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낯선 존재가 일으킨 파문이 그려내는 인간 욕망의 조감도
작열하는 태양 아래 거침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 이 모두를 굽어보는 때깔 좋은 별장의 잔잔한 풀장 수면 같은 부르주아 가정…… 소설 『U.V.』는 이처럼 완벽한 무대장치처럼 아름다운 휴양지 브레아 섬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틀간의 사건을 그린 범죄소설이다. 그러나 『U.V.』를 온전히 범죄소설이라고만 부를 수 없는 것은, 작가인 세르주 종쿠르의 말대로 “맨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야 총소리가 나는 범죄소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중심축을 이루는 것이 어떤 ‘사건’이 아닌, 사건이 벌어지기까지의 전조에 대한 정황 및 심리 묘사이기 때문이다. 한 낯선 존재에 의해 침범된 안온한 일상, 그리고 그 존재가 일으킨 파장이 동심원을 그리고 퍼져나가면서 각 인물들의 욕망에 닿아 그려내는 다채로운 무늬들을 감상하는 것이 이 소설의 관전 포인트인 것이다. 『U.V.』는 1998년 『보기Vu(‘보다(voir)’라는 동사의 과거분사형)』이라는 소설로 등단한 늦깎이 작가 세르주 종쿠르의 2003년 작으로, 그해 프랑스 텔레비지옹 소설상을 수상했다. 여러 모로 알랭 들롱 주연의 를 연상시키는 줄거리하며, 클로드 샤브롤과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상 같은 그로테스크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난 듯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그래서인가, 『U.V.』는 현재 프랑스의 신예 감독 질 파케 브르네에 의해 영화화되고 있다고 한다.
한순간의 폭발음에 모든 것을 함축해버리는 매우 간결하고도 강력한 결말
“애당초 제목을 ‘열기(熱氣)'라든가 ’삼복(三伏)] 정도로 할까 했죠…… 그러다가 ‘U.V.'라는 표현이 더없이 적절하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작품 속 주인공 보리스가 바로 자외선(Ultra-Violet)에 비견될 만한 인물이거든요. 처음에는 훈훈하고 다정다감하게 느껴지다가도, 어느새 활활 불타오르는 인물…… 우리 주변에는 종종 그와 같은 사람들이 있답니다.” 『르 마트리퀼 대상주』와의 인터뷰에서
상대방을 호릴 줄 아는 사교술, 깔끔하고도 재치 있는 언변, 아름답게 자신을 드러낼 줄 아는 우아함까지, 보리스는 돈 말고는 모든 것을 갖춘 인물이다. 그런 그가 부르주아 가정의 그림 같은 풍경 속으로 침입하여 능숙한 포즈로 그 안의 질서를 헤집어놓는다. 자신에게는 없어서 더더욱 아쉬운, 남의 입에 물려 있는 은수저를 우악스럽게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취하려는 욕망. 소설은 그 욕망을 향해 무섭도록 저돌적으로 달려가는 보리스와 그런 보리스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에 투사하여 바라보는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 수수께끼 같은 상황들을 던져놓고서 그 말미마다 마치 덫처럼, 지뢰처럼 섬뜩섬뜩하게 장치해놓은 파국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실력은 대단히 유혹적이다. 고전적일 정도로 매끄럽고 단정하게 전개되는 문장과 여기저기 깔아놓은 가짜 복선과 진짜 암시들이 충돌하여 빚어내는 팽팽한 긴장감, 그리고 인간 심리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은 세르주 종쿠르라는 작가가 탄탄한 기본기를 갖췄음을 짐작게 해준다.
단 이틀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브레아 섬의 한 별장이라는 협소한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을 미묘하게 운용해나가는 능력, 독자들의 무성한 예감을 따돌리며 어지러이 교차-선회하는 복선과 암시들, 그리고 그것들이 전개되는 양상을 따라가며 독자들이 겪어야 할 불안한 긴장감. 이 소설의 백미는 그 불안의 끄트머리에 불을 댕기듯, 한순간의 폭발음에 모든 것을 함축해버리는 매우 간결하고도 강력하기 그지없는 결말이다.
그런데 이 결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정통 범죄소설과는 달리, 『U.V.』는 사실관계에 대한 설명이나 범인을 지목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지 않는다. 보리스와 필립, 그리고 앙드레 피에르와 필립의 아버지인 ‘영감’까지, 이들의 관계를 의혹의 눈초리로 탐색하던 독자들은 소설의 결말을 읽은 후에도 한동안 석연찮은 기분에 휩싸일 것이다. 과연 보리스가 진짜 ‘협잡꾼’이었을까, 이 모든 것은 선병질적인 인물 앙드레 피에르의 피해망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필립과 보리스의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본 ‘영감’의 머릿속에서는 과연 무슨 생각이 떠돌고 있는 것일까? 어떤 결론을 내리든 그것은 독자의 선택이다. 그렇게 결론에 이르러 다시 이야기를 재구성해볼 수 있다는 점, ‘열려 있는’ 결말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다는 점, 이것이야말로 이 소설이 가진 매력이다. 군데군데 빛나는 블랙유머와 리드미컬하게 흘러가는 (그러나 슬그머니 뱀처럼 휘감아 들어오는) 문장은 보너스다. 소설을 번역한 시인 성귀수씨의 말대로, “결코 만만치 않은 ‘흑심(黑心)’”을 지닌 소설 『U.V.』는 지루한 여름의 끝자락을 산뜻하게 마감해줄 멋진 독서 경험을 선사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