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end Interview] 한국의 제빵왕 김영모 김영모과자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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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09.07. 오후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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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성공한 제빵의 전설…그러나 내 인생여정은 `눈물젖은 빵`
"요새 청년들 창의력 뛰어나…작은 빵집 전성시대 올듯"


김영모 김영모과자점 대표가 도곡타워팰리스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빵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김호영 기자]
서울의 대표적인 고급 주상복합아파트인 타워팰리스가 위치한 도곡동. 으리으리한 주상복합아파트 사이 한 건물 1층에 위치한 '김영모과자점'을 찾았다. 겉모습은 여느 동네 빵집과 다를 바 없었다. 동네 단골 손님들 한 명 한 명과 인사하며 안부를 묻는 김영모 대표도 인심 좋은 동네 빵집 사장님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한국 제빵 역사에서 김영모 대표는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는 제빵인으로 노동부가 선정한 기능한국인 제과1호이며, 제빵 분야 명장6호다. 최고의 명장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기능인을 넘어 그는 가장 성공한 동네 빵집 경영자이기도 하다. 1982년 서초동에 문을 연 '김영모과자점'을 서초 주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빵집으로 만들었고, 2000년에 문을 연 도곡점은 프랜차이즈 빵집들을 물리치고 까다로운 강남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현재 김영모과자점은 7개 매장을 직영으로 운영하며 연간 매출은 약 150억원에 달한다. 7개 중 6개가 서울 강남 지역에, 1개는 수원 롯데백화점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윈도베이커리(제조·판매를 동시에 하는 동네 빵집)들에 필수 제품이 된 '천연 발효 빵'이나 '유기농 밀가루'도 김영모 대표가 먼저 시작했다.

하지만 이 같은 성공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눈물 젖은 빵'이라는 다소 식상한 단어 외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버려지고, 고모와 작은어머니 손에 키워졌던 그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서야 친모를 만났다. 하지만 이미 형을 데리고 재가한 어머니는 그를 받아줄 수 없었다. 어머니와 친형, 새아버지가 사는 집이 보이는 빵집에서 고되게 일하면서 김영모 대표는 누구보다도 '성공'을 꿈꿨다. 기능인으로 사업가로 어느 정도의 꿈은 이뤘지만 이제 그의 꿈은 김영모 과자점을 일본의 오래된 가족기업처럼 대를 이어 유지되는 '천년기업'으로 만드는 것이다. 다음은 도곡동 김영모과자점에서 그와의 일문일답.

―빵과의 인연은 처음 어떻게 시작됐나.

▷고등학교 때 왜관에 살았는데 학교에 들어간 지 3개월 만에 뛰쳐나와 읍에 있던 맛나당이라는 빵집에서 일했다. 그러다 대구로 나가 빵집에 취업하게 됐다. 대구 금강당 제과점에서 본격적으로 빵과 과자 케이크 만드는 법을 배웠다. 지금은 모두 없어진 지 오래된 가게들이다.

―학교를 그만두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내 가정사가 복잡해 방황을 많이 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전남 해남이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다. 어머니는 형을 데리고 재가를 하셨고 나는 아버지가 데리고 있을 수 없어서 어려서부터 해남 작은아버지 집에 얹혀서 살았다. 초등학교 때까지 고모가 친엄마인 줄 알았고 나중에는 작은어머니가 엄마처럼 키워주셨다.

―그런데 왜 왜관으로 가게 됐나.

▷초등학교 5학년 때 작은아버지가 나를 다시 광주 아버지 집으로 보냈다. 하지만 새어머니 눈치를 보고 아버지에게 맞고 살다 보니 결국 해남으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왜 돌아왔느냐'며 작은아버지에게 혼나야 했다. 결국 작은어머니가 차표를 끊어줘 무작정 외할아버지가 계신 전남 화산면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친모를 처음으로 만난 것인가.

▷그렇다. 꿈에도 그리던 친모를 만났지만 같이 살 수 없었다. 어머니가 아이 하나를 데리고 재가했는데 숨겨둔 아들이 또 나타날 수는 없었다. 그때 나는 내가 나 혼자라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그리고 어떻게든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가 계신 왜관으로 갔다.

