픽사베이, Daum영화]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48호 (18.10.09)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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