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주문/바로드림/제휴사주문/업체배송건의 경우 1+1 증정상품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패키지
북카드
키워드 Pick
키워드 Pick 안내
관심 키워드를 주제로 다른 연관 도서를 다양하게 찾아 볼 수 있는 서비스로, 클릭 시 관심 키워드를 주제로 한 다양한 책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키워드는 최근 많이 찾는 순으로 정렬됩니다.
작가정보
글을 쓴 안치운은 연극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현재 호서대학교 연극 전공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1957년에 태어났으며 중앙대학교 연극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소르본 누벨 대학에서 연극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92년 펴낸 《추송웅 연구》는 우리나라에서 펴낸 우리 배우에 대한 첫 번째 연구서였습니다. 그 외에 쓴 책으로《공연 예술과 실제 비평》, 《연극 제도와 연극 읽기》, 《한극 연극의 지형학》, 《연극, 반연극, 비연극》, 《옛길》, 《그림으로 걷는 옛길》 등이 있습니다.
목차
- 글쓴이의 말 / 연극 배우를 만나다
-
슬픔을 간직한 아이
극장에서 꾸는 꿈
아픔이여, 이제 안녕
연극영화과 새내기
세상의 무대에 나간 청년 배우
열정의 시간
사랑과 우정의 약속
비극과의 만남
관객은 배우의 기쁨
배우 생활 십 년
모노 드라마에 대한 꿈
빠알간 피터의 고백
어린이들의 친구
우리들의 광대
다시 태어난 소극장
살아 있는 배움터
극장은 연극의 집
다시 외로움 속으로
-
팸플릿으로 보는 추송웅의 연극
추송웅이 걸어온 길
출판사 서평
◆ 배우 추송웅 - 배우 추송웅은 1970년대, 80년대를 두루 포함하는 한국 연극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배우로서 그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불우한 삶을 살다 요절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추송웅’ 하면 재미있는 탤런트, 연극 [빠알간 피터의 고백]으로 아주 큰 인기를 끌었던 배우 정도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과 달리 배우 추송웅은 연극에서 배우의 정체성을 확보하려 노력했고, 순수예술이라는 미명 하에 침묵의 연극을 주장한 비평계에 맞선 배우였습니다. 추송웅의 연기는 당대 한국 연극이 요구하고 강요했던 침묵의 연기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평단에선 좋지 않은 평가를 받기도 하였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이어나간 배우였습니다. 추송웅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연극은 관객들에게 감동과 아픔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현실 속에서 소외받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중략)…연극의 목적은 공동선이 봉사하는 힘이며, 동시에 아름다움의 재창조입니다.” 추송웅, 그가 배우로서 어떤 연극관을 가지고 있는지 잘 나타내주는 대목입니다. - - ◆ 추송웅의 삶과 연극 - 추송웅은 1941년 경남 고성에서 7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용모가 출중한 아버지를 닮지 못하고, 외탁을 한 추송웅은 독특한 외모와 사시라는 열등감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중학교 때 서울로 가출하여 본 연극으로 배우에 대한 꿈을 키웁니다. 부모님에게 끌려 다시 부산으로 돌아온 뒤에는 영화를 보며 배우에 대한 꿈을 더욱 키워나갑니다. 고등학교 시절, 사시 교정 수술을 받았지만 시력 교정이 잘 되지 않아 사물이 둘로 보이는 것을 많은 훈련을 통해 극복했습니다. 1959년, 추송웅은 중앙대학교에서 처음 생긴 연극영화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대학에 입학한 사실만으로도 위대한 배우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출중한 외모의 동기생들을 본 그는 열등감이 되살아났습니다. 하지만 뛰어난 피아노 실력으로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게 된 추송웅은 다시 용기를 갖게 됩니다. 5월 추송웅은 중앙대 연극영화과와 서라벌 예대의 학생들을 모아 ‘은하수’ 극회를 만들었습니다. 