▷어머니가 살고 계신 왜관에 있는 이모 집에서 살면서 먼발치에서라도 어머니를 보고 싶었다. 그때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하지만 이모 집에서도 적응할 수 없었고 결국 빨리 돈부터 벌자는 생각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일자리를 찾았다. 그러다 일하게 된 곳이 어머니 집 바로 건너편에 있는 맛나당이었다. 일을 하다가 잠시 길에 나와 쉬고 있으면 어머니와 가족들이 재잘거리며 지나갔다. 그럴 때면 나는 얼른 몸을 숨겼다.

―대구에서 빵을 만들다가 왜 서울로 올라왔나.

▷대구 빵집에서 일하다가 결핵에 걸렸다. 당시 결핵은 죽을병이었다. 대구 빵집에서도 일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연락을 해서 내가 결핵에 걸렸다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어머니는 나를 치료차 구미의 영명사로 보내주셨다. 5개월 동안 절에서 지내면서 결핵이 완치됐지만 대구에서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 일자리를 찾았나.

▷영화배우 하명중 씨가 서소문에서 보물섬이라는 제과점을 했는데 그곳에서 일하다가 무교동 보리수과자점으로 옮겼다. 그러다 군대를 가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천연 발효 빵을 만든 김영모 김영모과자점 대표가 빵을 오븐에 넣기 전 칼집을 내고 있다. [김호영 기자]
―한창 일을 배울 때 군대에 가게 된 것 아닌가.

▷그렇다. 1974년에 군대에 갔는데 당시에는 3년씩 복무를 했다. 그런데 당시가 한국 제과가 급성장하던 시기여서 기술을 한창 배워 가야 하는 시점인데 군대에 들어와 뒤처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에서도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조약돌과 싸릿대를 가지고 연습했다.

―군대가 큰 손해를 끼친 건가.

▷아니다. 군대에서 닥치는 대로 읽었던 책이 큰 도움이 됐다. 3년 동안 200여 권의 책을 읽었다. 군대에서 담배도 끊었다. 그리고 국내 최고의 빵집에서 배워야겠다고 생각해 1977년 제대하고 나서 나폴레옹과자점에 들어갔다.

―나폴레옹과자점은 제과 사관학교로 불리는데.

▷나폴레옹에서 3년 일하다가 부공장장이 됐고, 그러다가 보리수과자점으로 다시 돌아가서 결혼도 했다.

―1982년 처음으로 창업했는데.

▷1982년 5월 김영모 과자점을 서초동에 처음으로 열었다. 서초동 무지개아파트 옆인데 지금은 재건축이 진행되고 있어서(서초그랑자이) 서초동성당 쪽으로 매장을 옮겼다. 당시만 해도 그곳은 막 개발되기 시작했던 지역이다. 지금 같은 부자 동네가 아니었다.

―강남이 발전할 것을 예측하고 간 것인가.

▷아니다. 친구 형이 하던 제과점을 인수하고 들어간 것이다. 문을 열 때부터 내가 도와줬는데 어느 날 '네가 해보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나는 제과기술자로 성장을 해야겠다는 꿈은 있었지만 사업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많은 고민 끝에 덜컥 가게를 열게 됐다.

―처음부터 잘되었나.

▷1982년 서초에 가게를 열었을 때 뉴욕제과가 근처에 있었다. 우리는 실면적 6평이었는데 그곳은 우리보다 2배는 더 컸다. 처음에는 정말 매일 잠을 2~3시간씩 자면서 빵을 구웠다. 밤 12시에 직접 빵을 배달해드리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인근 주민들에게 인정받게 됐고 매출도 빠르게 성장했다.

―성공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당시 나는 빵을 굽고 집사람이 빵을 팔았는데 틈만 나면 싸웠다. 나는 완벽하지 않은 빵을 버리려고 했고, 집사람은 그 정도는 팔아도 되지 않느냐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보로빵의 표면을 거북이 등처럼 일정하게 갈라지게 굽고, 표면이 균일하지 않은 것은 버리는데 지금도 이것이 우리의 트레이드마크다. 당시 집사람이 완벽하지 않은 빵을 몰래 팔았다가 내가 아예 매장 문을 닫아버린 적도 있다. 나중에는 팔지 않는 빵을 인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서초가 본점이지만 유명해진 것은 도곡동 타워팰리스점 때문이다.

