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역사속 그때 그는 왜?

지동설 주장한 책 낸 갈릴레이, 종교재판정에 서다

입력 2018. 10. 03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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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1633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독백해야만 했을까? (上)


 

죽는 순간까지 신앙과 과학의 공존을 믿은 학자이면서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 일반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천문학자! 바로 근대 초기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1564~1642)를 일컫는다. 지동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그가 종교재판정을 걸어 나오면서 중얼거렸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E pur si muove)”는 말은 그 진위를 떠나서 갈릴레이의 금언으로 기억되고 있다.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하는 갈릴레이.

 

이 짤막한 독백은 당시 그의 속마음은 물론 당대 교권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무수한 지식인들의 생각을 대변했다. 그렇다면 왜 갈릴레이는 이 말을 목청껏 외치지 못하고 입속으로만 읊조려야 했을까? 이 말이 담고 있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기에 당시 그리스도교 교회는 이를 금지하려고 했을까? 이러한 견해가 이후 역사 전개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의문들에 답하려는 한 시도다.
 

 

폴란드 출신의 사제 코페르니쿠스가 임종 직전에 발간한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표지.

 

사건의 역사적 배경

갈릴레이의 독백에 관해 알아보기 이전에 우리는 그가 종교재판정에 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 즉 당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양 역사에서 18세기를 ‘혁명의 시대’로 명명하는데, 이러한 정치적 격변이 벌어지기 전에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선행됐음을 암시하듯 흔히 17세기는 ‘과학혁명의 시대’로 정의되고 있다. 유럽 근대사회가 발현하는 데 자양분이 되는 정신적 진보가 바로 이 시기에 이뤄졌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과학혁명’은 16~17세기를 통해 유럽에서 수학·천문학 등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일어난 급격한 발전을 지칭한다. 좀 더 정확하게는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 발표에서 1687년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이 완성된 시기에 걸쳐서 일어난 움직임을 말한다. 바로 이때 과학의 내용뿐만 아니라 과학의 방법·목적 및 그 사회적 위치에 심대한 변화가 일어났고, 이것이 이후 유럽인의 삶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마디로, 과학혁명의 원인은 단순히 기계발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지적 혁명’에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지적인 자각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갈릴레이 이전과 이후에 다양한 선각자들에 의한 일종의 ‘지적 축적의 과정’이 있었다. 일찍이 르네상스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실현성은 까마득했으나 비행기·낙하산·잠수함 등 다양한 과학적 아이디어를 제시한 바 있다. 이후 주로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지적 탐구의 새로운 방법론이 대두했다.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은 지식 획득의 새로운 방법으로 실험과 경험을 중시한 귀납법을 제시해 정의와 명제 중심 사고에 빠져 있던 중세 스콜라 철학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프랑스의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선언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인간의 이성을 통해 일단 모든 것을 의심해 보라고 역설했다. 모든 것이 신의 은총과 섭리로 조화롭게 움직이고 있다는 중세의 사고체계에 대한 불만에서 나온 외침이었다.

이처럼 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균열의 틈을 더욱 넓혀서 중세의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것은 다름 아닌 천문학이었다. 1543년 폴란드 출신의 사제 코페르니쿠스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간하면서 바야흐로 불이 붙기 시작했다. 장기간 간직하고 있다가 거의 임종 직전에야 발표한 이 저술에서 코페르니쿠스는 중세 이래 금기 중 금기였던 태양중심설, 즉 지동설을 내세웠다. 태양계와 항성계의 중심은 태양이며 지구는 단지 그 둘레를 돌고 있는 행성에 불과하다는 것이 골자였다.

오늘날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당연한 상식이 왜 당시에는 그토록 문제였을까? 단적으로 중세 이래의 천동설을 반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동설은 기원 2세기경 그리스인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가 정립한 우주관으로 나름의 긴 역사를 갖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우주는 공 안의 공처럼 동일한 중심을 지닌 천체들의 집합체로서 그 안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는 곳은 바로 지구였다. 고로 태양을 포함해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천체들은 지구 둘레를 돌고 있는 행성에 불과했다.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해 놓은 우주관, 즉 지상계는 4원소(흙·물·공기·불)로 이뤄진 불완전한 세계로 생성과 소멸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데 비해 천상계는 에테르라는 특수물질로 가득한 영구불변한 세계라는 가설이 가미되면서 나름의 정교한 논리체계를 갖춰왔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우주관이 중세에 교회 교리와 합해져 약 1400년 이상이나 서구인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한 것은 물론 이에 대한 의심을 신에 대한 불경죄로 여겼다는 점이다. 천동설에 따르면,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고 신의 은총을 받은 인간은 지구 상에서 가장 존엄한 존재였다. 바로 이들 인간을 신의 세계로 인도하는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는 주체가 교회와 성직자였다. 그런데 지구가 천체의 중심이 아니고 태양의 주위를 도는 행성에 불과하다면, 지구중심설을 토대로 교회의 계서(階序)와 권위를 확립하고 신의 은총과 섭리를 설파해온 중세 교회의 신앙체계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지동설을 따르는 것은 극히 불경스러운 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가톨릭교회의 탄압이 가열되면 될수록 천문학자들의 호기심은 더욱 불타올랐다. 먼 옛날 아리스토텔레스가 구축해 놓은 고대의 사상체계로 실험과 관측을 통해 검증되는 실제 세계의 구성과 움직임을 설명하려다 보니 상호 모순이 거의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일단 코페르니쿠스가 비밀의 방문을 열어젖히자 1600년 화형당한 브루노처럼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그 안을 들여다보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처음에 이들의 관심은 수학적 질서로 제시된 우주의 운행원리를 실제 관측을 통해 입증하려는 방향으로 집중됐다. 당대 최고의 현장 천문학자였던 티코 브라헤의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를 거듭한 케플러(J. Kepler)는 마침내 ‘모든 행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형의 궤도를 그리며 회전한다’는 유성 운행 법칙을 주창하기에 이르렀다. 기존의 천동설로는 설명되지 않았던 난제들이 하나둘씩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갈릴레이의 초상화.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태양중심설 중세교회 신앙체계와 정면 배치

신에 대한 불경죄로 여기고 탄압 지적 호기심 자극받은 천문학자들

수학적으로 제시된 우주 운행 원리 실험·관측 통해 검증하고 난제 풀어

지식인들끼리 공유하던 새 우주관 갈릴레이 등장으로 대중들에게 전파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지적 움직임은 아직 지식인 세계의 범주에 머물러 있었다. 일반인들은 여전히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믿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교회가 이 명제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이때 지동설이라는 새로운 우주관을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림으로써 중세 교회의 토대를 뒤흔든 한 인물이 이탈리아에서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그는 최신식 망원경을 활용한 새로운 방법으로 코페르니쿠스가 반세기 이전에 주장한 지동설의 타당성을 실증해 보고자 했다. 얼마 후 그는 이탈리아에서 이론과 실습을 겸비한 다재다능한 대학교수이자 명문가의 대표 수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1633년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의 종교재판정에 서야만 했다. 그가 피소된 직접적인 죄목은 『대화』의 출판에 있었다. 이 책에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전파를 금하는 교회의 1616년 칙령을 어기고 태양중심설이 단순히 하나의 가설이 아니라 진리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재판정은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고, 그는 자필 자백서에 서명한 뒤 자신의 신념 포기를 공개적으로 선언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당시 70세였던 이 늙은 학자는 왜 교회의 칙령을 위반하면서까지 책을 출판한 후 자신의 신념을 공개적으로 철회해야만 했을까?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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