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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에 대해서 괸찮으시다면 엄청나게 많이 써주세요~~

저가 파워포인트로 삼별초의 항쟁에 대해서 쓰려구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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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6.11.02 조회수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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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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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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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도덕 64위, 전통 예절, 의식, 세시풍속, 명절 81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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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는 최우의 집권기에 나라 안에 도둑이 들끓자 용사를 모아 매일 밤에 순찰, 단속하게하여 그 이름을 야별초라 하였는데, 군사의 수가 많아지므로 이를 나누어 좌별초와 우별초라 하였고, 또 몽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온 자들로써 편성된 신의군과 함께 삼별초라 하였다.


 삼별초의 정확한 설치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사}의 야별초에 대한 기록은 1232년(고종 19)에 처음 보이고, 신의군 및 좌 우별초에 대한 기록은 1257년과 1258년에 각각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보면 야별초가 만들어진 것은 최우 때라 할 수 있지만 삼별초로 형성된 것은 최씨정권 말엽이라 할 수 있다.


 삼별초는 날쌔고 용감한 군대로 알려져 전투와 경찰, 그리고 형옥의 임무를 맡았다. 경찰의 기능은 원래 출발이 도둑을 잡는데 있었기 때문에 도둑을 잡고 난폭을 금지하는 것은 원래의 사명인 것이다. 그리하여 삼별초는 전국에 걸쳐 경찰권을 행사하였다. 형옥의 기능은 죄인을 잡아서 가두기도 하고 죄를 심문하기도 했는데, 비단 도둑뿐만 아니라 반역죄인까지도 관할하였다. 군사활동에 있어서는 수도경비대, 친위대, 특공대, 경찰대, 전위대, 편의대 등의 임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특히 몽고와의 전투에 있어서는 그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특히 1253년 무렵부터는 정부 정규군의 활동은 거의 없어지고 그 대신 야별초 내지 삼별초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삼별초는 야습으로 적을 무찌르기도 하고 복병 또는 협격으로 적을 쳐부수기도 하며, 최선두에 서서 적을 공격하기도 하고 적의 소재를 정탐하기도 했다.

 1232년(고종 19) 몽고의 침략을 피하여 최씨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한 뒤 대몽항전의 전 시기를 통하여 삼별초는 가장 강력한 전투 병력이었다. 삼별초는 강화도를 수비하는 방어의 책임을 맡았을 뿐 아니라, 자주 성을 나와 본토의 각지에서 몽고군과 대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258년 강화도에서 최씨정권이 몰락한 뒤에도 삼별초는 최씨의 권력을 이어받은 김준과 그 뒤를 이은 임연의 지휘 아래에 복속하여 계속 고려의 무력장비를 대표하는 구실을 하였다. 강화도에서 정변이 있을 때마다 삼별초는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김준이나 임연이 모두 삼별초의 협력을 얻어 정권을 잡는데 성공하였다.

 삼별초는 경찰과 전투 등 공적인 임무를 담당했으며 국가의 재정에 의하여 양성되어 녹봉을 받았으며, 그 지휘자도 도영, 지휘, 교위 등 국가 관료가 배치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권신의 사병과는 구별되어야 할 성격의 군대였으나 권신의 정치 권력과 너무 깊이 유착되어 있었다는 면에서는 사병적 성격이 농후한 것이었다.


삼별초의 난 ({고려사절요 제18 19권)

 

<5월> 재추들이 모여 다시 옛 서울에 도읍하기를 의논하고 날을 정하여 방을 붙이니, 삼별초가 다른 마음이 있어 쫓지 않고 제 마음대로 창고를 열었다. 장군 김지저를 강화에 보내어 삼별초를 파하였다. 왕이 다시 옛 서울에 도읍하니 삼별초가 도리어 의심과 불안을 품으므로 파한 것이다. 지저가 명부를 취하여 돌아오니 삼별초들이 그 명부를 상국(원) 조정에 아뢸까 두려워하여 더욱 반역할 마음을 품었다.

