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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현 2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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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현

경기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서 일본사 전공으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 [슈고다이묘] [슈고다이묘 리스트] || 인물명 || 시대 || 출생 - 사망 || | 야마나 소젠 | 무로마치 시대 | 1404년 ~ 1473년 | | 오우치 요시오키 | 센고쿠 시대 | 1477년 ~ 1528년 | | 오우치 요시타카 | 센고쿠 시대 | 1507년 ~ 1551년 | | 오우치 요시히로 | 무로마치 시대 | 1356년 ~ 1399년 | | 이마가와 사다요 | 무로마치 시대 | 1326년 ~ 미상 | | 호소카와 가쓰모토 | 무로마치 시대 | 1430년 ~ 1473년 | | 호소카와 마사모토 | 무로마치 시대 | 1466년 ~ 1507년 | | 호소카와 요리유키 | 무로마치 시대 | 1329년 ~ 1392년 | [센고쿠다이묘] [센고쿠다이묘 리스트] || 인물명 || 시대 || 출생 - 사망 || | 가토 기요마사 | 아즈치 · 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 1562년 ~ 1611년 | | 겐뇨 | 센고쿠 시대 - 아즈치 · 모모야마 시대 | 1543년

  • [하타모토] [하타모토 리스트] || 인물명 || 시대 || 출생 - 사망 || | 기라 요시나카 | 에도 시대 | 1641년 ~ 1703년 | | 도리이 요조 | 에도 시대 | 1796년 ~ 1873년 | | 사노 마사고토 | 에도 시대 | 1757년 ~ 1784년 | | 쓰가루 노부토시 | 에도 시대 | 1646년 ~ 1683년 | | 쓰가루 노부후사 | 에도 시대 | 1620년 ~ 1662년 | | 쓰가루 마사타케 | 에도 시대 | 1667년 ~ 1743년 | | 쓰쓰이 마사노리 | 에도 시대 후기 | 1778년 ~ 1859년 | | 오기와라 시게히데 | 에도 시대 중기 | 1658년 ~ 1713년 | | 이코마 마사치카 | 에도 시대 | 1678년 ~ 1706년 | | 이코마 지카나오 | 에도 시대 중기 | 1691년 ~ 1753년 | | 이코마 지카노리 | 에도 시대 후기 | 1790년 ~ 1836년 | | 이코마 지카미치 | 에도 시대 후기 | 1826년 ~ 1

  • 이타쿠라 가쓰나가는 에도 시대 중기~후기의 다이묘로 후쿠시마 번의 제8대 번주이다. 일본 근세에 발생했던 최대 규모의 기근인 덴메이 기근이 닥쳤을 때, 막부에 성지를 반환하겠다는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번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다. [생애] 이타쿠라 가쓰나가는 1761년 7월 26일 이타쿠라 카쓰노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이사부로이다. 전대 번주이자 아버지인 가쓰노리가 죽자, 1776년 그의 뒤를 이어 16세에 무쓰 국 후쿠시마 번의 제8대 번주가 되었다. 가쓰나가가 번주로 재임 중이던 1781~1789년, 일본 근세에 발생했던 기근 중 최대 규모인 덴메이 기근이 발생했다. 기근으로 번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가쓰나가는 성지를 반환하겠다는 탄원서를 막부에 제출하여 허가받았다. 또한 번의 재정을 일으키기 위해 나카무라 번의 쿠사노 한에몬을 초빙하여 보덕사법(報德仕法)을 지도받기도 하였다. 보덕사법이란 농업 정책에 부흥을 일으킨 니노미야...

