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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작은 백산에서 유래한 소백산

태백산을 지나 선달산을 지난 백두대간은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에서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로 넘어가는 고치령을 지난 뒤 소백산에 이른다.

“허리 위로는 돌이 없고, 멀리서 보면 웅대하면서도 살기가 없으며, 떠가는 구름과 같고 흐르는 물과 같아서 아무런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형상이라서 많은 사람을 살릴 산이다.” 조선 중종 때의 천문지리학자인 남사고가 이렇게 말한 소백산(小白山)은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과 경상북도 영풍군 순흥면 사이에 있는 산이다. 태백산(1568미터) 부근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은 백두대간에 위치한 이 산은 해발 1440미터에 이르며, 북동쪽에 국망봉(1421미터)이 있어 험준한 연봉을 이룬다. 북서쪽으로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여 이른바 고위평탄면을 이루며, 그 위를 국망천이 흘러 남한강에 유입된다. 동남쪽으로는 비교적 경사가 급하다. 낙동강 상류의 지류인 죽계천이 발원한다.

소백산의 ‘백산’은 ‘희다’, ‘높다’, ‘거룩하다’ 등을 뜻하는 ‘imagefont’에서 유래한 것인데, 소백산은 여러 백산 가운데 작은 백산이라는 의미다. 예로부터 신성시되어온 산으로 삼국시대에는 신라ㆍ백제ㆍ고구려 3국의 국경을 이루어 수많은 역사적 애환과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 소백산에서 남서쪽으로는 완만한 능선이 이어지는데,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연화봉이 있고 이곳에서 약 4킬로미터 정도 더 내려가면 제2연화봉(1357미터)에 이른다. 이 산의 남쪽 4킬로미터 정도에 죽령이 있으며, 5번 국도와 중앙선 철도가 통과한다. 제2연화봉 동남쪽 기슭에는 643년(선덕여왕 12)에 두운조사가 창건했다는 유명한 희방사와 내륙에서 가장 큰 폭포인 희방폭포가 있다.

소백산은 장엄하나 완만한 산등성이와 끝없이 펼쳐지는 운해 그리고 울창한 산림이 수려한 계곡과 어울려 장관을 이루어 많은 등산객이 찾아든다. 주요 등산로는 죽령의 가운데에 있는 희방사역을 기점으로 하여 희방폭포와 제2연화봉을 거쳐 올라가는 코스와 북쪽의 국망천, 남쪽의 죽계천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는 코스 등이 있다. 소백산 일대는 예로부터 산삼을 비롯하여 많은 약초가 자라 지금도 약초 채취가 활발하며, 풍기는 이들 약초의 집산지이자 풍기 인삼으로 이름난 곳이다. 죽령과 제2연화봉 사이의 산기슭에는 우리나라 제일의 우주 관측소인 국립천문대가 있다.

소백산 일대는 웅장한 산악 경관과 천연의 삼림, 사찰, 폭포가 많으며 주변에 부석사나 온달산성 등의 명승고적이 많아 1987년 12월에 소백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공원 면적이 320.5제곱킬로미터로 경상북도 영주시ㆍ봉화군, 충청북도 단양군에 걸쳐 있다. 공원 내에는 희방사ㆍ부석사ㆍ보국사ㆍ초암사ㆍ구인사ㆍ비로사ㆍ성혈사 등 여러 사찰과 암자가 있다.

특히 나라 안에 제일가는 절로 평가받는 부석사를 비롯한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하고, 소백산 기슭에 자리한 희방폭포는 소백산의 정봉인 비로봉으로 등정하는 길목에 위치한다. 높이 28미터로 내륙에서는 가장 큰 규모인 희방폭포가 떨어지는 계곡에는 숲과 그늘과 괴암이 한데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폭포 바로 위에는 선덕여왕 12년에 두문스님이 창건한 희방사가 자리한다. 다음은 『택리지』의 기록이다.

