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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환 2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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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환

김창환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과를 졸업한 뒤, 한문 공부에 뜻을 두고 한국고전번역원의 국역연수원에 입학하여 유가 경전을 위시한 한문의 기본을 공부하였다. 연수원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대학원 중어중문학과에 진학하여 중국고전문학으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중국어교사 특별양성과정에서 초빙교수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중국어문학연구소에서 책임연구원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역서로는 『장자』 내편ㆍ외편(2010), 『유원총보』 역주(2009), 『도연명의 사상과 문학』(2009), 『중국어 유래어휘사전』(2006)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孟子의 擴充 論理」, 「陶詩의 『莊子』 思想 受用樣相」, 「『五經算術』 初探」, 「『論語』를 통해 살핀 孔子의 敎授法」 등이 있다.

  • [작가 소개] 동한(東漢) 말 낭야군(琅邪郡) 양도현(陽都縣) 출신으로 촉(蜀)의 승상(丞相)을 지냈다. 자는 공명(孔明)이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일찍이 형주(荊州)의 융중(隆中)에서 난리를 피해 있을 때 ‘와룡(臥龍)’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유비(劉備)를 도와 삼국(三國) 정립(鼎立)을 이루었고, 유비가 죽자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좌하면서 여러 차례 위(魏)를 공격하였다. 위장(魏將) 사마의(司馬懿)와 대치하다가 오장원(五丈原)의 군중(軍中)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작품 설명] 제갈량이 촉한(蜀漢) 건흥(建興) 5년(227년)에 위(魏)를 정벌하려고 출병하면서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올린 글이다. 이 글은 ≪삼국지(三國志) · 촉지(蜀志) · 제갈량전(諸葛亮傳)≫에 보이는데, 편명이 없던 것을 소통(蕭統)이 ≪문선(文選)≫을 편찬하면서 붙인 것이다. <출사표(出師表)>는 원래 전후 양편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전출사표(前出師表)>를 가리킨다. 문장이

  • [작가 소개] 당(唐) 초기의 문인으로 자는 자안(子安)이다. ≪문중자(文中子)≫를 지은 왕통(王通)의 손자로, 6세 때 이미 문장을 잘 지었고 17세에 유소과(幽素科)에 급제하였으나 자신의 재능을 믿고 오만하여 사람들의 질시를 받았다. 뒤에 관노(官奴)를 죽인 죄로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이 일로 교지(交趾)의 현령(縣令)으로 좌천되어 있던 아버지 복치(福畤)를 만나러갔다가 돌아오던 중에 배에서 떨어져 죽었다. 시명(詩名)이 있어 양형(楊炯), 노조린(盧照鄰), 낙빈왕(駱賓王) 등과 함께 ‘초당사걸(初唐四傑)’로 불린다. [작품 설명] 왕발(王勃)이 교지(交趾)로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홍주목(洪州牧)으로 있는 염백서(閻伯嶼)가 등왕각(滕王閣)을 중수(重修)하고 베푸는 연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때 염백서가 손님들에게 누대의 서문을 쓸 것을 청하자 왕발이 나서서 지은 글이다. <북산이문(北山移文)>과 함께 병려문(騈儷文) 가운데 대표적인 명문으로 꼽힌다. [작품 내

  • [작가 소개] 동진(東晉) 낭야(琅邪) 출신으로 서법가(書法家)이자 문인이다. 자는 일소(逸少)이고 우군장군(右軍將軍)을 역임하여 ‘왕우군(王右軍)’으로 불린다. 서법(書法)에 뛰어났는데 처음에 서진(西晉)의 위부인(衛夫人)에게서 배웠고, 뒤에 한(漢), 위(魏)의 비문(碑文)을 연구하여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서성(書聖)의 칭호를 얻었다. [작품 설명] 왕희지(王羲之)가 회계내사(會稽內史)로 재직 중이던 353년 늦봄에, 회계의 난정(蘭亭)에서 열린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때 모인 사안(謝安), 손작(孫綽) 등 41명의 명사들이 시를 썼는데, 그것을 편집한 시집(詩集)의 서문으로 쓴 것이다. 당시에 도가(道家)의 현허(玄虛)를 추구하던 풍조를 반대한 내용과 서경(敍景)과 서정(抒情)에서 뛰어난 점에서 그 독창성을 인정받고 있다. [작품 내용] 永和九年歲在癸丑暮春之初에 會於會稽山陰之蘭亭하여 修禊事也한대 群賢이 畢至

