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으로 추가]
《슬램덩크》에서 농구가 아닌 것으로 소통이 이루어지는 관계들이 있다. 농구 이전의 인연으로 다가와 있던 사람들, 바로 강백호와 정대만의 친구들이다. 지나간 세대에게 매주 행복의 시간을 제공했던 신화창조의 연대기, 그 마지막 한 땀은 농구와 전혀 관련이 없었던 ‘친구’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 ‘아름다운 서브’ 중 일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캐릭터들이 어느 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자신의 완력으로는 끌어올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전체의 얼개를 미리 기획하고 그린 것이 아니라 스토리 속의 우연과 필연을 따라간 캐릭터들 각자의 서사였다고…. 특히나 윤대협에 대해서는 작가 자신조차 그 녀석을 이해하기가 힘들다며 너스레를 떤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서글서글해 보이는 선한 인상이 도리어 전혀 속내를 읽어낼 수 없는 포커페이스로서의 기능성이다. 그리고 이 지점이 서태웅에게로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마성의 매력이기도 하다.
----- ‘불확실성의 에이스’ 중 일부
드디어 공개된 이정환의 얼굴. 아직은 강백호로부터 ‘애늙은이’의 별명을 부여받지 않은 시기, 경기장에서 한창 반칙을 저지르고 있던 강백호에게는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다가오게 될 미래였지만, 독자들에게는 벌써부터 확인되고 있던 노안老顔의 아우라였다. 루크 스카이워커에게 다가선 다스베이더의 포스라고나 할까? 말풍선의 대사를 지우면, 윤대협에게 I’m your father를 고백하고 있는 듯했던 카리스마 넘치는 노안.
----- ‘1인자의 카리스마’ 중 일부
스토리 내에서 통용되는 시선과 독자의 시선이 일치하는 선수가 있다. 바로 상양의 김수겸이 그 주인공이다. 남자들의 격렬한 세계와는 조금 동떨어진, 마치 순정만화의 주인공 같은 외모는 굳이 차별화 전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딱 봐도 그냥 대번에 알 수 있다. 이 캐릭터는 미소년이란 사실을….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너무 꽃미남 캐릭터를 의식했던 탓인지, 간간히 채소연과 헤어스타일 하나로 변별이 되는 장면도 있고, 서로 다른 좌표 선상에 있는 서태웅의 수려함이 상양과의 대결에서는 순정만화 스타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노우에 다케히코 자신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작가 특유의 유머 코드에서 유일하게 비껴간 미학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 ‘미학의 완성은 얼굴’ 중 일부
그런 게 또 삶이라는, 결코 아름답지 않은 진리를 인정하며 아름다운 한 조각의 추억으로 돌아보기까지는 또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황태산만이 짊어지고 가야 하는 잔인한 운명은 아니었다. 저마다의 열정과 최선이었음에도 북산에 좌절을 맛봐야 했던 모든 팀에게도 또한 그런 게 삶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약체라고 무시했던 설움을 딛고서 이루어낸 감동을 도중에 멈출 수밖에 없었던 북산에조차도, 또한 그런 게 삶이었다.
----- ‘과거와 현재의 조우’ 중 일부
비록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더라도, 좋아했던 일에 쏟아부은 열정과 노력의 시간을 담아 쏘아 올린 농구공. 그것만으로도 권준호에게 슛을 쏠 자격은 충분했다.
----- ‘최선을 산다’ 중 일부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렇듯 내가 지닌 모든 걸 불사르는 열정이다. 승패는 차후의 문제이다. 적어도 ‘당시에는 최선이었다는’ 후회가 아닌, ‘지금 생각해도 최선이었다는’ 만족을 기억으로 남기려는, 몰아적 집중을 가능케 하는 행위이다. 이 상황이 다시 반복된다 해도 이 이상이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한 결과에도, 그 이상을 해내지 못했다는 후회가 남기 마련이다. 채치수에겐 그런 열정이 구현된 행위가 바로 농구이다. “농구… 좋아하세요?” 강백호에게 던졌던 채소연의 질문에 대한 궁극의 대답은, 자신의 오빠인 채치수였는지도 모르겠다.
----- ‘고릴라의 꿈’ 중 일부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 거머쥐어야 할 하나의 가능성이, 내가 가장 원하고 바라는 소망이라면, 그 이후에 펼쳐질 다른 가능성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숱한 곡절 끝에 여기까지 왔는데, 이 기회가 다시 다가온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다음이란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 운명의 순간이 어떤 미래에 닿아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미래에서 나는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이 가져다주는 후회가 더 클까? 니체의 ‘영원회귀’는 그것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운명의 순간이 다시 한번 반복된다 해도, 번복하지 않을 수 있는 가치, 그것을 택하라는 것이다. 다시 한번 반복된다 해도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하겠는가? 채치수와 강백호의 대답은 Yes였다.
----- ‘나는 지금입니다’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