소백산에는 옥금동이라는 곳이 있는데, 바위와 샘의 훌륭한 경치가 수십 리에 걸쳐 있고 그 위에 있는 비로전은 신라 때 지은 옛 절이다. 마을 입구에는 퇴계 이황을 모신 서원이 있다. 대부분 태백산과 소백산의 샘과 돌은 모두 낮고 평평한 골짜기 안에 있고, 산허리 이상에는 돌이 없는 까닭에 산이 비록 웅장하여도 살기가 적은 편이다. 먼 데서 바라보면 봉우리들이 솟아나지 않아서 엉기어 있는 듯 보인다. 산은 구름이 가득, 냇물이 흐르듯 하며 하늘에 닿아 북쪽이 막혔고, 때로는 자색 구름과 흰 구름이 그 위에 떠 있기도 한다. 옛 시절에 술사였던 남사고가 소백산을 보고는 갑자기 말에서 내려와 넙죽 절을 하며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라고 감탄하였다.

소백산

소백산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과 경상북도 영풍군 순흥면 사이에 있는 산이다. 아름다운 골짜기와 완만한 산등성이, 울창한 숲 등이 뛰어난 경치를 이룬다.

『지지(地誌)』에서도 “병란을 피하는 데는 태백산과 소백산이 제일 좋은 지역”이라고 하였다. 퇴계 이황은 이곳 소백산을 오르며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을 지었다.

잠시 후에 가마가 마련되었다고 알려왔다. 간단하게 만들어 걸으면서도 쓰기에 편리하였다. 마침내 민서경과 헤어져서 나는 말을 타고 갔다. 응기와 중수 등 여러 중들이 앞뒤에서 혹은 인도하고 뒤를 따르기도 하였다.

위의 글을 보면 사대부들은 대개 승려가 메는 가마를 타거나 말을 타고 산을 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퇴계가 같은 글에서 “처음에 답답하게 막혔던 것이 필경은 쾌함을 얻은 것이다”라고 한 대목에서 옛사람들의 산행법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산을 오르는 것이 학문하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과 같음을 얘기한 것이다. 이중환은 이어서 소백산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백두산에서 태백산까지는 한 줄기의 영(嶺)으로 통한 까닭에 좌우에 다른 봉우리가 없다. 그렇지만 소백산 아래로는 자주 맥이 끊어지는데, 끊어져서 된 산은 속리산이 처음이다. 속리산은 석화성(石火星, 암봉들이 불꽃처럼 일어서서 산의 능선을 이루는 형상을 일컫는 말)이라 한다. 그렇지만 돌의 형세가 높고 크며, 겹쳐진 봉우리의 뾰족한 돌 끝이 다보록하게 모여서 마치 갓 피어난 연꽃 같고, 또 횃불을 멀리 벌려 세운 듯도 싶다. 산 밑은 모두 돌로 된 골이 깊게 감싸고돌아서 여덟 굽이 아홉 돌림, 즉 ‘팔곡구요’라는 이름이 있다.

산이 이미 빼어난 돌로 이루어졌고, 샘물이 돌에서 나오는 까닭에 물맛이 맑고 차갑기 그지없다. 빛도 또한 아청빛(검푸른색)이어서 사랑스러운데, 이 물이 바로 충주에서 남한강으로 접어드는 달천의 상류다. 온 산을 빙 둘러서 신비롭고도 넓은 골짜기가 많고, 그윽한 샘과 기이한 돌이 묘하고 아늑한 형상은 금강산 다음이다.

이런 평을 한 것은 아마도 소백산의 형세가 토산(土山, 육산)이며 포근하기 때문이고, 산 아래를 흐르는 영춘과 단양 일대의 남한강 풍광이 빼어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단양군 대강면에서 경북 예천군 상리면으로 넘어가는 싸리재와 뱀재를 지난 백두대간은 하늘재(630미터)에 이른다. 하늘재, 즉 계립령과 문경새재(632미터)와 이화령(548미터)을 지난 백두대간은 백화산, 시루봉, 운재, 대야산, 청화산을 지나 속리산에 이른다. 이 부근을 두고 ‘천 봉우리, 만 구렁이 깎아지른 듯 깊숙하여 사람들이 들어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이 골짜기의 물이 합쳐져 작은 냇물이 되어 들을 지나고, 청화산 남쪽을 따라 동쪽으로 용추에 흘러드는데 이것이 병천이다.

『택리지』에 “병천 남쪽이 도장산(827미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병천은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에 있는 마을로 기이한 바위와 맑은 물이 아름답고 도장산은 상주와 무령의 경계에 있다. 또한 속리산의 북동쪽 문경시에 자리한 청화산(984미터)과 맞닿았으며, 모두 용유동이라 한다.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 화산마을은 예로부터 산수가 아름답고 용추(龍湫, 폭포가 떨어지는 바로 밑에 깊이 팬 웅덩이)가 있으므로 영조 때의 학자 송영흠이 용유동이라 이름 지었다. 이곳의 평지는 모두 넓고 편평한 바위이고, 큰 냇물이 서쪽에서 북쪽으로 흐른다.