  • [작가 소개] 북송(北宋)의 유학자(儒學者)로, 원명(原名)은 돈실(敦實)이고 자는 무숙(茂叔)이며 호는 염계(濂溪)이다. 도주(道州) 출신으로 여러 지방관을 거치면서 치적을 남겼다. 만년에는 여산(廬山) 기슭의 염계서당(濂溪書堂)에서 은거하였다.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지어 도학(道學), 즉 성리학의 이론을 마련하였다. 남송의 주희(朱熹)가 그를 도학(道學)의 개조라고 칭하였다. [작품 설명] 연(蓮)을 좋아하는 작가의 고아한 인품이 드러나 있는 글이다. 국화로 은일(隱逸)을, 연꽃으로 군자(君子)를, 모란으로 부귀(富貴)를 특징지으면서 자신은 연꽃을 사랑한다고 하였다. 군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특성을 지니고 있는 연꽃을 사랑한다는 내용이다. [작품 내용] 水陸草木之花에 可愛者가 甚蕃하나 晉陶淵明은 獨愛菊하고 自李唐來로 世人이 甚愛牡丹이라. 予獨愛蓮之出於泥而不染하고 濯淸漣而不夭하며 中通外直하고 不蔓不枝하며 香遠益淸하고 亭亭淨植하여 可遠觀而不可褻翫焉하노라. 물과...

  • [작가 소개]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으로, 이름은 평(平)이고 자가 원(原)이다. 초(楚)나라 회왕(懷王) 시기에 좌도(左徒), 삼려대부(三閭大夫) 등을 역임하면서 제(齊)나라와 연합하여 진(秦)나라에 대항할 것을 주장하였다. 경양왕(頃襄王) 시기에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쫓겨났는데, <어부사(漁父詞)>는 이때에 지은 글이다. 이외에도 <이소(離騷)>, <구장(九章)> 등의 초사(楚辭) 작품이 있다. [작품 설명] 굴원이 조정에서 쫓겨난 뒤 강가에서 어부(漁父)를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의지를 밝힌 내용이다. 도를 지닌 채 은둔해 살고 있는 어부는 굴원에게 세상의 변화에 따라 더불어 살 것을 권하였다. 이에 굴원은 자신의 고결함을 더럽힐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결국 장사(長沙)의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죽었다. [작품 내용] 屈原旣放에 游於江潭하고 行吟澤畔할새 顔色이 憔悴하고 形容이 枯槁라. 漁父見而問之曰, 子非三閭大夫與아. 何故至於斯

  • [작가 소개] 당대(唐代) 시인으로 자는 태백(太白)이고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竝稱)되듯이 중국 최고의 시인 가운데 하나이다. 자유분방하고 호방(豪放)한 기질로, 항상 산수(山水)를 방랑하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였다. 그는 시를 통하여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기도 하고 아름다운 산수나 나그네의 시름을 읊기도 하면서, 호방하고도 청신한 풍격의 시를 많이 남겼다. [작품 설명] 이백(李白)이 봄날 밤에 연회를 열고 친척,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시를 쓴 내막을 서술한 글이다. 아름다운 경치, 운치 있는 대화,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정경 등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인생무상을 드러낸 부분도 있지만 자연(自然)을 좋아하고 일상을 즐기는 여유도 살필 수 있다. 제목과의 적절한 호응, 조리 있는 내용전개 등에서도 뛰어난 문장이다. [작품 내용] 夫天地者는 萬物之逆旅요 光陰者는 百代之過客이라. 而浮生若夢하니 爲歡幾何리오. 古人이

  • [작가 소개] 북송(北宋)의 정치가이자 문인으로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東坡),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중서사인(中書舍人), 예부상서(禮部尙書) 등을 역임하였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러 차례 좌천되어 밀주(密州), 서주(徐州), 호주(湖州) 등지의 지방관으로 전전하였고, 황주(黃州), 해남도(海南島) 등으로 유배되었다. 해남도에서 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사면되어 돌아오던 중 상주(常州)에서 병사하였다. 시문(詩文)뿐 아니라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작품 설명] 소식(蘇軾)이 호북성(湖北省) 황주(黃州)에 유배되어 있던 47살 때에 지은 글로, 황주에 있는 적벽(赤壁)에서 손님들과 뱃놀이를 하면서 느낀 감회를 서술하였다. 작자가 유배 중에 실의해 있으면서, 세속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장자적(莊子的) 초월(超越)을 추구하고자 하는 표일(飄逸)한 심경을 드러낸 내용이다. [작품 내용] 壬戌之秋七月旣望에 蘇子與客으로 泛舟遊於赤壁之下할새 淸風은 徐來하고 水波

