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리버 피닉스… 평생 초가을에 머물 운명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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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의 순간 속으로]


거스 밴 샌트 감독의 영화 ‘아이다호’(1991)에서 리버 피닉스는 부랑아로 사창가를 떠도는 마이크 역할을 맡았다. 스러져 버릴 것 같은 외모를 가진 그는 기면증을 앓는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했지만, 정작 그 자신도 스물세 살에 요절했다. 우리가 사계절을 살아갈 때, 피닉스는 평생이 초가을에 끝나는 운명이었던 게 아닐까. 이 섬세한 영혼은 늦가을의 마지막을 버티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파인라인픽쳐스

이 글을 쓰고 있는 10월 31일은 영화배우 리버 피닉스의 기일이다. 1970년에 태어나 1993년에 생을 마친, 만 23년에 불과한 그의 생은 불꽃처럼 짧았지만 여러 사람의 마음에 불을 댕겼고, 너무 이른 죽음으로 하얀 재가 되어 남았다. 히피인 부모 사이에 태어나 '리버 주드 보텀'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졌던 그는 난교(亂交) 등 기행을 일삼는 사이비 종교에 빠진 부모의 자식이었고, 동생들과 함께 길에서 노래를 부르며 동전을 얻기도 했다. 이때 함께했던 동생들 중 하나가 영화 '앙코르' 등으로 유명한 호아킨 피닉스다. 그의 형처럼 연기같이 곧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매력은 지니지 않았지만, 선 굵은 인상과 그에 어울리는 연기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어쨌든 난교를 실행하는 이 괴상한 종교에서 탈퇴한 그들은 새로 태어난다는 의미에서 '피닉스'라는 성으로 바꾸게 된다.

파란만장한 어린 시절을 보내느라 피닉스와 동생들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또래라면 마땅히 알 만한 상식과 역사 등을 전혀 알지 못했다. 아역 배우 시절 함께 출연했던 동년배의 배우들에게 틈나는 대로 여러 가지를 배웠다고 한다. 동생들과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푼돈을 벌고 있는 모습이 어느 에이전트의 눈에 띄어 광고에 캐스팅됐고,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미디어에 데뷔하게 된다. 이후 롭 라이너 감독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스탠 바이 미'에서 또래의 리더 역할을 하는 크리스 챔버스 역을 맡아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때 역할에 너무 몰입해서 빠져나오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명주실처럼 섬세한 연기를 하는 그의 모습에 관객들도 빠져나오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18세에 출연한 시드니 루멧 감독의 '허공에의 질주'로 그는 관객을 더욱 매혹시킨다. 소위 운동권 부모 밑에서 태어나 일종의 테러 행위를 저지른 부모 때문에 늘 도망자의 삶을 사는 소년 역이었다. 그 역할 때문에 피아노를 배웠는데, 진짜 피아노나 악기를 갖지 못해 마분지에 그려진 건반을 누르는 모습이 마치 정말로 피아노를 치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 연기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의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인디아나 존스'에서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연기했고,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하룻밤'에서 선량한 해병을 연기하기도 하며, 로버트 레드퍼드가 주연한 해커 이야기 '스니커즈'에도 출연하며 필모그래피를 조금씩 늘려갔지만, 그의 광채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뿜어져 나온 게 아니었다.

스물한 살에 키아누 리브스와 함께 출연한 거스 밴 샌트 감독의 '아이다호'에서 그는 남창 역할을 맡았다. 퇴폐적이지 않고 어딘가 곧 무너져 버릴 것 같은 허무한 모습으로 스크린을 채웠다. 틈만 나면 자기도 모르게 잠에 빠져 버리는, 기면증이라는 병을 앓는 사내 역이었다. 그때 일반인들에게도 이 병이 널리 알려졌는데, 스러져버릴 것 같은 외모의 리버 피닉스와 죽음 같은 잠에 툭하면 납치되어 버리는 이 병은 너무도 잘 어울렸다. 마치 정말로 기면증을 앓고 있는 것만 같은 남창 '마이크'의 모습을 섬세하게 연기한 그에게 영화계는 베네치아영화제 남우주연상으로 화답한다.

타고난 재능으로 보는 사람을 매혹하는 영화계의 샛별. 누구보다 환하게 빛나다가도 곧 스러져 버릴 것 같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그는, 사실 돌이켜 보면 어쩐지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은 관상이었다. 자기 안에 존재하는 모든 빛을 일찍 끌어모아 모조리 연소시키고 공중으로 하얗게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관상. 이 관상 때문이었을까. 이즈음부터 피닉스는 마약을 애용하기 시작한다. 마리화나, 코카인, 헤로인 등 종류도 많았다. 알코올 의존도 활발하게 그를 괴롭혔다. 피닉스는 가죽 벨트도 차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 동물 보호, 정치 운동에 힘썼던 그의 남다른 감수성이 이 세상을 잘 이겨 나가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10대 시절 연인이었던 여배우 마샤 플림턴과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하는데, 마샤가 연한 껍데기의 게 요리를 시키자 피닉스는 참지 못하고 레스토랑 밖으로 나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식물 아닌 존재를 먹는 풍경조차 괴로움이었던 것이다.

코스타리카의 어떤 지역을 개발에서 보호하기 위해 약 98만평을 직접 구입하는 행동파였다. 연기에도 열정이 있었지만 음악에 늘 미련을 둬서 여동생과 밴드를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는데, 이 곡의 저작권을 동물권 보호 단체인 'PETA'에 넘겼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리버 피닉스의 콜 잇 러브'는 컨트리 음악을 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피닉스는 여기에서 직접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컨트리 음악의 메카 내슈빌에서 내일의 스타를 꿈꾸며 몰려드는 가수 지망생 '제임스'를 연기한 이 작품에서 피닉스는 끊임없이 기타를 치며 노래한다. 유작이 되어 버린 이 작품에서 피닉스는 다른 어느 작품보다 편안해 보인다. 아마도 늘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를 때가 그를 가장 태평스럽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 아닐까.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너무 섬세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피닉스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 아닐까. 후에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에게 넘어간 '바스켓볼 다이어리'의 촬영을 앞두고 있던 그는 조니 뎁이 운영하는 클럽에서 발작을 일으킨 후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한다. 부검 결과 급성 다량 약물 중독이 사망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알린은 "아들이 만성적으로 약물을 복용하는 마약 중독자는 아니었다"고 하며 아들이 관심을 가졌던 환경과 정치,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기고한다.


나이 든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사람들이 있다. 피닉스가 살아 있다면 오십이 다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십이 된 피닉스는 차치하고 삼십 대, 사십 대를 살아내는 그의 모습도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피닉스의 연기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허무한 아름다움은, 한 사람이 오래 간직하고 은행 예금 꺼내 쓰듯 야금야금 꺼내 쓸 수 있었던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이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 같은 범인들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살아갈 때 피닉스는 평생이 초가을에 머물러 버리는 운명이었던 게 아닐까. 초가을 바닷가에서 허공에 쏘아 올리는 불꽃놀이처럼, 찬연하게 빛나지만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우리가 지구에 붙잡아 둘 수 없었던 영혼이 찬란한 여름을 지나 늦가을의 마지막을 더 버텨내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김현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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