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받아쓰기 공책을 보고/바람과 나무, 아이와 노인,/귀신과 저승사자 모두/한마디씩 하고 간다,/"내가 이렇게 말했나?"/"내 이야기는 이게 아닌데."/"잘못 들었군."//귀가 어두워져서 걱정이다. -'자서(自序)'
그렇다. 시집 '그는 걸어서 온다'에 실린 이 시에서처럼 윤제림은 듣고, 받아 적는다. 그는 2015년 봄에 '고물과 보물'이라는 책을 냈다. 사물에 대한 산문을 모았다. 이때 윤제림은 산문을 통해 사물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면서, '물활론'을 말했다. 그는 책의 서문에 쓰기를 "그것들이 말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내 글쓰기는 '받아쓰기'다. 사람, 짐승, 식물이 나에게 대신 말해달라고 외치고 떠들고 속삭인다. 그래서 감각기관 중에 귀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은 완전히 사실이다. 그에게 사물과 인생은 산문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인생의 여러 국면은 그에게 시와 산문으로 나누어 받아 적게 한다. 시로 받아 적을 때 그의 이름은 윤제림이지만 산문으로 받아 적을 때는 윤준호가 된다. 그래서 '고물과 보물'의 지은이는 윤준호다.
동시는 윤제림의 세 번째 글쓰기 방식이다. 윤제림을 동시 쓰는 사람으로 아는 독자는 많지 않다. 그러나 윤제림은 시인의 관을 쓰기 전에 동시로 먼저 문단에 거처를 마련했다. 1987년 봄과 가을에 동시와 시로 각각 등단한 것이다. 한 시대를 수놓은 동화작가 정채봉의 예에서 보듯 뛰어난 산문가는 좋은 시인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좋은 시인이 투명한 영혼의 소유자일 때 아름다운 동시를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위에 인용한 윤제림 시인의 '자서'는 윤준호가 낸 산문집의 서문 '그것들이 말했다'를 시로 쓴 것과 같다. 이번에 동시집 '거북이는 오늘도 지각이다'를 내면서도 윤제림은 거듭 고백한다.
"귀가 조금 큰 편이라서 그럴까요. 남의 소리를 잘 듣습니다. 잘 들어 주니까, 바위와 나무가 말을 걸어옵니다. 꽃과 구름이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귀신이 와서 수다를 떱니다. 강아지와 고양이가 고민을 늘어놓습니다. … 물론, 잘못 알아들을 때도 많습니다. 꽃 이름을 혼동하기도 하고, 새의 울음을 노래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기억하기도 하고, 중요한 대목을 빼먹기도 합니다. 안과 밖을 곧잘 뒤집고, 머리와 꼬리를 바꿔 놓습니다."
물 구름 나무 의좋게 모여 사는/강마을에선/하늘도 되고 강물도 되고 싶은 산들이/하늘도 되고 강물도 되는 게/보인답니다.//파란 햇살 머금고 파랗게 솟는 봉우리/푸른 강물 마시고 푸르게 흐르는 산자락/휘이휘이 삐이삐이/휘파람 부는 저녁 산.-'물 구름 나무 모여 사는 강마을에선' 중에서
'구름처럼 높아지고 싶은 강물은 나무를 타고 하늘로 오르고, 헤엄치는 강물이 되고픈 까만 먹장구름은 초록 빛깔 아름다운 장대비로 내려와 흐른다. 오랜 시간을 두고 일어나는 자연의 순환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고요하고, 땅에선 하늘로, 하늘에선 땅으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마을.' 윤제림이 쓴 동시 속에는 마음들이 모인 작은 마을이 나온다. 그곳은 "꽃집 미니 트럭은 지금 막 문을 연 약국 앞에서,/퀵 서비스 오토바이는/아이들로 붐비는 문구점 앞에서,/속셈 학원 버스는 길 건너 정류장 시내버스 뒤에서,/암탉 한 마리가 그려진 치킨집 꼬마 자동차는/골목 끝에서//사람 하나씩 조심스럽게 내려놓고/가려던 길을 가거나/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눈 온 날 아침의 등굣길 풍경(아침 배달)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자란 동심은 장차 어른이 되어 윤제림이 쓴 시집 속에서 우리를 맞는다. 예컨대 '한여름 밤의 사랑노래' 같은 작품들이다. 여기에도 마을이 있고 동심이 있고, 사무치는 사랑이, 그리고 지극한 삶이 있다.
산장여관 입구에도 매표소 광장에도/학소대에도 선녀탕에도/오늘은 어제보다 더 많은 별이 떴다.//막차마저 놓쳤는지 이십 리 길을 그냥 걸어들어온/가난한 연인들과 민박집 주인 여자의/숙박비 흥정이 길어지고 있을 뿐/산속 피서지의 밤은 대체로 평화롭다.//제아무리 잘 된 영화래봤자/별 다섯 개가 고작인데,/우리들 머리위엔/벌써 수천의 별들이 떴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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