도장산 전망바위

도장산 전망바위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와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의 경계에 있는 명산이다. 백두대간 자락의 마지막 비경 지대다.

『택리지』에는 용유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냇물이 돌 위에 펑퍼짐하게 펼쳐져 있는데, 돌이 깎아지른 곳을 만나면 작은 폭포가 되고, 돌이 비좁고 움푹한 곳을 만나면 작은 우물이 되고, 돌이 모나게 넓은 곳을 만나면 작은 못이 되고, 돌이 둥글게 구덩이 진 곳을 만나면 작은 우물이 되며, 평평한 곳을 만나면 물이 진주 발처럼 변하고, 거슬러 도는 곳을 만나면 물이 향연을 펼치는 것 같다.

돌의 모양새는 마치 구유통 같기도 하고 크고 작은 솥 같기도 하고 가마나 절구 같기도 하다. 혹은 석가산이나 작은 섬을 닮기도 하고 염소와 범 또는 닭과 개 형상 같은 것이 지극히 기괴하게 펼쳐져 있다. 그런 돌 위로 냇물이 빙빙 돌다가 다시 흐르면서 혹은 가득 넘치기도 하고 혹 치솟기도 하고, 혹 괴어 있기도 하며, 혹 부딪쳐 쏘기도 하고, 혹 거꾸로 쏟아지기도 한다. 산의 양쪽 언덕에는 수목이 쓸쓸하고, 골짜기 바람이 쌀쌀하니 거의 천하의 기이한 광경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가운데 송씨가 세운 녹천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청화산 동북쪽에 있는 선유산(仙遊山, 지금은 대유산이라 부름)은 정기가 높은 데 모여서 이루어진 형세라서 맨 꼭대기는 평탄하고 골이 매우 깊다. 그 아랫자락 가은읍 완장리는 대한제국 말의 의병장 이강년이 태어난 곳이고, 그 윗자락의 선유동은 불란치재 너머에 있는 충북 괴산군 송면의 선유동 구곡과 함께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목에 위치한 1킬로미터에 이르는 아홉 개의 계곡으로 이름이 높다. 골이 깊고 수목이 울창하여 기이한 봉우리 사이로 맑은 물이 흘러 굽이마다 소와 폭포가 있는데, 이곳들이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어 선유구곡이라 부른다. 위에는 칠성대와 학소굴이 있다. 조선시대에 도를 닦았던 진인 최도와 도사 남궁두가 여기서 수련했다 한다.

남궁두는 조선 중기 단학파(丹學派)의 한 사람으로 1526년 전라도 함열에서 태어났다. 1555년 진사과에 급제한 그는 임피에서 살다가 애첩과 당질 간에 간통 사건이 일어나자 두 사람을 죽이고 승려가 되었다. 법명을 총지라고 지은 그는 지리산 쌍계사에서 은거하였다.

조선 후기 사람인 홍만종이 단학설화를 수집하여 인물별, 시대별로 펴낸 전기집인 『해동이적(海東異蹟)』에 따르면 남궁두는 그 뒤 경상도 의령의 한 암자에서 도교의 방술인 부주ㆍ상위ㆍ감여ㆍ추점 등에 뛰어난 노승을 만나 신선술을 익혔다. 그는 먼저 정신 통일을 하기 위해 잠을 자지 않는 법을 익혔고, 그다음은 곡기를 끊으면서 『참동계(參同契)』와 『황정경(黃庭經)』(『참동계』와 『황정경』은 단학의 경전)의 묘리를 터득했으며, 이를 운용하여 내단(內丹) 수련의 극치인 신대(神代)에 거의 도달했다고 한다.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에 따르면 그는 아흔 살이 되었어도 거의 늙지 않았고 언제나 명산대찰을 떠돌아다녀 사람들은 그를 지선(地仙), 즉 땅의 신선이라고 불렀다.

허균은 『남궁선생전』을 지었는데 그가 만난 남궁두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보자.