▷이곳은 정확히는 2호점이 아니라 3호점이다. 1994년에 두 번째 매장인 도곡역삼럭키점을 열었다. 지금은 그 매장을 운영하던 막내 처제와 남편(동서)이 '한재용베이커리'라는 이름으로 운영하고 있다. 2000년에 도곡타워점을 열었는데 당시에는 타워팰리스가 없고 허허벌판이었다(타워팰리스 1차는 2002년 10월에 입주가 시작됐다). 그래서 걱정도 많이 했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 양재천 건너 개포동에서도 빵을 사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강남 고객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것이 어렵지 않나.

▷좋은 재료를 써서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고객에게 전달하는 것은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에서 또 중요한 것은 식품의 안전성이다. 과거 우리 슈크림빵을 먹고 고객이 식중독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원인을 밝히기 전에 무조건 사과부터 했다. 그 고객은 지금도 단골 손님이다. 또 한 가지, 우리는 빵의 발효법이 다르다. 천연 발효법을 일찍부터 도입했다.

―천연 발효 빵을 국내에 처음 도입한 것이 김 대표라는 것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90년대 초부터 천연 발효 빵에 관심이 있었다. 빵은 기원전 3000년경 바빌로니아인들이 밀을 자연 발효시켜 맥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이스트균이 발견돼 산업화가 되기 전에는 천연 발효로 빵을 구웠다. 하지만 발효 시간을 단축시키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빵은 1시간이면 구워낼 수 있는 간편 식품이 됐다. 나는 빵에게 다시 제 모습을 찾아주고 싶었다.

―천연 발효 빵은 어디서 배웠나.

▷1993년 프랑스에서 제과점 견학을 다니고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호텔 창문을 열었더니 굉장히 구수한 냄새가 났다. 알고 보니 과거 방식대로 이스트를 쓰지 않고 천연 효모로 빵을 만드는 곳이었다. 기술자를 만나고 싶다고 가게 사람들에게 사정을 했지만 만나주지 않았다. 당시에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거의 안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를 만나 천연 발효법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1995년에는 기회가 생겨서 독일 하노버대학 곡물과에 가 발효빵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 빵집의 기술을 그대로 배운 것인가.

▷아니다. 그 나라의 토양과 기후에 따라 천연균(발효종)의 발효 환경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프랑스나 독일에서 원종을 비행기로 공수해 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원종이 변종이 됐다. 부패했다는 뜻이다. 나중에는 이것이 유럽과 한국의 기후와 토양이 달라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에는 우리가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면 변종이 되지 않는다. 우리 기후에 맞기 때문이다. 1995년 처음으로 유산균 발효법을 개발했다. 그 이후로 건포도종 등 과일발효종도 개발했다.

―천연 발효 빵은 만드는 데 훨씬 손이 많이 든다.

▷처음에는 발효종을 매일매일 손으로 만들었는데 양산하려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4000만원짜리 기계를 가져와서 쓰고 있다. 적정한 온도를 유지해주고 오래되면 밀가루를 섞는 것을 자동으로 해준다.

―처음 내놓은 천연 발효 빵에 대한 고객들 평가는 어땠나.

▷당시 동네 어르신들이 찾아와 등을 두드리면서 좋은 빵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얘기했다. '생목'(식후 음식물이나 위액이 다시 올라오는 현상)이 없어졌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소화가 잘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빵을 오래 먹지 않았기 때문에 밀을 잘 소화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천연 발효 빵은 그런 증상이 없어진다. 그런 어르신들은 이사를 가더라도 주기적으로 찾아와 우리 빵을 잔뜩 사 가서 드셨다.

―우리가 먹던 이스트가 나쁜 것인가.

▷사람들은 이스트를 화학 성분으로 아는데 그냥 미생물이다. 응고를 시켜서 미생물을 오래 보존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여러 효모 중 하나다. 다만 이스트는 어느 집에서든 획일적인 맛이 난다. 또한 빵을 어떻게 굽느냐에 따라 빵의 풍미가 달라지는데 이스트는 어느 제과점이나 똑같은 풍미를 낸다. 반면 자연 발효 빵은 자기만의 풍미를 갖고 있다. 과일종을 쓰면 은은하게 과일향이 나는 등 개성이 생긴다. 요즘은 '이스트를 쓰지 않는 천연 발효 빵'을 내세우면서 이스트가 마치 잘못된 것처럼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문제가 있다.