<6월> 장군 배중손, 야별초 지유 노영희 등이 난을 일으키고 사람을 시켜 나라안에 외치기를 "오랑캐 군사가 크게 이르러 인민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돕고자 하는 자는 모두 구정으로 모이라" 하였다. 중손과 영희가 삼별초를 거느리고 시랑에 모이어 승화후 온을 협박하여 왕을 삼고, 관부를 설치하고 대장군 유존혁, 상서 좌중 이신손을 좌우승선으로 삼았다. 앞서 적이장군 이백기에게 함께 난을 일으키기를 꾀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니 죽였다. 장군 현문혁은 도망하여 옛 서울로 날아나다 팔에 활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자 아내는 "내가 쥐같은 놈들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하고 드디어 두 딸을 끌고 강에 빠져 죽었다. 적이 문혁을 잡았으나 그 용맹을 아깝게 여겨 죽이지 않았는데 얼마 뒤에 개경으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직학 정문감을 승선으로 삼아서 정사를 잡게하니, 문감이 말하기를, "적에게 붙어서 부귀를 누리느니 차라리 지하에 몸을 깨끗이 하겠다."하고 물에 빠져 죽었다. 그 아내 변시도 또한 물에 몸을 던졌다.

 강화에서 지키던 군사가 많이 도망하여 육지로 나가니, 적이 능히 지키지 못할 것을 헤아리고 배를 모아 공사의 재물과 자녀를 모두 싣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구포로부터 항파강까지 배머리와 꼬리가 서로 접하여 무려 1천여 척이나 되었다. 그 때에 백관들이 모두 왕을 맞으러 나갔는데 그 처자들은 모두 적에게 포로가 되어 통곡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김방경을 역적추토사로 삼아 군사 60여명을 거느리고, 몽고 송만호 등의 군사 1천여명과 함께 삼별초를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에 이르러 적선이 영흥도에 대어 있는 것을 바라보고 방경이 치려하니 송만호가 두려워하여 말리었다. 적은 이에 도망하였다. 적중으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온 자가 남녀 노유 모두 일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송만호가 적의 도당이라하여 모두 사로잡아 돌아왔다.

 <8월> 세자 침을 몽고에 보내어 배중손 등의 반역한 실상을 아뢰고 또 절일을 하례하는데 추밀원부사 원부, 상장군 송송례, 중승 홍문계가 따라갔다.
 적이 진도에 들어가 웅거하여 여러 고을을 침략하며 황제의 명이라 거짓 꾸며서 전라도 안찰사로 하여금 백성을 독촉하여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섬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9월> 전라도 토적사 참지정사 신사전이 파면되었는데, 사전이 적을 칠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군 양동무와 고여림 등이 수근으로 진도를 치니 적이 장흥부로 들어가 관군 20여명을 죽이고 도령 윤만장을 사로잡고 재물과 곡식을 노략질하였다.
 김방경이 몽고원수 아해와 함께 군사 1천으로 진도를 쳤는데 그때는 적의 기세가 매우 성하여 여러 고을이 바람을 따라 적에게 항복하였었다. 적이 처음에 나주를 포위하고 군사를 나누어 전주를 치니, 나주 사람들이 전주 사람들과 항복하기를 의논하므로 전주 사람들이 또한 망설였다.
 

<11월> 적이 제주도를 함락시켰다.
윤월에 왕이 다루하치에게 청하여 다시 김방경을 보내어 적을 쳤다.