  • [작가 소개] 서한(西漢) 문제(文帝) 시기의 문인이자 사상가로 낙양(洛陽) 출신이다. 20여 세에 문제(文帝)의 신임을 받아 박사(博士)가 되었다.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어 정치 개혁을 주장하다가 권신(權臣)인 주발(周勃) 등의 미움을 받아 장사왕(長沙王)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 이 때의 심경을 쓴 글로 <복조부(鵩鳥賦)>, <조굴원부(吊屈原賦)> 등이 있다.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고 저서에 ≪신서(新書)≫ 10권이 있다. [작품 설명] 진(秦)나라가 망한 원인을 밝혀 서한(西漢) 문제(文帝)에게 정치상의 교훈으로 삼게 하고자 한 글이다. 진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것은 관중(關中)을 점거한 데에 있었고 천하를 잃은 것은 관중(關中)을 믿었던 것과 인의(仁義)의 정치를 베풀지 않은 데에 있음을 논하였다. 이 글은 ‘사론(史論)’이라는 새로운 체제를 창시한 것으로 노신(魯迅)이 ‘서한의 위대한 글(西漢鴻文)’이라고 평하였듯이, 이후의 산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상(上

  • [작가 소개] 동진(東晉) 시대 심양(潯陽) 채상(柴桑) 출신으로 자는 원량(元亮)이다. 유송(劉宋)으로 왕조가 바뀐 뒤에 이름을 잠(潛)으로 고쳤고 스스로 호를 지어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고 하였다. 젊은 시절에 몇 차례 군부의 말직을 역임하다가 41세에 팽택(彭澤)의 현령(縣令)을 마지막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의 전원으로 돌아왔다. 그는 전원생활을 바탕으로 평담하면서도 뜻이 깊은 시를 지어 전원시(田園詩)의 창시자가 되었다. [작품 설명] 이 글은 왕조 교체기의 문란하고 암담한 시대를 살았던 도연명이, 현실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이상세계에 대한 동경을 형상화하여 그려낸 이상향이다.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가 추구한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이상 세계를 바탕으로 하고 오랜 농촌 생활 가운데에서 얻은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살려서 그려낸 도화원(桃花源)은 이후 동양적 유토피아의 전형(典型)이 되었다. [작품 내용] 晉太元中에 武陵人이 捕魚爲業하더니 緣溪行이라가 忘路之遠近이

  • [작가 소개] 북송(北宋)의 정치가이자 학자로 자가 희문(希文)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추밀부사(樞密副使),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하면서 교육(敎育), 군사(軍事), 과거(科擧) 제도 등의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반대파의 중상(中傷)으로 쫓겨났다. 여러 주(州)의 지방관(地方官)을 전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작품 설명] 악양루(岳陽樓)는 악주(岳州) 파릉현(巴陵縣) 성문의 서쪽 누대로, 동정호(洞庭湖)를 굽어보고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 범중엄이 등주(鄧州)를 다스릴 때, 친구인 등종량(滕宗諒)이 좌천되어 악주(岳州)를 다스리고 있었다. 이 때 악양루를 중수(重修)하고 기문(記文)을 부탁하자, 친구를 위로하는 내용을 담아 써준 글이다. 말미의 “천하 사람들의 근심에 앞서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의 즐거움에 뒤미처 즐긴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라는 구절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명구이다. [작품 내용] 慶曆四年春에 滕子京이

  • [작가 소개]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 상채(上蔡) 출신으로 순자(荀子)에게서 배웠다. 진(秦)나라에서 승상(丞相) 여불위(呂不韋)의 사인(舍人)이 되었다가 객경(客卿)으로 발탁되었다. 진시황을 도와 군현제(郡縣制)를 확립하고 소전(小篆)으로 문자를 통일하였으며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게 하였다. 진시황이 죽은 후 환관 조고(趙高)의 참소(譖訴)로 투옥되어 함양(咸陽)에서 처형되었다. [작품 설명] 이사(李斯)가 객경(客卿)으로 있을 때 진(秦)나라 조정에서 다른 나라 출신의 유세객들을 추방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글로 ≪사기(史記) · 이사열전(李斯列傳)≫에 보인다. 진시황(秦始皇)은 결국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축객령(逐客令)을 취소하였다. 유협(劉勰)은 ≪문심조룡(文心雕龍) · 논설(論說)≫에서 “이것은 상소문 가운데 훌륭한 글이다.(此上書之善說也.)”라고 평하였다. [작품 내용] 臣聞吏議逐客이라하니 竊以爲過矣라하노이다. 昔者에 繆公은