―김영모과자점은 '프랜차이즈 빵집'을 이긴 동네 빵집으로 유명하다.

▷2003년도부터 2008년까지 대한제과협회 회장을 지냈다. 초반에만 해도 프랜차이즈 빵집들이 이렇게 성장하지 않았다. 그 당시 동네 빵집 업주들을 만날 때마다 "여러분들 모두 프랜차이즈의 성장을 대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중에 굉장히 많은 피해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프랜차이즈가 급성장하면서 동네 빵집들이 많이 문을 닫게 됐다.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너무 장악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아마 파리바게뜨와 뚜레쥬르가 전체 베이커리 시장의 40%를 차지할 것 같은데 전 세계에서 이렇게 프랜차이즈 베이커리가 시장을 독차지하고 있는 곳은 우리나라밖에 없다. 프랜차이즈와 윈도베이커리가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지, 지금 모습은 전체 제과산업에도 좋지 않다. 다만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획일화된 제품에 대한 거부감이 점점 생겨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베이커리 시장도 (프랜차이즈 중심에서 벗어나) 반전이 있지 않을까.

―동네 빵집들에 조언하고 싶은 것이 있나.

▷제과협회장을 할 때가 프랜차이즈 빵집이 전국 구석구석으로 퍼지던 시기였다. 당시 지방 제과점에 가 보면 TV를 틀어놓고 손님이 들어오면 TV를 쳐다보면서 계산을 해주는 곳도 많았다. 그래서 동네 빵집이 달라져야 한다고 얘기를 많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윈도베이커리도 달라졌다. 젊은 친구들을 보면 옛날 동네 제과점을 벗어나 전문화해 가는 곳이 많다. 소수 제품에 특화해 전략적으로 빵을 만드는 것이다.

―제빵에 대한 인식도 많이 좋아진 것 같다.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환경이 너무 좋지 않았다. 그 당시만 해도 연탄으로 빵을 구웠다. 오븐 밑에다가 연탄으로 불을 때다 보니 공장이 전부 시커멨다. 겨울에도 바람이 들어오는 간이공장에서 일해 환경도 엉망이었다. 일은 아침부터 시작해 밤 12시까지 해야 했다. 그래서 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김영모과자점이 서울 3대 베이커리로 불리는 이유는.

▷자평을 해보면 규모는 작지만 제품이 좋고 서비스가 우수하다고 생각한다. 직원들을 교육시키고 좋은 평을 유지해 브랜드파워를 갖고 있다. 매우 부담스럽기도 하다. 지속적으로 유지해 가는 수성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아이들에게도 항상 얘기한다.

―세 자녀가 모두 함께 일하고 있다.

▷둘째 아들(김영훈)이 프랑스에서 15년 동안 빵을 공부해서 함께 일하고 있다. 얼마 전 프랑스 최고 자격증 예선전을 통과해 11월에 '프랑스 최고 장인(MOF·Meilleur ouvrier de France)' 시험에 도전한다. 통과하면 동양 최초다. 제빵은 아니고 제과와 아이스크림 아이스카빙 분야다.

첫째 아들(김재훈 부사장)은 영국에서 호텔경영을 전공하고 한국에서 경영을 맡고 있다. 막내딸은 디자인을 공부해서 역시 회사에서 마케팅을 하고 있다. 김영모과자점을 가족기업으로 성장시키려는 꿈이 있다. 그래서 항상 아이들에게 하는 얘기가 창업정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수성정신이며 그 정신 없이는 천년기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에는 천년기업이 있는데 우리도 그런 기업을 만들려면 가업을 이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 빵집 200여 개를 직접 돌아보고 '스위트로드'라는 책을 쓰고 나서 생각한 것이다.

―우리나라 가업 승계는 제도적 문제로 쉽지 않다.

▷가업 승계도 일본·독일처럼 변화가 와야 하는데 그 정도까지는 세금제도가 변하지 못하는 것 같다. 가업을 이어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돼야 한국 경제가 튼튼해지지 않을까.

―김영모과자점에서 처음 개발한 빵이 프랑스에서도 팔리고 있다고 들었다.