12월에는 추송웅이 쓰고 연출한 [백제탑]이란 작품으로 아버지가 교장으로 근무하던 진주의 금성초등학교 등지에서 공연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가을 학기 때는 학교에서 주최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 상인]에 출연하고 싶었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인해 대사 없는 나팔수 역이 주어졌습니다. 추송웅은 깨끗한 마음가짐만이 좋은 연극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연습 장소의 청결이 곧 마음의 청결과 같다고 여겨 늘 연습장을 청소해 놓고 대본을 보면서 사람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런 성실함은 교수의 눈에 띄어 결석을 자주 하는 학생 대신에 광대인 론세르트 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는 ‘화이트 웨이’라는 연극 동아리를 만들고, 3학년 때는 ‘셰익스피어 클럽’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연극을 배워나갔습니다. 1963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중앙대학교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극단 ‘민중’에 가입하여 [달걀](마르소 작, 김광옥 연출)로 첫 직업 무대에 데뷔하게 됩니다. 독특한 용모를 지닌 신인 배우 추송웅은 ‘경상도 꼬마’나 ‘조물주의 실패작’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생긴 것으로는 자신이 없었지만 그는 연기 연습에 몰두하였습니다. 표준말과 정확한 발음을 익히기 위해 많은 연습을 한 결과 추송웅만의 대사법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연습에 들어갈 때도 항상 대본을 두 권씩 받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의 대본에는 늘 배경에 대한 분석으로 글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습니다. 1967년 [한꺼번에 두 주인을](골도니 작, 김정옥 연출, 극단 자유)에 출연하였습니다. 전형적인 코미디 극인 이 작품에 출연은 추송웅의 연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계기가 됩니다. 극단 자유에 입단한 후 추송웅은 계속해서 희극에 출연하여 배우로서 고정적인 이미지를 얻게 됩니다. 이듬해 추송웅은 [상선 테나시티], [꿀맛]에서 같이 공연한 배우 김정신과 결혼을 합니다. 1969년 극단 ‘자유’는 충무로에 소극장 ‘카페 테아트르’를 개관합니다. 당시 신문에는 ‘차를 마시며 연극을 본 뒤 대화를 나누는 곳’으로 알려집니다. 카페 테아트르는 소극장이 많지 않던 당시 환경에서 한국 연극에서 소극장 문화를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카페 테아트르 개관 기념 공연인 [대머리 여가수](이오네스코 작, 김정옥 연출)에서 스시 역으로 주역을 맡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추송웅에게 이 무대의 경험은 후에 ‘카페 테아트르 추’, ‘삼일로 창고극장’의 인수로 이어집니다. 1970년 추송웅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최인훈 작, 김정옥 연출, 극단 자유)에서 온달 역으로 첫 비극 역을 맡습니다. 이 작품은 추송웅의 개인사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바로 비극적 세계와의 만남입니다. 그가 오랫동안 숨기려 했고, 숨기고 있다고 여겼던 자신의 콤플렉스와 그것이 주는 아픔을 동시에 일깨워 준 것입니다. 추송웅의 희극 작품 계열과는 달리 이 작품으로부터 추송웅은 [보이체크](뷔히너 작, 안민수 연출, 극단 동랑 레퍼토리)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비극적 세계를 펼쳐 보입니다. 1971년에 공연한 [플로랑스는 어디에](로벨 토마 극, 최치림 연출, 극단 자유)는 추송웅 스스로 손꼽는 무대입니다. 500석의 드라마센터에서 단 20여 명의 관객을 앞에 놓고 공연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줌밖에 안 되는 관객을 위해 막을 올렸는데 텅 빈 객석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 같은 것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할 수가 없었다.”라고 밝히면서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속에 응어리진 것이 막이 내릴 때쯤에 시원하게 풀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경험으로 그는 관객이 많든 적든 어떤 무대라도 방만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배우 생활 10년이 된 추송웅은 52편의 연극에 출연하여 출연료로 받은 돈은 108,600원이었습니다. '연극을 해서 정말 밥도 먹을 수 없단 말인가?’