  • 이타쿠라 가쓰사토는 에도 시대 말기의 다이묘이자 후쿠시마 번의 제12대 번주이다. 1869년 판적봉환 이후에는 화족령에 따라 화족이 되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정치가, 재판관으로 활동했으며, 1890년 귀족원 자작의원에 선출되어 21년 동안 재임했다. [생애] 이타쿠라 가쓰사토는 1839년 이타쿠라 가쓰나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68년 선대 번주였던 이타쿠라 카쓰히토가 석고(石高, 토지의 곡물수확량 단위) 2천 석을 삭감당하고 은거하게 되자, 당시 30세였던 가쓰사토가 무쓰 국 후쿠시마 번의 제12대 번주가 되어 뒤를 이었다. 1869년에는 2만 8천 석의 영지로 옮겨서 미카와 국 시게하라 번의 번주가 되었다. 메이지 시대 초기에 다이묘들이 천황에게 영지와 영민을 반환한 판적봉환(版籍奉還) 이후, 가쓰사토는 1884년 화족령(華族令)에 따라 자작이 되었다. 또한 정치가, 재판관으로 활동하였으며, 1890년에는 귀족원 자작의원이 되어 21년 동안 재임하였다. 가문을...

  • 이와키 다카마사는 가메다 번의 제10대 번주이다. 선대 번주이자 형이었던 다카노부가 죽자, 형의 양자가 되어 가문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형과 마찬가지로 2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생애] 이와키 다카마사는 1842년 이와키 다카히로의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855년 데와 국 가메다 번(현재 아키타 현)의 선대 번주였던 형 이와키 다카노부가 번주가 된지 5개월 만에 사망하자, 14세였던 다카마사가 형의 양자로 들어가 제10대 번주가 되었다. 그러나 다카마사 역시 1861년 8월 12일 2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다카마사의 사망 이후 동생 이와키 다카쿠니가 그의 양자가 되어 번주 자리를 물려받았다.

  • 이코마 다카기요는 에도 시대 초기~중기의 다이묘로 야시마 번의 제2대 번주이다. 이른바 이코마 소동으로 유형을 갔던 이코마 다카토시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사면 이후 번주를 계승했으며 이후 동생에게 봉토 일부를 나누어주고 하타모토가 되었다. 52세로 사망할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아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동생 치카오카가 양자가 되어 가문을 계승했다. [생애] 이코마 다카키요는 1643년 이코마 다카토시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별명은 토모마쓰, 사콘, 우에몬이다. 1639년 아버지 다카토시는 이코마 소동으로 불리는 집안의 내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죄로 영지를 몰수당하고 데와 국으로 유형을 가게 되는데, 이 사건이 바로 이코마 소동이다. 다카키요는 이 당시 아버지의 곁을 지켰고, 다카토시는 1658년 3월 29일 사면을 받아 야시마 번에서 에도로 옮겨가게 되었다. 1659년 다카토시가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다카키요는 야시마 번의 제2대 번주로 그 뒤를 이었다....

  • 이와키 히데타카는 가메다 번의 제3대 번주이다. 한때 아버지 가케타카가 품성과 행실이 나쁘다는 이유로 조부에게 의절당하면서 폐적되기도 했으나, 아버지의 사망과 조부의 은거로 번주 자리를 물려받았다. 한때 에도 성의 경비를 담당하는 직책을 맡기도 했으며, 자식들이 모두 일찍 사망하자 다테 다카쓰구를 양자로 맞이하여 번주를 계승시켰다. [생애] 이와키 히데타카는 1673년 이와키 가게타카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가케타카는 가메다 번(현재 아키타 현)의 제2대 번주였던 시게타카의 적자였다. 그러나 1681년 시게타카가 품성과 행실이 나쁘다는 이유로 아들 가케타카와 의절하고 은거소에 가두었고, 히데타카 역시 폐적되어 상속자의 권리를 박탈당했다. 1696년 시게타카는 가신들이 요청으로 아들을 사면하고자 했지만, 가케타카는 사면 직전 병으로 사망했다. 1704년 시게타카가 은거에 들어가면서 손자 히데타카가 그 자리를 계승, 가메다 번의 제3대 번주가...

