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이 주인이고 군주는 객(客)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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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10.04. 오후 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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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전호근의 한마디로 읽는 중국철학⑲황종희

군주는 마땅히 자기 한 몸의 이익을 이익으로 여기지 않고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익을 받게 하며, 자기 한 몸의 해로움을 해로움으로 여기지 않고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그 해로움을 받지 않게 해야 한다.? (…) 천하가 다스려지느냐 어지러우냐는 왕조의 흥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만백성이 근심하느냐 즐거워하느냐에 달려 있다.



중국 절강성 여요현의 고향 마을에 묻힌 황종희의 묘소. 출처 위키피디아


성은 황(黃), 이름은 종희(宗羲), 자(字)는 태충(太沖), 호는 이주(梨洲)다. 왕수인의 고향인 절강성(浙江省) 소흥부(紹興府) 여요현(餘姚縣)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황중(黃中)으로 <주역>에 정통했다. 아버지 황존소(黃尊素)는 그가 7살 때인 1616년에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영국부(寧國府) 추관(推官)에 임명되었다. 그는 8살 때부터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다니며 학문을 익히고 견문을 넓히는 기회를 얻었지만 그것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청렴한 관료들의 조직 동림당(東林黨)의 핵심 인물이었던 황존소는 천계제(天啓帝) 초기에 어사로 발탁되어 조정에 나아갔다. 당시 천계제는 자신을 황제로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동림당 인사들을 중용했는데 황존소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조정의 요직을 장악한 동림당 인사들은 백성을 수탈하는 세리 제도를 폐지하고 둔전 개발, 수리시설 보완 등 각종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명나라의 부흥을 꾀했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문제의 발단은 황궁 내부에서 시작되었다. 황제의 총애를 얻은 환관 위충현(魏忠賢)을 중심으로 한 엄당(閹黨)의 세력이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동림당 인사를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위충현은 조정의 요직에 자신의 하수인을 앉히고 국가의 기밀을 장악하고 황제의 권력을 농단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황존소는 동림당의 수장이었던 양련(楊漣) 등과 함께 위충현을 탄핵하였으나 도리어 황제의 명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43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죽은 지 닷새가 지나 세상에 나온 아버지의 시신은 피부가 썩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의 나이 17살 때의 일이다. 이때 조부 황중은 그가 드나드는 곳 벽에 ‘너는 구천이 네 아비를 죽인 것은 잊었느냐?(爾忘句踐殺爾父乎)’라는 글을 써 붙여 그로 하여금 부친의 원한을 잊지 않게 했으니, 이 구절은 옛날 오나라 왕 합려가 죽으면서 태자였던 부차에게 구천이 자신을 죽인 원한을 잊지 말고 반드시 갚으라고 남긴 유언이다.

효자였던 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세가 기울어 형편이 어려웠음에도 조부모와 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며,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양명학자 유종주(劉宗周)를 스승으로 모시고 경학과 사학을 배웠다. 스스로 상공(上公)의 자리에 올라 권력을 독점하고 국정을 전횡하던 위충현의 위세는 이듬해 천계제가 죽고 숭정제(崇禎帝)가 즉위하면서 끝났다. 그해 위충현은 황제의 명에 따라 봉양에 안치되었다가 자결했고 그를 따르던 엄당의 무리는 줄줄이 하옥되거나 처형되었다. 새로운 황제는 황존소를 태복경에 추증하고 제사와 장례를 치러주라는 조서를 내렸다.

위충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아버지의 신원을 풀기 위해 상소문 초안을 작성한 뒤 북경으로 가면서 긴 송곳을 장만해 가지고 갔다. 황궁에 나아가 황제를 만난 그는 아버지를 탄핵했던 조흠정과 이실 등을 처형할 것을 주청했고 그들은 모두 형부에 끌려가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는 엄당의 무리 중 허현순, 최응원, 이실, 이영정 등을 직접 심문하면서 가지고 갔던 송곳을 꺼내 그들을 찌르고, 수염을 뽑아서 갖고 돌아와 부친의 신위 앞에 분향하고 대성통곡하며 제사를 올렸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밝힌 뒤 그는, 학자는 모름지기 경학뿐 아니라 역사에도 정통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명 왕조 13조의 실록과 21사를 섭렵하며 학문에 매진하며 한편으로는 수십 명의 제자를 모아 함께 강학하며 인재를 양성했다.

그런데 시대는 갈수록 혼란에 빠졌다. 이미 기울어져가던 명나라는 내부의 반란과 외부의 위협에 끝없이 시달리며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1628년에는 섬서(陝西)의 왕가윤(王嘉胤)이 반란을 일으켜 부호들을 공격하고 관리들을 살해했고, 안채(安寨)의 고영상(高迎祥)과 한남(漢南)의 왕대량(王大梁)이 반란에 가담하더니 1631년에는 서북 일대에서 20만 명에 이르는 농민군이 봉기했고, 1635년에는 고영상이 죽은 뒤 그의 세력을 이어 받은 틈왕(闖王) 이자성의 반란군이 함양을 격파했다. 이 와중에 이전부터 요동과 금주를 공격하며 명나라를 압박해오던 후금은 1636년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제정하고 명나라의 변경을 공격하여 1638년에는 수십 개의 성을 연달아 함락시켰고 이듬해에는 제남(濟南)까지 진출했다.

