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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우왕

[ 禑王 ]

요약 고려의 제32대 왕(재위 1374∼1388).
출생-사망 1365 ~ 1389
재위기간 1374년∼1388년
별칭 모니노(牟尼奴), 여흥왕(驪興王)
활동분야 정치

성은 왕(王), 이름[諱]은 우(禑)이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이며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강녕대군(江寧大君)으로 불렸다. 뒷날 여흥군(驪興郡, 지금의 경기도 여주)으로 유배되어 있을 때에는 여흥왕(驪興王)이라고도 불렸다. 고려의 제31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순정왕후(順靜王后) 한씨(韓氏)이다.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이림(李琳)의 딸인 근비(謹妃) 이씨와의 사이에서 창왕(昌王, 재위 1388~1389)을 낳았다. 이 밖에도 최영(崔瑩)의 딸인 영비(寧妃) 최씨, 신아(申雅)의 딸인 정비(正妃) 신씨, 왕흥(王興)의 딸인 선비(善妃) 왕씨, 강인유(姜仁裕)의 딸인 안비(安妃) 강씨, 노영수(盧英壽)의 딸인 의비(毅妃) 노씨, 안숙로(安淑老)의 딸인 현비(賢妃) 안씨, 최천검(崔天儉)의 딸인 숙비(淑妃) 최씨, 조영길(趙英吉)의 딸인 덕비(德妃) 조씨, 기녀 출신인 화순옹주(和順翁主) 소매향(小梅香), 명순옹주(明順翁主) 연쌍비(燕雙飛), 영선옹주(寧善翁主) 칠점선(七點仙) 등의 비빈(妃嬪)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우왕은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죽임을 당했을 뿐 아니라 신돈(辛旽)의 아들로까지 몰렸으므로 죽은 뒤에도 시호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우왕’이라고 부르며, 《고려사(高麗史)》나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에서는 아예 성도 신(辛)으로 바꿔 신우(辛禑)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에서는 우왕이 신돈의 서자로서 왕위를 도둑질했다고 하여 반역(叛逆) 열전(列傳)으로 분류해 놓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사서들은 우왕을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이 비첩(婢妾)인 반야(般若)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고려사》와 《동국통감》에는 반야가 낳았던 아들이 죽은 뒤 다른 아이를 데려다 기른 것이라고까지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 건국 세력들이 ‘폐가입진론(廢假立眞論, 가짜를 없애고 진짜를 세운다)’이나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 우왕이나 창왕은 왕씨가 아니다)’에 근거해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과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려고 내세운 주장으로 해석된다.

우왕은 공민왕과 궁인(宮人)이던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을 궁 밖에서 보냈다. 모친이 일찍 죽는 바람에 외가의 친족에게 맡겨져 양육되었으며, 그 후 공민왕의 총애를 받던 신돈의 집에 맡겨졌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유배된 뒤에는 궁궐로 들어가 공민왕의 생모인 명덕태후(明德太后)의 전각에서 살게 되었다. 1373년(공민왕 22) 음력 7월에는 공민왕에게서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으로 책봉되었다. 공민왕은 정당문학(政堂文學) 백문보(白文寶)와 전녹생(田祿生), 대사성(大司成) 정추(鄭樞) 등에게 학문을 배우게 했으며, 1374년(공민왕 23) 정월에는 강녕부승(江寧府丞) 왕강(王康)과 한상질(韓尙質), 주부(注簿) 정목(鄭穆)과 염치화(廉致和)를 시학(侍學)으로 임명해 교육을 맡겼다. 그해 음력 9월에는 우왕의 생모인 한씨의 부친과 조부, 증조부를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추봉했다.

우왕은 1374년 음력 9월 공민왕이 살해된 뒤에 10세의 나이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려사》 등에는 당시 명덕태후와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은 다른 종친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 했으나, 수시중(守侍中) 이인임(李仁任)이 종친인 영녕군(永寧君) 왕유(王瑜)와 밀직(密直) 왕안덕(王安德) 등의 지지를 받아 우왕을 왕으로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위에 오른 우왕은 생모인 한씨에게 순정왕후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우왕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전녹생(田祿生)과 이무방(李茂方)을 스승으로 삼고, 서연(書筵)을 열어 경서를 강론케 했다. 1379년(우왕 5)에는 판개성부사 이림의 딸을 왕비로 맞이해 근비(謹妃)로 책봉하고 후덕부(厚德府)를 설치했다.

혼란한 북방 정세와 왜구의 침입


우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고려는 외세의 압박과 침략으로 매우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었다. 북쪽에서는 원(元)·명(明)의 교체시기에 북원(北元)과 명나라 모두에게 압박을 받고 있었으며, 남쪽에서는 내륙까지 쳐들어온 왜구(倭寇)의 약탈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북원은 심왕(瀋王) 왕호(王暠)의 손자인 톡토부카[脫脫不花]를 고려의 왕으로 세우려 했는데, 고려의 조정은 각 도의 군사를 징발해 북원의 침공에 대비하게 했다. 하지만 이처럼 병력을 징발해 북원의 침공에 대비하는 사이에 왜구는 해안 지방 뿐만 아니라 내륙까지 깊숙이 쳐들어와 약탈을 자행했다. 1375년(우왕 1)에는 왜선이 덕적도(德積島, 지금의 인천시 옹진군 덕적도)와 자연도(紫燕島, 지금의 인천시 영종도)에 대거 집결해 수도인 개경을 위협하기도 했다. 명과의 관계는 1374년에 말[馬]을 징발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명나라 사신을 호송관이던 김의(金義)가 죽이고 북원으로 달아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악화되어 있었다.

