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유신에 맞섰던 강직한 언론인… 땅 문제로 신군부에 발목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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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40) 천관우(1925~1991)


일러스트=이철원

1972년 10월 초 대학가에 손바닥만 한 전단이 나돌았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주최하는 대강연회가 10월 5일 저녁 5시 30분에 서울 시내 대성빌딩 대강당에서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그 강연회 개회사는 동아일보 천관우가 하고 인사 말씀은 한신대 김재준, 그리고 연사는 함석헌을 비롯하여 세 사람인데 그중에는 내 이름도 끼어 있었다. 천관우는 이 나라 민주주의가 호흡 곤란하던 그 답답하던 시절 우리 모두의 매우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1925년 충북 제천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 신동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 사실이 당시 동아일보에 기사화된 것을 나도 몇십 년 뒤에 읽어 본 적이 있다. 그는 청주고보를 졸업하고 일제 말기에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하였다. 해방이 되고 교명과 학제가 바뀌는 바람에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때 쓴 논문 제목이 '반계 유형원'이었다.

6·25가 터진 뒤 부산으로 피란 간 천관우는 '대한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워낙 글 솜씨가 뛰어나 서른이 되기 전에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발탁되었고 2년 뒤에는 조선일보 편집국장 자리에 올라 명실공히 이 나라의 저명한 기자가 된 것이었다. 1963년에는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겨 주필로 활약하다가 '신동아'에 실린 그의 글이 필화로 번져 한동안 자리에서 물러난 적도 있다.

그러다 3선 개헌을 계기로 박정희 독재가 표면화되자 언론인으로서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해 그는 민주화 운동의 일선에 나섰다. 함석헌이 창간한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장준하, 이태영, 계훈제, 법정 등과 더불어 자유 언론 수호에 앞장섰다. 그 잡지에 내가 '용감한 백성이라야 산다'는 제목의 글을 한 편 올렸는데 며칠 뒤에 만났을 때 그는 내 손을 잡고 "매우 무서운 글을 쓰셨습니다. 국민이 모두 안중근 같은 용감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하셨으니!" 하며 나를 두둔하였다. 군사정권은 드디어 발악하여 유신 체제를 선포하고, 언론을 탄압하였다기보다 봉쇄하기에 이르렀다. 말 한마디 잘못해도 글 한 줄 잘못 써도 남산 중앙정보부의 그 흉악한 지하실에 끌려가 곤욕을 치러야 했던 참담한 세월이었다.

은인자중하며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국사학자 천관우는 두문불출하며 본업인 한국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특히 고조선과 삼한 시대를 깊이 있게 연구하였고 가야사 발굴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그가 비록 동아일보를 물러났지만 해직당한 젊은 기자들에게는 '가장 존경받는 언론인'이었고 흠모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군부가 들어서 그를 국토통일원 고문으로 추대하고 평통자문위원회의 요직을 떠맡기자 젊은 기자들의 태도는 돌변하였다. 한겨레신문의 초대 사장이 된 송건호도 천관우가 변절했다고 공언하였고, 문화일보 사장 남시욱은 내가 은거하던 문경새재에 들렀을 때 "천 선배의 처신이 매우 유감스럽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천관우가 그런 비난을 받게 된 데는 말 못 할 사연이 있었다. 그는 동아일보를 물러날 때 받은 퇴직금을 가지고 서울 어디에 몇 평 안 되는 땅을 구입한 적이 있었는데, 소유권이 복잡하여 명의 변경이 불가능한 줄 모르고 샀기 때문에 팔 수 없는 땅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중앙정보부에서 사람이 찾아와 '그 땅을 천 선생님 명의로 꼭 바꿔 드리겠습니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말에 쉽게 넘어갈 천관우가 아니었다. "당신들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그 땅을 찾을 생각은 없어요"라고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끈질기게 졸랐다. 옆에서 한평생 그를 받들던 부인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한번 맡겨 보는 것이 어때요" 하며 허락할 것을 은근히 종용하면서 "우리는 앞으로 뭘 먹고 살 겁니까"라고 덧붙였다. 부인은 가난한 살림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약해진 천관우는 그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그자에게 한번 해보라고 승낙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에 그 사람은 천관우 명의로 된 완벽한 토지 문서를 만들어 그에게 바친 것이었다.

신문이나 잡지에 게재된 그의 글을 읽어 보면 그가 한때 신동이라고 불릴 만하였다고 느끼게 된다. 명문이고 논리가 정연할 뿐 아니라 은은한 여운도 남긴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역사학자로서 더 두드러졌다. 연세대 사학과 교수 홍이섭, 민영규, 손보기 등이 천관우를 연세대에 데려가려 합의를 보았지만 남산의 호랑이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젊은 기자들을 거느리고 편집국장으로, 주필로 일하면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야 하는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살림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의 건강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의사의 무서운 경고를 받았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그는 60대도 다 살지 못하고 그 고달픈 일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저서가 여러 권 있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사의 재발견'은 나의 애독서이다. 1974년 출간되자마자 안양 교도소에서 즐겁지 않은 나날을 보내던 나에게 곧 전달되었다. 이 책에는 '도서 열독 허가증(74년 10월 21일)'이 붙어 있고 나의 수인 번호 '95'와 내 이름 석 자가 적혀 있다. 그의 얌전한 교사 출신 부인과 예쁜 외동딸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궁금하지만 알아볼 생각도 못 하고 나는 나이만 먹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다.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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