1641년에는 이자성이 낙양으로 진출한 가운데 청군이 금주(錦州)를 포위하고 영원(寧遠)을 공격했다. 3년 뒤인 1644년에는 이자성의 농민군이 북경으로 진입하여 대순(大順)왕조를 건립했고 숭정제는 자결했다. 그러나 그해 5월 청군이 북경으로 진격하자 이자성은 서쪽으로 달아났다. 명나라가 망한 것이다.

황종희 초상화(1676년). 출처 바이두


황제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스승 유종주와 함께 통곡하다가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고 사직의 위기를 안정시킨다는 기치를 내걸고 의병을 일으켜 청군에 대항했으나 역부족으로 패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마사영(馬士英) 등이 옹립한 복왕(福王)에 의지해 명조의 부활을 꿈꾸지만 도리어 완대성(阮大鋮) 등 공신 세력의 배척을 받아 체포당할 위기에 처했다가 청군이 닥치는 바람에 화를 면하게 된다.

이후에도 그는 노왕(魯王) 주이해(朱以海)를 섬기며 군사를 양성하여 청군에 맞섰지만 번번이 지고 만다. 군사를 잃고 난 뒤에도 청군의 공격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도피하거나 산중에 은거하기도 하며 항청(抗淸)활동을 전개해 나갔지만 이미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마침내 그가 40살 때 청 황제가 명 왕조의 유신으로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그 가족까지 처벌하겠다는 조서를 내리자 그는 어머니 요씨(姚氏)가 화를 당할까 걱정하여 복왕의 허락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간다. 아버지의 억울함은 풀었지만 나라를 구하지는 못한 것이다. 이후 명나라는 13년 뒤인 1662년에 계왕(桂王)이 오삼계(吳三桂)에게 살해당하며 완전히 막을 내린다.

반청활동을 접은 그는 고향에 머물며 저술과 강학에 몰두하여 53세 때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을 썼고, 67세에는 당대의 거작이자 최초의 중국철학사라고 할 수 있는 <명유학안(明儒學案)>을 62권으로 완성했으며, 맹자의 왕도정치를 풀이한 <맹자사설(孟子師說)>, 음악 이론을 전개한 <율려신의(律呂新義)>, 천문서인 <수시력고(授時曆考)>, 산학서인 <구고도설(勾肱圖說)>, <개방명산(開方命算)> 등 모두 112종 1300여권의 저술을 남겼다.

1695년 7월, 그는 <송원학안(宋元學案)>을 집필하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86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이 죽으면 관을 마련하지 말고 이불에 싸서 매장하라고 유언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라 잃은 백성으로 시신이 빨리 썩기를 바랄 뿐이다.

그가 남긴 평생의 저술 중 필생의 저작은 <명이대방록>이다. 이 책은 명조가 완전히 망하던 1662년 겨울에 완성한 대작으로 명 왕조 멸망의 원인을 찾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꿈꾸던 그의 이상이 담겨 있다. ‘명이(明夷)’란 <주역> 64괘의 하나로 위에 땅이 있고 아래에 태양이 있는 모양의 괘를 가리키는데, 해가 땅 아래로 떨어진 암흑의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며 동시에 명나라가 망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방(待訪)’은 새로운 시대의 현명한 군주가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결국 ‘명이대방록’은 암흑의 시대에 훌륭한 군주를 만나 자신의 의견이 쓰이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이 책의 첫 번째 편 <원군(原君)>은 ‘임금에 관하여’란 뜻으로 여기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는 천하의 백성이 주인이고 군주가 객(客)이어서 군주는 천하를 위해 평생 동안 노력했는데, 지금은 군주가 주인이고 백성이 객이 되어 백성은 군주를 위하느라 편안히 쉴 겨를이 없다. 군주는 마땅히 자기 한 몸의 이익을 이익으로 여기지 않고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익을 받게 하며, 자기 한 몸의 해로움을 해로움으로 여기지 않고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그 해로움을 받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군주는 천하 사람들의 골수를 빼먹고 천하의 자녀들을 이산시켜 자기 한 사람의 쾌락만을 받들게 하고 있다.

명이대방록 <원신(原臣)>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신하가 벼슬하는 이유는 천하를 위해서이지 군주 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다. 천하가 다스려지느냐 어지러우냐는 왕조의 흥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만백성이 근심하느냐 즐거워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가 볼 때 한 왕조가 망하고 그것을 짓밟고 또 다른 왕조가 들어서는 동안 백성이 주인인 적은 없었다. 무참히 전쟁터에 내몰리지만 백성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나라도 천하도 아니고 왕조를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가 구하려고 한 것은 나라가 아니라 천하였다. 백성이 주인인.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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