▷프랑스 국가장인(MOF)인 안젤로 무사가 한국에 왔을 때 우리 몽블랑을 보고 우리에게 제조법을 배웠다. 프랑스에서는 레 브리오슈 푀유테(Les Brioches Feuilletees)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 이것이 현지 신문에도 나오고 지금은 런던에서도 팔리고 있다. 몽블랑은 자메이카 럼을 이용해서 만든 시럽을 사용해 굉장히 풍미가 뛰어나다. 김영모과자점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제품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성공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성공했나.

▷시대적으로 상황은 다 다르다. 저희는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요즘 아이들은 풍족하면서도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좌절도 하고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면 꿈이 있으면 모든 걸 극복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한다. 지금까지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다. 매일 매를 안 맞으면 잠이 안 올 정도로 맞기도 했다. 아버지 집에서 뛰쳐나와 해남 작은어머니 집으로 갈 때까지 이틀 동안 밤낮을 걸어서 찾아갔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성공이라는 꿈을 가지게 됐다. 지금은 김영모과자점이 대를 물려서 살아남는 것을 성공이라고 본다면 내 시대에서는 꿈을 이뤘다.

―본인도 30대에 창업을 했는데 지금 많은 젊은이가 빵집을 창업하고 있다. 어떤 것이 달라졌나.

▷지금 젊은이들은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다. 하지만 창의성은 뛰어나다. 천연 발효 빵을 연구하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젊은이가 많은 것 같다.

―성공의 비결이 있다고 생각하나.

▷성공의 비결을 묻는 사람들이 실패를 어떻게 극복했느냐고 묻는다. 나는 실패를 생각하지 않는다. 실패는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에 그걸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젊은 친구들에게도 성공이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무엇을 하든지 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면 그것이 성공이라고 말한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김영모가 빵을 잘 못 만들면 성공할 수 있었겠나. 전문성을 기르라고 얘기한다.

―전문성 외에 청년들에게 하는 다른 조언이 있나.

▷두 번째로 책을 많이 읽으라고 조언한다. 책을 많이 읽고 간접 체험을 하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세 번째로 인격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리 좋은 기술자라도 인간관계에서 실패하면 성공이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좋은 관계를 항상 유지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얘기한다. 이 세 가지만은 잊지 말라고 한다.

―아내의 도움이 성공에 결정적이었다고 들었다.

▷빵집은 부인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아내가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우고 나서는 포장과 디스플레이를 전문적으로 배웠다. 아내는 배운 것을 바로 가게에 적용했다. 고객들은 일괄적인 프랜차이즈와는 또 다른 우리의 포장을 좋아했다. 내가 매년 해외 연수를 가 새로운 제과 기술을 배워올 동안 아내는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면서 포장과 인테리어 기술을 배웠다. 지금도 명절 때는 천으로 포장을 해서 택배로 고객들에게 보낸다.

―복잡한 가정사에도 불구하고 세 명의 아버지와 세 명의 어머니를 모두 챙겼다고 들었다.

▷사업이 제 궤도에 올라서자 친어머니 같은 작은어머니와 고모부터 찾았다. 나중에는 나를 버렸던 친아버지와 새어머니, 작은아버지 그리고 새아버지까지 모두 만나서 교류하고 챙겼다. 용돈도 드리고 정기적으로 찾아가 인사도 드렸다. 지금은 새어머니만 살아 계신데 여전히 자주 인사드리고 있다.

―그 사람들을 모두 용서하고 포용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신앙의 힘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신앙이 없었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먼저 다가가 팔을 벌리고 안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다시 만나면서 미안해했다. 그들을 용서하고 품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의 상처를 보듬어 안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내가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성공의 의미가 뭔지도 몰랐을 때부터 성공을 하고 싶었고 내 모든 흐트러진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

김영모 대표는…

195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왜관에서 성장했다. 10대 후반 대구 빵집에 취직하면서 빵과 인연을 맺었다. 1982년 서초동에 김영모과자점을 창업했다. 현재 서울 강남 6곳과 수원에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선정 기능한국인 제과1호다. 대한민국 명장회 회장, 대한제과협회 회장, 숙련기술인 단체총연합회 회장 등을 지냈다. 혜전대 제과제빵학과 명예교수다.

[이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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