혼란스런 정세 속에서 고려는 명나라와 북원에 모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유지하며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1377년(우왕 3) 북원이 사신을 보내 우왕의 즉위를 인정하는 조서를 보내오면서 양국의 갈등은 가라앉았고, 고려에서도 북원에 사신을 보내 답례하였다. 그 뒤 북원은 명나라가 요동 정벌을 위해 설치한 정요위(定遼衛)를 함께 공격하자고 요구했으나, 고려는 문천식을 보내 거절하였다. 명나라에는 1375년(우왕 1)에 최원(崔源) 등을 사신으로 보냈으나, 명나라 조정은 이들을 감옥에 가두고 억류했다. 고려는 1378년(우왕 4)에 재차 사신을 보냈고, 명나라는 억류하고 있던 최원·전보 등을 돌려보냈다. 하지만 이듬해인 1379년(우왕 5) 명나라는 해마다 금 100근, 은 1만 냥, 양마(良馬) 100필, 세포(細布) 1만 필을 보내지 않으면 고려를 침공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고려는 공물과 함께 우왕과 명덕태후의 표문(表文)을 전했다. 그러자 명나라는 1385년에 공민왕의 시호를 전해왔고, 고려는 감사의 뜻으로 사은사(謝恩使, 감사의 뜻으로 외국에 보내는 사신)를 파견했다.

우왕 때에는 모두 278회의 침입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왜구가 기승을 부렸는데, 1377년 무렵에는 경기도와 황해도, 평안도 일대까지 출몰해 수도인 개경마저 위협을 받았다. 이처럼 왜구가 출몰하여 뱃길이 막히자 조정은 조운(漕運)을 중지하고 연안 지역의 조세를 감면해 주었다. 그리고 강화도까지 왜구가 쳐들어와 개경이 크게 동요하자, 양가의 자제 가운데 궁술과 마술에 능한 자들을 모아 왜구를 막게 했다. 우왕은 관청의 관리 가운데 귀향했다가 돌아오지 않는 자들의 관직과 토지를 빼앗아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운 자들에게 주고, 연안 지역들에 산성을 쌓게 했으며, 승려들을 징집해 전선을 건조하게 했다. 정몽주(鄭夢周) 등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 해적을 단속해달라고 요청하고, 판사(判事) 최무선(崔茂宣)의 건의를 받아들여 화통도감(火imagefont都監)을 설치했다. 1380년(우왕 6) 나세(羅世)·심덕부(沈德符)·최무선 등이 새로 개발한 화포(火砲)를 이용해 금강 어구의 진포(鎭浦)에서 왜선 500여 척을 격침시키고, 이성계가 내륙으로 들어온 왜구를 황산(荒山)에서 크게 무찌르면서 왜구와의 전투에서 승기를 잡게 되었다. 그 뒤 고려는 수군을 강화해 왜구에게 잇달아 승리를 거두었고, 1387년에는 왜구를 근본적으로 소탕하기 위해 쓰시마섬[對馬島]과 이키섬[壹岐島] 등의 정벌을 추진하기도 했다.

우왕은 한양(漢陽)으로의 천도(遷都)를 추진하기도 했다. 1375년 서운관(書雲觀)의 건의로 천도가 논의되었으나 최영 등의 반대로 중단되었다. 1377년 왜구가 강화도까지 쳐들어와 개경을 위협하자 천도 문제가 다시 대두되었다. 1378년 우왕은 천도에 적합한 지역을 찾아보게 지시했으나 신하들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었다. 1381년에는 서운관의 주도로 한양 천도가 논의되었다. 천도에 관한 논의는 공민왕 때에도 있었으나, 우왕 때에는 왜구의 침략으로 내륙 지방으로 도읍을 옮겨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천도 논의가 더욱 구체적이고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우왕 자신이 천도에 매우 적극적이었는데, 이는 당시의 천도 논의가 집권층 내부의 세력관계와도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요동 정벌 추진과 위화도 회군


1388년(우왕 14) 명나라는 고려가 차지하고 있던 철령(鐵嶺, 지금의 강원도 안변과 회양 사이의 고개) 이북의 땅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해왔는데, 우왕은 이에 크게 반발하여 최영과 함께 요동 정벌을 추진했다. 왕비와 세자를 한양에 있는 산성(山城)으로 옮기고, 오부(五部)의 장정들을 징발해 정벌군을 구성했다. 그리고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임명하고,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임명해 정벌군을 이끌게 했다. 하지만 정벌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향하던 이성계와 조민수는 음력 5월 22일 압록강의 위화도(威化島)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쳐들어왔다. 우왕은 각 도에서 구원병을 징발해 개경으로 집결시키고 궁궐의 창고에 있던 재물을 풀어 장정들을 모아 반란군에 맞섰으나 개경이 함락되면서 붙잡혀 강화(江華)로 유배되었다.

결국 우왕은 당시 아홉 살이던 창왕(昌王)에게 양위(讓位)를 하는 형식으로 왕위에서 쫓겨났고, 이성계와 조민수가 정권을 장악했다. 우왕은 그해 음력 9월 다시 여흥군으로 옮겨졌고, 그 지역은 황려부(黃驪府)로 승격되었다. 그해 12월 최영을 처형하고, 이듬해에는 조민수마저 창녕(昌寧)으로 유배시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는 1389년(창왕 1) 음력 11월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우왕을 강릉부(江陵府, 지금의 강원특별자치도 강릉)로 옮겼다. 그리고 창왕을 폐위시켜 강화로 유배하고 공양왕(恭讓王, 재위 1389~1392)을 왕으로 세웠다. 그해 음력 12월에는 우왕의 모친인 순정왕후 한씨의 무덤을 철거했고, 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을 보내 우왕을 죽이고, 예문관 대제학 유구(柳玽)를 보내 창왕도 죽였다. 우왕의 장례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아 무덤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우왕 본문 이미지 1 창왕 근비이씨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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