란 물음을 떠올리고, ‘해방 전후 의 연극을 순수예술이라 정의하고, 자기들만의 오락과 유희를 즐기는 순수예술인’과 투쟁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이후부터 추송웅은 아내가 써 준 한 달 최저생활비 27,750원을 받지 않고서는 연극에 출연하지 않습니다. 추송웅은 비로소 한 사람의 연기자로 탄생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된 때가 연극에 데뷔한 지 꼭 15년이 되었을 때라고 합니다. 그때는 그가 첫 번째 모노 드라마 [빠알간 피터의 고백](카프카 작, 추송웅 연출)을 발표했을 때입니다. 1977년 8월, 관객들은 공연 2시간 전부터 줄을 섰고, 삼일로 창고극장 골목에는 라면 등을 파는 간이음식점까지 생겼고, 예매표가 1만 장이 팔려나가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신문들은 ‘한국 연극사에 신화 탄생, 추송웅 선풍’, ‘지금 스타가 없는 연극계에 유일한 스타로서 객석의 갈채를 한몸에 받고 있다’ 등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추송웅의 성공은 바로 연극 배우의 시대가 열리는 새로운 장의 열림과 같았습니다. 한 해 동안 163회 공연하고, 85,000명의 관객을 동원해서 한국 신연극 70년사에 일대 혁신을 일으킵니다. 추송웅은 이 연극을 위해 동물원에 6개월간 출근하였고, 직접 우리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였습니다. [빠알간 피터의 고백] 다음으로 모노 드라마 [우리들의 광대](유현종 작, 추송웅 연출)를 공연하였습니다. 이 작품 역시 국내에서 만든 창작극 가운데 가장 관객이 많이 들어온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는 1984년까지 8년 동안 [빠알간 피터의 고백]으로 482회 공연하였습니다. 공연 기간 동안 그가 먹은 바나나는 7백 개, 포도가 5백 근, 관객이 던져준 손수건이 3백여 장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들의 광대]는 512회 넘게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펴던 추송웅은 1985년 12월 29일 새벽 4시, 배가 몹시 아파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증으로 마흔다섯 살의 추송웅은 영원히 잠들고 말았습니다. 같은 동작, 같은 대사를 5백 번이나 반복했다는 것 자체가 배우 추송웅의 대단한 정열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모노 드라마는 고달프고 외로운 작업이며, 그 결과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작업이 된 것입니다.
기본정보
ISBN | 9788989004189 |
---|---|
발행(출시)일자 | 2004년 09월 30일 |
쪽수 | 76쪽 |
크기 |
231 * 204
mm
|
총권수 | 1권 |
Klover
e교환권은 적립 일로부터 180일 동안 사용 가능합니다.
리워드는 작성 후 다음 날 제공되며, 발송 전 작성 시 발송 완료 후 익일 제공됩니다.
리워드는 리뷰 종류별로 구매한 아이디당 한 상품에 최초 1회 작성 건들에 대해서만 제공됩니다.
판매가 1,000원 미만 도서의 경우 리워드 지급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일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불편을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래에 해당하는 Klover 리뷰는 별도의 통보 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 도서나 타인에 대해 근거 없이 비방을 하거나 타인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는 리뷰
- 도서와 무관한 내용의 리뷰
- 인신공격이나 욕설, 비속어, 혐오발언이 개재된 리뷰
- 의성어나 의태어 등 내용의 의미가 없는 리뷰
리뷰는 1인이 중복으로 작성하실 수는 있지만, 평점계산은 가장 최근에 남긴 1건의 리뷰만 반영됩니다.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e교환권 200원 적립
문장수집
e교환권은 적립 일로부터 180일 동안 사용 가능합니다. 리워드는 작성 후 다음 날 제공되며, 발송 전 작성 시 발송 완료 후 익일 제공됩니다.
리워드는 한 상품에 최초 1회만 제공됩니다.
주문취소/반품/절판/품절 시 리워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e교환권 100원 적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