  • 이타쿠라 가쓰아키는 에도 시대 후기의 다이묘이며 안나카 번의 제5대 번주이다. 학문을 좋아하여 여러 유학자들과 교류하고 다양한 저작을 남겼으며, 번 내에서도 학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밖에도 번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명군으로 불렸다. [생애] 이타쿠라 가쓰아키는 1809년 이타쿠라 가쓰나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스루고로였으며, 가쓰아키라라고 불리기도 했다. 1820년 아버지 카쓰나오가 죽자 가문을 계승하여 고즈케 국 안나카 번의 5대 번주가 되었다. 가쓰아키는 학문에 관심이 많아 여러 유학자들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했다. 학문에 대한 그의 관심은 개인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학업을 장려하기 위해 번 내에 향학교인 도케이 서원을 건립하였고, 아라이 하쿠세키 등 선대 유학자들의 미간행 책들을 모아서 『감우정총서(甘雨亭叢書)』를 간행했다. 가쓰아키의 저작으로는 『서정기행(西征紀行)』, 『동원기행(東遠紀行)...

  • 이타쿠라 가쓰노리는 에도 시대 중기 후쿠시마 번의 제7대 번주이다. 본래는 안나카 번의 번주였던 이타쿠라 가쓰키요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이타쿠라 가쓰유키의 양자로 들어가 후쿠시마 번의 제7대 번주가 되었다. [생애] 이타쿠라 가쓰노리는 1742년 고즈케 국(현재의 군마 현) 안나카 번의 번주인 이타쿠라 가쓰키요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후계자가 없었던 후쿠시마 번의 제6대 번주 이타쿠라 카쓰유키의 양자가 되었으며, 1773년 가쓰유키가 22세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뒤를 이어 제7대 번주가 되었다. 그러나 가쓰노리 역시 번주가 된지 2년 후인 1775년 12월 26일 34세의 나이로 죽었다.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는데, 그중 둘째 아들인 가쓰나가가 가문을 계승했다. [이타쿠라(板倉) 가문의 계보도] 이타쿠라(板倉) 가문의 계보도

  • 이와키 다카쓰구는 에도 시대 중기의 다이묘이자 데와 국 가메다 번의 제4대 번주이다. 그는 시와 국학, 글쓰기에 정통했으며, 구보타 번학의 기초를 구축한 인물이다. [생애] 이와키 다카쓰구의 첫 이름은 기요타카이며, 통칭은 히사노스케, 사쿄이다. 1707년 다테 무라오키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자식들이 모두 요절한 이와키 히데타카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리고 1718년 히데타카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12세에 가메다 번(현재 아키타 현)의 제4대 번주가 되었다. 다카쓰구는 일본 고유 형식의 시인 와카(和歌)와 국학, 글쓰기에 정통했으며, 구보타 번학의 기초를 구축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유학자 미야케 쇼사이에게 주자학을 배웠으며, 유학자 무로 규소의 문하에 있던 야마미야 세츠로를 가르치기도 했다. 1745년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이와키 시게타카는 에도 시대 전기, 중기의 다이묘이자 가메다 번의 제2대 번주이다. 그는 새로운 논밭을 개발하고 행정 시설을 정비하는 등 번의 발전을 위해 힘썼으며, 그로 인해 유명한 명군인 도쿠가와 미쓰쿠니에게 인정을 받기도 했다. [생애] 이와키 시게타카는 1628년 1월 17일 이와키 노부타카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은거에 들어가면서 29살에 가메다 번(현재 아키타 현)의 제2대 번주가 되었으며, 1659년에 오사카 가반(加番), 1683년에 에치고 국(현재 니가타 현) 다카다 성의 자이반(在番)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는 번주가 된 후 새로운 논밭을 개발하고 행정 시설을 정비하는 등 번의 발전에 힘썼으며, 미토 번의 명군으로 유명한 도쿠가와 미쓰쿠니에게 인정을 받을 만큼 명군이었다. 시게타카에게는 장남 이와키 가케다카가 있었는데, 그의 품성과 행실이 나쁘다는 이유로 1681년에 의절하고 은거소에 가두도록 했다. 1696년 가신들의 요청에 따라 그를...

