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대전동(大傳洞)' 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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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행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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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행경 사회부 차장

[서울경제] 싱글 대디로 아들 둘을 키운 선배가 있다. 아들들은 같은 외국어고를 졸업한 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미국 유수의 의대와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했다. 술자리에서 자식 농사를 잘 지은 노하우를 묻자 선배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이들이 어렸을 때 ‘대전동(大傳洞)’으로 이사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동은 행정구역상 지명이 아니다. 알 만한 사람은 알 것이다. 맞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전세를 살았다는 얘기다. 다른 지인도 대전동에서 키운 두 딸을 ‘SKY’ 대학에 보냈다. 딸들은 서울 강남에서 명문대에 가장 많이 진학시킨다는 일반계 사립여고를 다녔다. 둘째 딸이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지인은 미련없이 전세금을 빼 경기도로 이사했다. 다들 부러워했다.

숙명여고 시험지 유출 의혹 수사가 막바지다. 전 교무부장 아버지에 이어 쌍둥이 딸도 피의자로 입건돼 조사를 받고 있다. 디지털 분석 과정에서 시험문제가 유출된 정황이 포착됐다고 한다. 물론 부녀는 혐의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예단은 금물이지만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후폭풍이 클 것이다. 세 부녀가 업무방해죄로 처벌받고 딸들은 퇴학 조치를 당할 수도 있다. 딸들의 내신성적을 끌어올려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은 아버지의 그릇된 부정(父情)을 거부하지 못하고 부정(不正)한 행위를 저질렀다면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공정(公正)’의 가치가 어느 때보다 중시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벌어진 일이니 더욱 그러하다.

부녀의 일탈·부정 행위를 단죄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교사 부모와 자녀가 같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도록 하는 상피제 도입도 이번 사건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이미 공교육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고 내신성적으로 아이들을 줄 세우며 각종 수상 성적과 자기소개서 따위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학생부종합전형은 비판을 넘어 분노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내신을 볼모로 아이들을 입시지옥에 몰아넣는 대입 제도를 선진적으로 바꾸고 공교육을 정상화하지 않고서는 시험지 유출 사고 같은 일은 반복될 것이다. 어찌 보면 쌍둥이 딸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적지상주의와 학벌 사회의 피해자다. 개성과 실력으로 똘똘 뭉친 방탄소년단(BTS)이 전 세계를 누비고 고졸 출신 크리에이터가 1인 방송으로 수십억 원을 버는 세상에서 언제까지 우리 아이들을 성적의 노예로 키워야 하는지 진지하게 성찰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할 때다.

아들이 과학영재고 진학에 실패한 지인이 이달 말 대치동으로 이사한다. 경기도에 자가가 있지만 강남 아파트를 사기에는 부족해 전세를 산다고 한다. 대전동 주민이 되는 셈이다. 강남 8학군의 명문고에 진학해 대치동 학원가에서 열심히 실력을 갈고닦으면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성공한 그 루트다. 입시 제도가 바뀌어도 ‘강남 불패’가 깨지지 않는 현실에서는 이미 나 있는 길을 걷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일 터이니. 마음으로는 응원하지만 씁쓸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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