세상에서 신선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걸핏하면 꼭 수련이 끝난 뒤를 설명하기를 “나는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될 수 있으며 태식(胎息, 도가에서 하는 수련법의 하나)을 이룰 수 있으며,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라고들 한다. 그런데도 외롭게 몇백 년 동안 신선이 된 것을 본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것은 얼굴이 해만 따라다니다가 제 발은 땅에 붙어서 굳어진 해바라기와 같은 짓일 뿐이다. 내가 일찍이 남궁두를 호남에서 만났는데, 나이가 아흔 살인데도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도 없었다. 왜 그런가 물었더니 때맞추어 음식을 적게 먹었을 뿐이라고만 하였다. 수련 공부는 시작하기가 쉽지 않은데, 밥을 먹거나 자고 일어날 때에 몸을 튼튼히 하고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데는 그날그날에 그 방법을 쓰는 것이 효과도 가장 빨리 거둔 것이 아닐까?

지금도 지리산을 비롯해 신령스러운 산이라고 알려진 산에는 남궁두의 후예들이 현대적 개념의 토굴(집)을 파고 수련을 하는데 그런 사람이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어느 지점이 명상이나 수련하기에 알맞은 장소라고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프랑스의 작가 장 그르니에는 자신의 산문집 『섬』의 「상상의 인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단 고팔 무케르지가 자기 동포인 간디를 찾아갔을 때 간디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민족은 기후 때문에 명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시 간디는 부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같은 기후 조건 속에 사는 민족들에게 다 같이 이 말이 적용된다고 생각하면 그건 결정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우리와 비슷한 기후 조건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명상은 하지 않는다. 히말라야 꼭대기 눈 덮인 굴속에 사는 성인들은 신(神)에 대하여 명상을 한다. 따라서 기후가 영혼을 만든다고 말할 일은 아니다. 영혼이 기후를 이용할 뿐이다.”

한편 18세기의 조선에는 남궁두의 뒤를 잇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다. 『해동이적』에 보면, 1728년에 묘향산 도사라는 이가 용암포에서 뛰면 중국의 산동반도에 떨어진다고 장담하고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뛰다가 높은 파도에 휘말려 죽은 일이 있었고, 1733년에는 울릉도 모시개에서 말바위까지 날아갔다 온다고 하다가 파도에 휩싸여 죽은 울릉도 선인봉 도사가 있었다. 또한 1787년에는 속리산 문장대에서 법주사까지 뛰어내리다가 연쇄적으로 떨어져 죽은 세 명의 젊은 도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들이 수련한 도를 믿었기 때문에 호언장담하고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잉글랜드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인간 새 경기’가 열린다. 어떠한 기구를 이용하든 100미터를 날면 5000만 원을 준다고 하지만 올해도 100미터를 날지 못하고 80미터를 난 사람이 우승했다고 하는데 묘향산 도사는 용암포에서 산동반도까지 날아가겠다고 했으니, 그들이 일생을 걸고 수련한 수련법을 얼마나 절대적으로 신봉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동국지지(東國地誌)』에는 “이 산은 수도하고자 하는 자가 살 만한 곳이다”라고 하였는데, 일찍이 한유는 “산의 유명함은 그 높이에 있지 않고 신선이 살면 신령스럽다”라고 하였고, 옛말에 “높다고 해서 다 산이 아니니, 신선이 있어야 이름이 날 수 있고, 깊다고 해서 다 물이 아니니, 용이 있어야 영험해질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명산에는 예나 지금이나 도를 닦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 신령스러움이 대대로 이어지는 듯하다. 이 골짜기의 물이 흘러내려서 낭풍원이 되고 다시 양산사 앞 골짜기 물과 합쳐지면서 가은읍 동쪽으로 내려가 문경의 큰 강인 영강으로 흘러든다.