  • 이와키 다카히로는 가메다 번의 제7대 번주이다. 그는 번의 체제를 개혁하고 재정을 위해 양잠을 발달시키는 등 평생 번의 발전에 힘썼으며, 시와 한학, 글쓰기 등에도 능했다. [생애] 이와키 다카히로는 1791년 이와키 다카노리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1817년 아버지 다카노리가 죽자 가문을 계승, 가메다 번(현재 아키타 현)의 제7대 번주가 되었다. 다카히로는 번주가 된 뒤 번의 재정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양잠을 발달시키고, 제도를 개혁하는 등 번의 발전에 힘썼다. 다카히로는 와카, 하이카이, 한학, 글쓰기 등에도 능했다. 와카(和歌)는 야마토우타(大和歌)의 준말로 일본 고유 형식의 시이며, 하이카이(俳諧)는 하이카이렌가(俳諧連歌)의 약칭으로 무로마치 시대의 렌가(連歌)에서 파생된 시가를 뜻한다. 와카와 하이카이 모두 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정형시다. 다카히로는 평생 번을 돌보는 데 힘쓰다가 1853년에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슬하에는 8남 18녀를 두었는데, 그중 넷째...

  • 이코마 지카오키는 에도 시대 초기 데와 국 야시마 번의 제3대 영주이다. 본래 이코마 다카토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자식이 없는 형 다카키요의 양자가 되어 1694년에 가문을 계승했다. [생애] 이코마 지카오키는 1655년 이코마 다카토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다카토시는 데와 국 야시마 번의 제1대 영주였는데,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지카오키의 형인 다카키요가 뒤를 이어 제2대 영주가 되었다. 형 다카키요는 1694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이 때문에 지카오키는 형의 양자로 들어가서 가문을 계승, 1694년 12월 야시마 번의 제3대 영주가 되었다. 지카오키는 영주가 된지 8년 뒤인 1702년에 48세로 사망하였으며, 장남 마사치카가 가문을 이었다. [이코마 가문의 계보도] 이코마 가문의 계보도

  • 이코마 지카노리는 에도시대 후기의 야시마 번의 9대 영주이다. 본래 니와 나가요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이코마 지카아키라의 양자로 가문을 계승하여 야시마 번의 9대 영주가 되었다. [생애] 이코마 지카노리는 1790년 니와 나가요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니와 키마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후 이코마 지카아키라의 양자가 되었으며, 1817년 지카아키라가 죽자 28세에 가문을 계승하여 데와 국 야시마 번의 제9대 영주가 되었다. 그 뒤 41세인 1830년에 양자 지카요시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은거하였으며, 1836년 47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코마 가문의 계보도] 이코마 가문의 계보도

  • 이타쿠라 가쓰사토는 에도 시대 중기의 다이묘이자 후쿠시마 번의 제3대 번주이다. 단난 번의 번주였던 다카키 마사노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후쿠시마 번의 번주 이타쿠라 시게야스의 양자로 들어가 가문을 물려받았다. [생애] 이타쿠라 가쓰사토는 1706년 9월 28일 가와치 국 단난 번의 번주 다카기 마사노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처음 이름은 마사유키였다. 1718년 무쓰 국 후쿠시마 번의 번주인 이타쿠라 시게야스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13세였던 가쓰사토는 그의 양자가 되어 후쿠시마 번 제3대 번주가 되었다. 1726년부터 15년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오사카 성의 경비를 담당하는 직책인 오사카 가반(加番)으로 종사하기도 했으며, 1743년 38세로 사망했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고 그중 장남인 가쓰쓰구가 가문을 계승했다. [이타쿠라(板倉) 가문의 계보도] 이타쿠라(板倉) 가문의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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