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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un 23. 2017

박열

왜 ‘아나키즘’인가

‘또, 일제 강점기 이야기야?’ 이준익 감독의 신작 소식은 놀라웠다. 아직 남은 이야기가 더 있는 것인지, <동주>의 흥행 영향이 이어진 것인지 궁금했다. 그 해답을 찾으려고 스크린 앞에 앉은 나에게 <박열>이 말한 대답은 ‘아나키즘’이었다. <박열>은 일제 강점기라는 폭력적인 사회를 배경으로 개인의 자유를 부르짖고 사회의 연대를 강조하는 아나키스트의 젊음과 사랑을 유쾌하게 그려냈다. 작품 속 아나키스트의 삶은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존중이 있고 의리가 있고 열정이 가득해서. 독립투사의 삶에서 고통을 읽기보다는 동경의 감정을 더 느꼈다. 새로운 경험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미치면서 이준익 감독이 지금 ‘아나키즘’을 들고 나온 이유를 깨달았다.

     

‘아나키즘’은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에 비판적이며 구성원 개개인이 동등한 공동체의 연대성을 추구하는 사상이다. ‘아나키즘’이라는 용어는 ‘권위가 없는’, ‘통치자가 없는’이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아나키(An-archy)’라는 표현에서 파생되었다. 용어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아나키스트들은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권위 등 모든 권위들에 대해서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한다. 아나키스트들은 독선과 권위를 배제하고, 또한 완벽한 이론을 거부하면서 자유와 개인적 판단의 우위를 강조한다. 이러한 이유로 아나키즘은 자칫 ‘혼란’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이 목표하는 사회는 무조직·무질서의 사회라기보다는 비강제적, 비권위적인 사회이다.

    

최근 아나키즘은 새로운 이념적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억압, 환경 및 생태파괴, 여성과 인종문제 등의 사회적 모순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강제적인 제도와 규범으로 개인을 구속하는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아나키즘으로 극복하려는 것이다.

     

좀 더 범위를 좁혀 보자. 최근의 우리 사회는 무능한 권력이 개인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문제 상황을 직면했다. 권력은 수많은 문제를 양산했고, 위기가 닥치면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진실을 덮고 공작을 폈다. 자유를 억압받는 개인들의 피로감은 커져 가고, 자기 일상에만 몰입하게 된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술을 마시며 혼자만이라도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이런 우리에게 <박열> 속 인물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열(이제훈 분)은 개인의 의지가 적극적으로 발현되어 굳건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양상을 보여 준다. 그리고 가네코(최희서 분)는 박열과 상호 결합하여 공동체로서 개인의 가치와 독립을 실현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이 두 인물의 삶과 사랑은 개인적 아나키즘과 사회적 아나키즘의 조화를 보이면서 이상적인 아나키즘을 구현한다.

     

아나키스트 박열은 ‘돌아이’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는 개인의 완전한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 일체의 당위와 가치를 부정하고 오직 자신의 이해에 의해서만 행동한다. 그리고 서로의 안전과 상호 부조를 위해 이웃과 결성한 자발적 연합이 정부 조직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뜻이 맞는 동지들과 함께 단체를 결성하여 위험한 투쟁을 계속한다. 그렇게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그는 일본인들의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여 민중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였다.

    

개새끼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그가 남긴 시를 보면, 억압받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인식과 권력에 대한 저항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 개새끼라는 말처럼 하찮은 조선인이었지만, 그는 ‘짖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끝까지 일제의 권력에 굴하지 않고 맞선다. 일제의 공작에 의해 ‘대역죄인’의 누명을 썼지만, 그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죄를 모두 인정하고 재판장에 서기를 원한다. 재판장에 서서 일본 황실의 허위와 일본 권력부의 죄악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그 결과는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나키스트 박열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개인의 의지에 따라 죽음을 선택했으므로 죽음은 자유를 실현하는 가장 적극적인 행위였던 것이다. 이처럼 박열은 허황된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현실주의자였다. 누구보다 완전한 자유를 원하지만, 자유를 얻기 위한 일에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꺼리는 우리들. 박열의 삶은 그런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가네코는 박열의 사상적 동지이자 연인이다. 그녀는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읽고, 박열에게 반한다. 서구의 근대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여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는 일에만 혈안이 된 일본 사회에 염증을 느낀 가네코에게 박열은 희망의 길을 제시하는 존재였다. 가네코는 박열과 함께 모든 개인이 해방되는 세상으로 향한 길을 걸어가려 한 것이다. 그래서 박열과 가네코의 사랑은 동지애의 확장으로 읽힌다. 가네코가 벽에 붙여 둔 동거 서약에서 그들의 사랑이 정신적인 영역에 속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우린 동지로서 동거한다.
둘째, 운동 활동에서는 ‘가네코 후미코’가 여성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셋째, 한쪽의 사상이 타락해서 권력자와 손잡는 일이 생길 경우 공동생활을 그만둔다.

     

동거 서약에서 알 수 있듯이 가네코는 여성으로서 사랑을 받는 것보다 동지로서 결속되기를 바란다. 그녀는 박열이 일제에 저항하여 죽음의 길을 향해 갈 때도 끝까지 곁을 지킨다. 그 과정에서 박열과 가네코는 서로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여 각자가 자신의 삶을 선택하게 한다. 서로를 속박하지 않아도 지속되는 사랑. 그들의 사랑을 보면서 연인 관계에서도 서로의 이익을 따지고 사랑이라는 이유로 연인을 자신의 세계 속에 가두어 두는 세속의 사랑이 부끄러워졌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아나키즘을 배타적인 개인주의나 이기주의로 보는 경향도 있는데, 박열과 가네코의 사랑은 그런 견해에 항변한다. 인간은 서로 어울려 결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능력의 결속 위에 마련된 공동체 내에서 개인의 가치와 독립이라는 아나키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바야흐로 불평등과 정의, 상식이 최대 화두가 된 시대이다. 우리는 그러한 문제들을 낳은 권력에 ‘촛불의 힘’으로 맞서 싸운 경험이 있다. 사회적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개인들은 적극적으로 행동했고, 개인들이 연대하여 거대한 에너지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맛 본 승리. 그 이후,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다. <박열>은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고 우리의 삶을, 이 사회를, 이 나라를 좀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개인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길 권한다. 그리고 함께 어깨를 걸고 더 큰 소리를 내라고 웅변한다. 사그라지는 촛불을 다시 태워 보자는 외침. <박열>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그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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