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덕 칼럼] 아주 정치적인 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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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3일 터키 중앙은행이 17%대의 기준금리를 24%로 올릴 때 그들은 엄청난 용기를 내야 했다. 옛 술탄에 비견되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는 결단이었기 때문이다. 에르도안은 "금리는 착취 수단"이라고 말했다. 금리는 가난한 이들을 더 가난하게, 부유한 이들을 더 부유하게 하므로 최저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 1년 새 통화 가치가 반 토막이 나고 인플레이션이 18%에 이르는데도 그는 금리를 내려야 한다고 우겼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이 스트롱맨의 정견에 냉담하게 등을 돌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저금리를 선호한다. 지난달 26일 연준이 올해 들어 세 번째로 기준금리를 인상하자 그가 기자들에게 말했다. "달갑지 않소. 난 그들이 금리를 올리길 좋아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소."

밥 우드워드의 책 '공포'에 나오는 일화를 보면 금리에 대한 그의 이해는 무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나중에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이 되는 게리 콘을 2016년 대선 직후 처음 면담했을 때였다. 콘은 미국 경제가 좋아 금리는 곧 오를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트럼프가 말했다. "지금 당장 돈을 많이 빌려 갖고 있다 나중에 팔아서 이익을 내야 해." 그는 정부가 그냥 인쇄기를 돌려 돈을 찍어내면 되는 줄 알았던 걸까.

정치인들은 금리에 대한 나름의 소신을 편다. 사실 금리에는 정치적 함의가 엄청나게 복잡하게 얽혀 있다. 금리가 오르내리면 빚을 진 빚쟁이와 빚을 준 빚쟁이의 이해가 엇갈린다. 일자리와 집값에 미치는 단기적인 효과와 장기적인 효과가 엇갈릴 수도 있다. 정치인은 대개 당장 경기를 띄우는 게 표를 얻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흔히 금리를 내리라고 통화당국을 압박한다.

지난 정부 청와대 관계자에게 여러 차례 들었던 말이 있다. "한국은행이 금리만 좀 내려주면 경제가 좋아질 텐데…" 하는 말이었다. 정부가 발 벗고 나서야 할 공급부문 개혁은 어려움이 많으니 수요 면에서 당장 경기를 띄울 금리 인하 카드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이한구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2013년 5월 반년간 금리를 묶어두었던 한은을 "청개구리 심리를 갖고 있거나 나무늘보의 행태를 보이는 일이 없도록…"이라며 압박했다. 2014년 9월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호주 출장 길에 이주열 한은 총재를 만난 후 "금리의 금자도 말하지 않았지만 척하면 척이지 뭐"라고 했다. 한은은 '나무늘보' 발언 다음날, '척하면 척' 발언 다음달에 금리를 내렸다.

요즘은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 최악의 일자리 가뭄과 투자 부진을 생각하면 금리 인상은 아무래도 때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글로벌 자본 흐름을 좌우하는 연준의 금리 인상 발걸음이 빠르니 우리만 마냥 지금 같은 저금리를 고집하기는 어렵다. 한미 간 명목금리 격차가 벌어져도 자본이 유입되는 건 한국의 실질금리가 더 높고 원화 강세 기대감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기대는 금세 바뀔 수 있다.

가장 민감한 이슈는 집값 안정책으로 금리 인상이 필요한가이다. 사실 금리는 크고 둔한 칼이라 서울 강남 집값 잡기 같은 외과수술용 메스로 쓰기에는 부적절하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초저금리가 집값 폭등을 불렀으니 금리를 올려 그 기제를 거꾸로 돌릴 수 있다는 건 너무 단순한 발상이다. 뻥튀기를 원래의 옥수수로 되돌리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이어진 초저금리 정책의 여러 공과를 냉철하게 따져보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전례 없는 통화 완화는 우리가 격렬한 고통 없이 위기를 넘을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역동성을 유지하기 위한 구조조정은 미뤄졌다. 짧은 격통 대신 길게 이어지는 무기력이 몸에 뱄다. 무엇보다 소득과 부의 양극화가 심해졌다. 정치권은 그 때문에 분노하는 이들을 어루만지려 한다. 언어의 조탁에 탁월한 이낙연 국무총리가 "(금리 인상을) 심각하게 생각할 때가 됐다"고 한 건 엉겁결에 한 말이 아닐 것이다.

이 모든 걸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금리 인상은 시간문제인 것 같다. 환란이나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격변이 오지 않는 한 금리는 조만간 오를 것으로 보고 대비하는 게 안전할 것이다. 한은의 고민이 깊을수록 정치인들은 '척하면 척' 같은 말을 애써 삼켜야 한다. 금융통화위원회에 참석하는 7인의 현자들은 금리 결정의 정치적 함의와 파장까지 생각하며 절제된 언어로 통화정책의 큰 그림을 그려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어느 때보다 힘든 불면의 밤이 기다리고 있다.

[장경덕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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