 <12월> 김방경이 진도에 이르니 적이 모두 배를 타고 성하게 기치를 벌여 세우고 징과 북소리가 바다에 들끓었다. 또 성위에서는 북치고 크게 소리질러 기세를 돋우니, 아해가 싸우기를 겁내어 배에서 내려 막을 치고 또 물러가 나주에 둔을 치도록 명령하였다. 방경이 말하기를 "원수가 만일 물러가면 이것은 약함을 보이는 것이다. 적이 이긴 기세로 몰려 온다면 누가 감히 그 칼날을 당하겠는가. 황제께서 만일 문책한다면 장차 무슨 말로 대답하려는가" 하니 아해가 감히 물러가지 못하였다. 방경이 말하기를 "결승이 오늘에 있다"하고 적의 가운데로 돌입하였더니 적이 배로 포위하여 몰고 갔다. 방경의 배에는 활살과 돌이 다하고 군사는 모두 화살에 맞아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미 진도에 가까워지니 언덕에 적의 구사가 있다가 칼을 번득이며 배 가운데로 뛰어들므로 김천록이 짧은 차응로 막아 찔렀다. 방경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차라리 고기의 뱃속에 장사지낼지언정 어찌 적의 손에 죽으랴"하고 바다 가운데로 빠지려 하니 위사 허송연, 허만지 등이 붙들어 말리고 사람마다 모두 결사적으로 싸웠다. 방경은 호상에 걸터앉아서 군사를 지휘하였다. 장군 양동무가 큰 배로 공격하여 구원하니 적이 흩어졌으므로 드디어 포위를 무너뜨리고 나왔다. 방경이 장군 안세정, 공유의 무리를 달려와 구원하지 않은 죄로 꾸짖어 죽이려 하니 아해가 말리어 면하였다. ({고려사절요} 제18권)

 

 

삼별초와 관련된 인물

 

김방경
金方慶 1212~1300(강종1~충렬왕26)
  
고려의 명장. 자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 본관은 안동. 음보로 16세에 산원(散員)이 되고 감찰어사를 거쳐 서북면 병마판관이 되었다. 12 70년(원종 11) 배중손(裵仲孫) 등이 일으킨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였고, 74년과 81년 원나라에서 일본을 정벌할 때 고려군 도원수로서 종군하였다. 충직하고 근검하였으나 부하 장병들의 민폐를 막지못해 민심을 잃었으며, 89세로 병사하였다.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추증되었다.


 김통정
金通精 ?~1273(원종14)
  
고려시대의 반장(叛將). 1270년(원종 11) 삼별초의 장수로 있을 때,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가 결정되자 배중손(裵仲孫)과 함께 이에 반대하여 서해 일대를 경략하면서 진도로 내려가, 그곳을 거점으로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몽골과 고려에 완강히 저항하였다. 토벌군에게 쫓기어 탐라(제주)로 들어가 끝내 버티다가 탐라가 정복당하자 자살하였다.


 나유
羅裕?~1292(충렬왕18)
  
고려의 무신. 본관은 나주. 음보(蔭補)로 경선점녹사(慶仙店錄事)가 되어, 1273년(고려 원종 14) 김방경(金方慶)이 제주도의 삼별초(三別抄)를 토벌할 때 대장군으로 종군하였다. 90년(충렬왕 16) 합단(哈丹)이 동북 변경을 침범하였을 때,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승진하였다. 그후 원(元)나라에 정조사(正朝使)로 파견되어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의 호를 받았다.


 배중손
裵仲孫 ?~1271(원종12)
  
고려 후기 장군. 1270년 원종이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옮길 것을 명하고, 이에 반대하는 삼별초를 폐지하자 삼별초의 영수인 배중손은 야별초의 노영희(盧永禧)와 함께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임금으로 추대한 후 몽골과 항전을 계속하였다. 1,000여 척의 배를 징발하여 진도에 내려가 성곽을 쌓는 등 근거지를 마련하여 삼별초 공격에 나선 여몽연합군을 여러 차례 물리쳤다. 그러나 71년 몽골의 홍다구(洪茶丘)의 대군의 지원을 받은 여몽연합군에게 진도가 함락되면서 전사하였다. 삼별초는 제주도로 옮겨 73년까지 항전을 계속하였다.


 별초군
別抄軍
  
고려시대 특수부대. 고종 때 최우(崔瑀)가 도성 안의 도둑을 잡기 위하여 만든 야별초(夜別抄)가 시작이 되어 전국에 좌· 우별초를 두게 되었다. 몽고의 침입이 있자 몽고군과 싸워 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이들 중 몽고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나온 자들로 편성한 신의군(神義軍)을 합쳐 삼별초(三別抄)라 하였다. 또 조선시대 특수한 지역을 수비하기 위하여 그 부근 장정들을 뽑아 편성한 군대로서 중기 이후 왕이 거둥할 때 어가(御駕)를 호위하기 위하여, 별초군이라는 이름으로 금군(禁軍) 외에 50명을 뽑은 일이 있다.