  • [작가 소개] 동진(東晉) 시대 심양(潯陽) 채상(柴桑) 출신으로 자는 원량(元亮)이다. 유송(劉宋)으로 왕조가 바뀐 뒤에 이름을 잠(潛)으로 고쳤고 스스로 호를 지어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고 하였다. 젊은 시절에 몇 차례 군부의 말직을 역임하다가 41세에 팽택(彭澤)의 현령(縣令)을 마지막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의 전원으로 돌아왔다. 그는 전원생활을 바탕으로 평담하면서도 뜻이 깊은 시를 지어 전원시(田園詩)의 창시자가 되었다. [작품 설명] 도연명(陶淵明)이 관직을 떠나 전원으로 돌아온 뒤에, 돌아오게 된 배경과 당시의 심경, 깨달음과 앞으로의 각오 등을 서술한 글로, 혼란한 시대에 자신의 인격을 고상하게 했던 도연명의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송대(宋代) 구양수(歐陽修)는 이 글에 대하여, “서진(西晉)과 동진(東晉)에는 문장이 없는데, 다행히 이 한 편이 있을 뿐이다.(兩晉無文章, 幸獨有此篇耳.)”라고 극찬하였다. [작품 내용] 歸去來兮여. 田園將蕪하니 胡不歸리오. 旣

  • [작가 소개] 북송(北宋)의 정치가이자 문인으로 자는 영숙(永叔)이고 호는 취옹(醉翁), 육일거사(六一居士)이다. 어려서 집이 가난하여 갈대를 가지고 땅에 글씨 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1057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증공(曾鞏), 소식(蘇軾), 소철(蘇轍) 등을 발탁하였으며, 추밀부사(樞密副使),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하였다. 시문(詩文)뿐 아니라 사학(史學)에도 뛰어나 ≪신당서(新唐書)≫를 편수하고 ≪신오대사(新五代史)≫를 저술하였다. 최초의 시화집인 ≪육일시화(六一詩話)≫를 남겼다. [작품 설명] 가을 소리를 듣고 가을에 관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어서 인생을 돌아본 내용이다. 가을 소리는 작가 자신의 심경을 비유한 것으로, 자연의 변화에 따라 사람도 변해가는 것이니 두려워할 것이 없음을 들어 은연중에 순응자연(順應自然)의 이치를 드러내고 있다. 이전의 부(賦)가 대구(對句), 압운(押韻), 전고(典故) 등을 많이 구사한 것과 달리, 산문체의 ‘문부(文賦)’라

  • [작가 소개] 당대(唐代)의 문장가로 자는 퇴지(退之)이다. 감찰어사(監察御史), 국자박사(國子博士), 경조윤(京兆尹), 어사대부(御史大夫) 등을 역임하였다. 송대(宋代)에 창려백(昌黎伯)에 추봉(追封)되어 한창려(韓昌黎)라고 불린다.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육조(六朝) 이래의 수식을 위주로 하던 병려문(騈儷文)을 반대하고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전개함으로써 산문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여,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으뜸으로 칭해진다. [작품 설명] 스승을 따라 학문을 닦아야 할 당위성을 역설한 글이다. 먼저 스승의 정의를 제시하고 다음으로 스승의 필요성, 스승 삼는 방법 등을 개진한 뒤에, 당시에 남을 따라 배우기를 꺼리는 잘못된 풍조를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세태에도 불구하고 이반(李蟠)이 자신에게 가르침을 청한 것을 기회로 이 글을 지어서 주게 되었다고 그 배경을 밝히고 있다. [작품 내용] 古之學者는 必有師하니 師者는 所以傳道授業解惑也라. 人非生而知之者면 孰能無惑이

  • [작가 소개] 당대(唐代)의 문장가로 자는 퇴지(退之)이다. 감찰어사(監察御史), 국자박사(國子博士), 경조윤(京兆尹), 어사대부(御史大夫) 등을 역임하였다. 송대(宋代)에 창려백(昌黎伯)에 추봉(追封)되어 한창려(韓昌黎)라고 불린다.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육조(六朝) 이래의 수식을 위주로 하던 변려문(騈儷文)을 반대하고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전개함으로써 산문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여,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으뜸으로 칭해진다. [작품 설명] 이 글은 한유(韓愈)가 제창한 고문운동(古文運動)의 정수(精髓)를 담고 있다. 고문운동(古文運動)은 사상적으로 유가를 존중하고 도교(道敎)와 불교(佛敎)를 배격하는 것으로, 특히 요(堯), 순(舜)에서 공(孔), 맹(孟)으로 전해 내려오던 유학의 전승을 밝혔다. 이것이 유가의 도통론(道統論)으로 송대 성리학(性理學)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작품 내용] 博愛之謂仁이요 行而宜之之謂義요 由是而之焉之謂道요 足乎己하여 無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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