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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연희사전

김창환

[ 金昌煥 ]

김창환(金昌煥, 1855-1937)은 전남 나주군 삼도면(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에서 태어나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에 활동한 판소리 명창으로, 이른바 근대 오명창에 속하는 인물이다. 본적은 전남 광산군 삼도면 내산리 221번지이다.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 임방울(林芳蔚, 1904-1961)의 외숙이자, 판소리 명창 이날치(李捺致, 1820-1892)·박기홍(朴基洪)과 이종 간, 판소리 명고 김종길(金宗吉, 김정길(金正吉)과 동일인물로 추정, 1875-1964)과 재종 간이다. 판소리 명창 김봉이(金鳳伊)·김봉학(金鳳鶴, 1883-1943) 형제의 아버지이다.

김창환

김창환 『정선조선가요집(精選朝鮮歌謠集)』. 1936

어린 시절 이날치를 통해 가문소리를 습득했으며, 이후 정창업(丁昌業, 1847-1889)을 본격적으로 사사하면서 판소리의 기틀을 다졌다. 20대 중반에 신재효(申在孝, 1812-1884) 문하에서 이론과 실기에 대한 지침을 받았다. 김창환 바디춘향가〉·〈심청가〉·〈흥보가〉에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 상당 부분이 그대로 수용된 점으로 미루어, 그가 신재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오수암(吳壽巖, 1908-1945), 김봉학, 조몽실(曹夢實, 1900-1949), 정광수(丁珖秀, 1909-2003), 박록주(朴綠珠, 1909-1979) 등이 그의 제자이다.

48세(1902)에 협률사(協律社)의 주석으로 발탁되어 상경했다. 협률사는 고종 어극 40년 칭경예식(稱慶禮式)의 거행을 위해 봉상시 내에 설치된 기구이자 무대공간이었다. 그는 칭경예식이 끝난 이후에도 그곳에서 여러 공연을 주도했으며, 이때 의관(議官) 벼슬을 제수받았다. 협률사가 폐지되던 해인 53세에 고향 나주로 내려가 유성준(劉成俊, 1873-1944), 김채만(金采萬, 1865-1911), 박지홍(朴枝洪, 1889-1961), 김봉학 등 50여 명의 전라도 출신 명창들을 규합해 김창환협률사를 조직하고 지방을 순회했다. 54세에 원각사에서 공연한 창극 〈최병두타령〉에서 최병두 역을 맡았는데, 당시 김창환이 수십 대의 곤장을 맞고 죽어 나오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그의 목에 엽전꾸러미를 걸어주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의 나이 61세 때, 이동백(李東伯, 1866-1949)과 함께 경성구파배우조합의 창악 강사로 참여했으며, 미국 빅타레코드에서 〈춘향가〉와 〈흥보가〉의 토막소리를 녹음했다. 76세에 조선음률협회 회장직을 맡고, 78세에 조선악정회 설립에 참여하는 등 국악계 원로로서 여러 임무를 수행했다.

각종 명창대회와 경성방송국의 국악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특장 대목을 불렀으며, 단가 〈고고천변〉(Columbia 40148-A 短歌 皐皐天邊 金昌煥), 〈춘향가〉 중 '이별가' (Victor 42990-A·B 북 남자 젼라도·죠션어 춘향리별 가객 김창환 상편·하편), 〈흥보가〉 중 '중타령'(Regal C132-A·B 興甫傳 즁타령(上)·(下) 金昌煥)과 '제비노정기' (Victor 49060-A·B 興甫傳 江南行강남행(上)·(下) 獨唱金昌煥 長鼓韓成俊) 등 다수의 유성기 음반 음원도 남겼다.

조선창극사』 「김창환」 조에서는 김창환을 서편제 명창으로 분류했다. 흐느끼는 듯 애원처절하며 감상적인 계면조의 구사는 서편제 소리의 특징으로 주로 거론되는 것이다. 그러나 김창환은 우람하고 호방한 성음으로 계면조 선율도 마치 우조 악상처럼 불러, 청승맞은 느낌이 없도록 했다. 조상선(趙相鮮, 1909-?)이 정광수에게 "소리를 무섭게 헐라면 김의관(김창환)같이 하고 소리로 맛있게 헐라면 송감찰(송만갑(宋萬甲, 1865-1939))이 허고 소리를 두텁고 웅장하게 헐라면 이동백씨같이 허라"라고 했다는 말에서도, 김창환이 우조 위주의 창법을 구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그는 풍채가 좋고 발림을 잘해 관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김창환의 제자였던 박록주, 정광수 등 여러 명창들도 그의 발림에 대해 "많이 꾸미지 않아도 신명이 나며, 익살스러우면서도 되바라지지 않고, 가벼운 몸짓에도 무거운 맛이 있고, 손 하나를 들어도 깊은 맛이 있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흥보가〉를 장기로 삼았으며, 그 중 "저 제비 거동 보소. 제비왕께 하직하고 허공 중천 높이 떠서 박씨를 입에 물고···"로 시작되는 '제비노정기'가 그의 더늠이다. 김창환이 새로 짠 '제비노정기'는 동편제 명창들도 따로 배워 자신의 바디에 넣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참고문헌

  • 김석배, 「판소리 명창 김창환의 예술활동」, 『판소리연구』 20, 판소리학회, 2005.
  • 이보형·성현경·전경욱·김기형·백현미, 「판소리 인간문화재 증언 자료 : 판소리 명창 정광수」, 『판소리연구』 2, 판소리학회, 1991.
  • 정노식, 『조선창극사』, 조선일보 출판부,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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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환 출처: 한겨레음악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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