 신의군
神義軍
  
고려시대 최씨무신정권의 특수군대인 삼별초(三別抄) 예하 3군 중의 하나. 고려에 침입하였던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주해 온 자들로 조직된 군대로 좌별초(左別抄)· 우별초(右別抄)와 함께 삼별초를 이루어 대몽항쟁의 선봉이 되었다.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몽골과 강화가 성립되자, 진도· 제주도 등지를 근거지로 하여 항쟁을 계속하다가 마지막 집권자인 임유무(林惟茂)가 죽은 뒤 1270년(원종 11) 혁파되었다.


 금군
禁軍
  
왕궁을 수비하는 군대. 금려(金旅)· 금병(禁兵)이라고도 한다. 고려 후기에 집권층 자제를 모아 여러 종류를 부대로 만들었는데 이를 총칭하여 성중애마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666년(현종 7)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 우림위(羽林衛) 등 3군영을 합쳐 금군청을 설치함으로써 금군이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1755년(영조 31) 용호영(龍虎營)으로 개칭하였다.



 원종
元宗 1219~74(고종6~원종15)
  
고려의 제24대 왕(재위 1259 ~74). 이름은 식(植). 초명은 전(). 자는 일신(日新). 시호는 순효(順孝). 고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안혜태후 유씨(安惠太后柳氏), 비(妃)는 정순왕후(靜順王后)이다. 1259년 강화를 청하기 위해 몽골에 들어갔으나 고종이 죽자 60년에 귀국하여 즉위하였다.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려다가 69년 임연(林衍)에 의해 폐위되었으나 원나라의 문책으로 다시 복위되었다. 같은 해 원나라에 입조하였다가 70년에 귀국, 개경 환도를 선언하자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다. 능은 소릉(韶陵)이다.


 장일
張鎰 1207~76(희종3~충렬왕2)
  
고려시대의 문신. 초명은 민(敏). 자는 이지(弛之). 시호는 장간(章簡). 본관은 창녕.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승평판관· 직사관· 전중시어사· 병부시랑 등을 지냈으며, 여러 차례 몽골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270년 삼별초(三別抄)가 난을 일으키자 대장군으로서 경상도 수로방호사가 되어 이를 진압하고, 74년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한희유
韓希愈 ?~1306(충렬왕32)
  
고려시대의 무신. 가주한씨(嘉州韓氏)의 시조이다. 대장군으로 있을 때 김방경(金方慶)을 도와 삼별초 정벌에 공을 세우고, 일본 정벌의 선봉장이 되었다. 동북면도지휘사로 있을 때 원(元)나라 황제로부터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의 벼슬을 받고, 이후 두 차례의 삭직· 유배를 당하였으나 도첨의좌중찬(都僉議左中贊)에까지 올랐다.


 홍다구
洪茶丘 1244~91(고종31~충렬왕17)
  
원(元)나라의 무장. 본명은 준기(俊奇). 다구는 아명(兒名). 몽골명은 찰구이(察救爾). 할아버지 대에 몽골에 투항하여 몽골에서 태어났으며, 1269년 몽골군을 이끌고 고려에 왔다. 삼별초의 난 때는 고려장군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진도· 제주도에 출병하여 이를 토벌하였다. 원의 일본 정벌 때 정동도원수(征東都元帥)로서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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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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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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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29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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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처음에는 무신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사병이었으나

몽고(원)가 쳐들어 오자 고려의 군사로 싸웠다.

고려가 몽고와 강화하자 반란을 일으키고

삼별초는 강화도->진도->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기며 열심히 싸웠다.

그러나 고려와 몽고연합군에 제압당했다.

별초란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고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나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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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gk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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