칠성대 서쪽으로 백두대간을 넘으면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에 있는 외선유동이다. 이곳 송면리는 조선 선조 때 붕당이 생길 것을 예언했던 동고 이준경이 장차 일어날 임진왜란을 대비하여 자손들의 피난처로 정했다고 한다. 선유동 입구에는 바위절벽에 ‘선유동문’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바위에는 천연적으로 문이 뚫려 있고 퇴계 이황이 이름을 지은 선유구곡이 펼쳐진다.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 화양동구곡에서 동쪽으로 14킬로미터 떨어진 화양천 상류에 있는 선유동구곡은 신라 때의 학자 고운 최치원이 이곳을 소요하면서 선유동이라는 명칭을 남긴 데서 유래한 곳으로, 그 후 퇴계 이황이 칠송정에 있는 함평 이씨 집을 찾아왔다가 이곳의 비경에 사로잡혀 아홉 달을 돌아다닌 뒤 아홉 개의 이름을 지어 글씨를 새겼다고 한다. 주자학을 창시한 주희는 성리학을 탐구하기에는 굽이굽이 돌아가는 계곡이 이상적인 장소라고 보았다. 그는 그러한 형세를 갖춘 계곡을 중국 남부에서 발견한 뒤 ‘무이구곡(武夷九曲)’이라고 이름을 짓고 1곡에서 9곡에 이르는 물의 굽이마다 그 모양새에 합당한 이름을 붙인 뒤 성리학의 경지에 비유하였다.

일반적으로 문경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선유동구곡은 30미터 높이의 커다란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고 ‘선유동문’이라는 글씨가 음각된 곳에서 시작하여 기암절벽으로 절경을 이룬 경천벽, 옛날 암벽 위에 청학이 살았다는 학소대, 계류변에 있는 바위 위 중앙이 절구통같이 생겼다는 연단로, 와룡이 물을 머금었다 내뿜는 듯이 급류를 형성하여 폭포를 이룬 와룡폭, 방석같이 커다란 모양의 난가대, 바둑판 형상을 한 커다란 암반인 기국암, 거북같이 생긴 구암, 두 바위가 나란히 서 있고 뒤에는 큰 바위가 가로 놓여 그 사이에 석굴이 있는 은선암 등으로 이루어진다. 주위의 수석층암과 노송이 어우러져 세속과는 거리가 먼 이상향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그중 난가대와 기국암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서려 있다.

조선 명종 때의 일이다. 한 나무꾼이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하러 갔다가 바위에서 바둑을 두는 노인들을 발견하고 가까이 가서 구경을 하였다. 그러자 한 노인이 “여기는 신선들이 사는 선경이니 돌아가게” 하였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옆에 세워둔 도끼를 찾았는데 도끼자루는 이미 썩어 없어진 뒤였다.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니 낯모르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누구인가 물었더니 그의 5대 후손이었다. 그곳에 간 날을 헤아려보니 그가 바둑 구경을 한 세월이 어느새 150년이나 흘렀던 것이다. 그때부터 도끼자루가 썩은 곳을 난가대라고 불렀고, 노인들이 바둑을 두던 곳을 기국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소백산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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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소백산 부석사에서 바라본 소백산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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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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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이 땅을 구석구석 밟아보고, 그 땅의 자연과 물산과 그 땅에 심어 놓은 조상의 문화를 직접 체험하면서 죽도록 이 땅을 사랑해 본 일이 있는가. 2백 년 전의 이중환은 불우한 가운데서 그런 일을 했고, 『택리지』라는 명저를 냈다. 150년 전의 김정호도 이 땅의 아름다움과 문화를 대동여지도로 그려냈다. 그런데, 바로 지금 또 하나의 21세기가 나타났다. 세월이 변하고 국토가 변하고, 문화가 바뀐 이 시점에서 당연히 『택리지』는 다시 쓰여 져야 할 것이고, 그 일을 신정일이라는 문화사학자가 일구어냈다. 이 책은 왜 우리가 죽도록 이 땅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뜨거운 가슴으로 말하고 있다. 귀중한 현장 사진과 더불어 옛날과 지금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면서 땅과 사람의 대화를 그려낸다. 자세히보기

  • 저자 신정일 사학자

    저자는 <사단법인 우리땅걷기>의 대표로 현재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걷기 열풍을 이끈 도보답사의 선구자다. 1980년대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가지 사업들을 펼쳤고,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다. 한국의 10대 강 도보 답사를 기획하여 금강에서 압록강까지 답사를 마쳤고, 우리나라의 옛길인 영남대로와 삼남대로를 도보로 답사했으며, 400여 개의 산을 올랐다. 현재 소외된 지역문화 연구와 함께 국내의 문화유산 답사 프로그램과 숨은 옛길 복원 등의 사업을 진행 중이다. 또한 『조선을 뒤흔든 최대의 역모사건』, 『한국사의 천재들』, 『똑바로 살아라』, 『그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 『대한민국에서 살기좋은 곳 33』, 『가치있게 나이드는 연습』 등 40여 권을 집필한 대한민국 대표작가다.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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