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의 ‘점’은 생명체의 역사 [과학의 한귀퉁이]

입력
기사원문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봄볕엔 며느리, 가을볕엔 딸을 밭에 내보낸다’는 옛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자외선이다. 지구 역사 어느 순간 부산물로 산소를 만들어 내는 남세균이 등장하고 덩달아 대기 중 오존층이 형성되면서 생명체에 해로운 자외선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게 되었다고 고생물학자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오존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초기 지구는 어땠을까?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의 헤센 박사는 처음에는 황을 포함한 기체가, 그 후로는 메탄이 어느 정도 자외선을 차단했으리라고 추정했다.

태양은 다양한 파장을 지닌 전자기파를 송출한다. 우리는 식물이 광합성에 사용하는 가시광선보다 짧은 파장을 자외선, 반대로 긴 파장을 가진 파동을 적외선으로 분류한다. 햇살이 비친 벽돌의 따스함은 적외선의 효과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자외선은 단백질이나 유전자 같은 생체고분자를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그 빛에 오래 노출된 세포를 죽일 수도 있다. 지구에서 자외선의 이런 위험성은 생명 탄생 초기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져 왔다. 지금껏 모든 생명체는 자외선을 차단하는 몇 가지 장치를 진화시켜 왔다. 우선 자외선을 피해 달아나는 회피 행동, 두 번째로, 자외선을 차단하거나 흡수하는 화합물을 만드는 일, 마지막으로 손상된 유전자를 수리하거나 항산화 효소를 합성하는 일 등이다. 모두 생명의 세계에서 흔히 관찰되는 현상이다. 수생 어류나 유충 또는 플랑크톤은 내리쬐는 자외선을 피해 수직으로 하강할 수 있다. 밤에만 활동하는 동물들은 자외선 걱정을 덜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회피 방식이다. 한편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생명체들은 멜라닌 혹은 카로틴과 같은 물질을 만들어 자외선을 차단하거나 손상된 유전자를 수리하는 정교한 도구 또는 항산화 효소를 개발했다.

하지만 자외선이 늘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외선은 공기 중 세균이나 바이러스 혹은 기생 생명체를 죽이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외선의 이러한 살균 효과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자외선은 피부 아래 모세혈관에 흐르는 콜레스테롤을 비타민 D로 변화시킨다. 척추동물의 뼈 건강에 반드시 필요한 비타민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인간이 자외선을 애써 구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 북반구 추운 곳으로 이동하게 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안타깝고 소중한 햇볕, 특히 비타민 D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자외선을 확보하기 위해 인류는 무슨 일을 했을까? 간단했다. 바로 멜라닌 생산량을 줄인 것이다.

200종이 넘는 인간의 세포 중에서 멜라닌을 만드는 일은 멜라닌세포 담당이다. 피부 상피와 그 아래 진피가 만나는 곳에 자리 잡은 멜라닌세포는 합성한 검은색 멜라닌을 수십개에 달하는 주위 피부세포에 전달하기 위해 가지를 뻗고 있다. 적도 지역에 강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아프리카인들은 멜라닌 생산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피부를 검게 유지한다. 그렇다고 해서 적도 근처에 사는 사람들의 멜라닌세포 수가 더 많은 것은 아니다. 어디 살든 사람들은 피부세포 30개당 1개꼴로 멜라닌세포를 갖는다. 고위도에 사는 사람들은 다만 멜라닌을 적게 만들 뿐이다. 따라서 인류의 피부색은 자외선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비타민 D를 합성하기 위한 모종의 타협점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현재의 피부색을 바꿀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하다. 다만 끈기가 좀 필요하다. 이런 저런 선택을 거쳐 피부색이 바뀌는 데는 100세대, 약 2500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르웨이에 살던 사람이 호주로, 반대로 나이지리아에 살던 사람이 캐나다로 이주하게 된다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호주에 사는 노르웨이인은 피부암에 걸릴 확률이 늘어나고 캐나다의 흑인은 비타민 D 부족 현상을 겪을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인간의 눈, 털, 귀 혹은 뇌에도 멜라닌 혹은 멜라닌세포가 존재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1.7㎡ 면적의 피부에 분포한다. 일차 방어벽 역할을 하는 피부에서 멜라닌세포는 면역기능을 담당하기도 한다. 참 다재다능한 세포이다. 성인 한 사람이 평균 30개쯤 가지고 있다는 우리 피부의 점(nevus)도 다수의 멜라닌세포로 이루어졌다. 피부 반점은 크기도 각기 다르고 튀어나왔거나 편평한 것도 있어서 그 형태가 천차만별이지만 대부분 해롭지 않아 건강에 별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점은 멜라닌세포를 가진 모든 포유동물에서 관찰되며 특히 개와 말 그리고 인간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햇볕을 쬐거나 호르몬 양이 변하면 점의 개수가 늘어날 수 있지만 가끔은 점이 사라지기도 한다. 생리학자들은 점을 구성하는 멜라닌세포가 피부에서 생겨나 안쪽으로 이동했는지 아니면 반대로 진피에서 생겨나 밖으로 옮겨왔는지를 두고 지금도 논쟁을 벌인다. 게다가 요즘 사람들은 얼굴이나 피부의 점을 미용의 적으로 치부하고 모조리 제거하려 든다. 그러거나 말거나 점은 멜라닌색소 생산 과정이 생명체 역사와 오랜 기간 함께해왔음을 그저 묵묵히 증언할 뿐이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오피니언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