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희귀식물 보호위해 자생지 정보공개 신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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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식물분류학 발전의 숨은 공로자로 야생화 사진 동호인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으로 프로 사진가는 물론이고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활동이 활발해진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한국 야생화의 예술적 표현을 넘어 희귀식물이나 미기록종의 새 자생지라든가 신종 발견 소식도 야생화 동호인의 제보로 이뤄지곤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학문 영역에까지 발을 들여 학자의 길을 걷는 분들도 많이 생겨나면서 식물 관련 학문 발전에 적잖은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백두산 주변의 조름나물 군락

하지만 야생화 사진 동호인의 활약이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식생이 좋다고 소문난 곳에는 너무 많은 사진가들이 방문하다 보니 그들의 답압(踏壓)이 식물 개체수 감소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또한 멋진 사진 찍는 데만 혈안이 된 일부 극성 사진가들이 자생지를 제멋대로 훼손하기도 하고, 희귀식물의 자생지 정보를 무분별하게 공유하여 식물이 통째로 사라지는 일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쉬쉬해도 ‘너만 알고 있어!’ 하는 식으로 새어나가는 자생지 정보는 결코 비밀이 될 수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희귀식물의 자생지 정보를 얻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희귀식물의 사진을 올리기라도 하면 위치 좀 알려달라는 지인들의 성화에 시달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고도 게시판이나 블로그에 올리지 못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야생화는 널리 알리되 자생지는 보호해야 한다는 건 이율배반 같은 일이었습니다. 저 역시 책을 낸다거나 청탁 받은 원고를 써줄 때면 해당 출판사나 신문사에서 좀 더 구체적인 자생지 정보를 요구해 난처해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대충 어느 산쯤이라고 써놓기만 하는데, 그 정도만 밝혀도 자생지를 죄다 까발린다면서 항의 아닌 항의를 받곤 합니다.

해오라비난초

해오라비난초 군락이 제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지만 저는 그곳을 알려고 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곳을 알게 되면 여러 지인들이 알려달라고 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건 차라리 모르고 있는 게 차라리 속 편합니다.

어쩌다 자생지 보호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이들에게 자생지 정보가 넘어가게 되면 그걸로 끝입니다. 자생지 정보 교환이 친밀감의 척도로 인식되다 보니 누구는 알려주고 누구는 알려주지 않는다면서 다툼이 생기곤 합니다. 그래서 결국 의가 틀어지거나 모임이 쪼개져 나가는 일까지 생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목숨처럼 여기던 자생지 정보가 지금은 너무 공공연히 떠돌아다닙니다. 자신의 블로그에 자기가 다녀온 여정을 상세히 기록해 놓으면서 희귀식물의 자생지를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블로거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전문가 행세를 하는 저도 잘 모르겠는 희귀식물의 자생지를 너무나도 자세하고 친절하게 밝혀놓은 블로거들을 볼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당히 귀한 식물의 자생지 정보가 올려진 것을 보면 낯 뜨겁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인한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아도 그 개념 없는 블로거들의 블로그 내용만 숙지하고 가면 손쉽게 희귀식물을 마주할 수 있으니 찾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고맙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졸음나물’로 불리던 조름나물

조름나물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계적으로 북반구 고위도 지방의 습지에서 자라는 조름나물은 남한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식물입니다. 먹으면 잠이 온다고 해서 한자로 수채(睡菜)라고 하고 ‘졸음나물’이 변해서 지금의 조름나물이 된 이 식물은 북방계 식물이라 남한에는 보기 어렵습니다.

국립수목원 수생식물원의 조름나물

강원도 인제군의 대암산과 강원도 고성군의 오래된 연못에서 발견되었는데, 대암산의 것은 수심이 낮아진 탓에 개화한 것을 보기 어렵고 고성군의 것은 비교적 넓은 면적에 분포합니다. 최남단으로 알려진 경북 울진군의 자생지는 완전히 파괴되어 절멸했으나, 다행히도 그곳에서 수집한 것을 국립수목원에서 보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태백시의 조름나물 발견지

그런 조름나물이 2012년에 태백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에 궁금한 점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이미 그곳을 다녀온 지인이 있어 직접 물어보면 자생지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블로그의 글 내용만 따라가더라도 되기에 구태여 지인을 괴롭힐 필요는 없었습니다.

사실 블로거만을 탓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생지의 훼손이 심각하다며 쓴 신문 기사에서도 자생지에 대한 정보가 상당히 노출되어 있으니까요.

태백시의 조름나물 군락

어쨌든 맘씨 좋고 개념 없는 그들 덕에 어렵지 않게 태백시의 조름나물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미 백두산 주변에서도 보고 국내의 다른 곳에서도 본 조름나물을 또 찾아가본 이유는 태백시의 발견지가 자생지가 맞느냐 아니냐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함에 있었습니다.

수상하게 여긴 대로 태백시의 그곳은 자생지라고 하기엔 산중의 경사지에 혼자 덩그러니 놓인 비좁은 면적의 연못이었고, 주변에 별다른 수생식물이 있지 않았습니다.

강원도 고성군의 조름나물 자생지는 면적이 상당히 넓고 평탄한 지형이며 주변에 제비붓꽃 같은 식물이 자라는 전형적인 습지입니다. 태백시의 것은 그렇지 않으므로 자생지로 보기엔 상당히 의심스러웠습니다.

만약 누군가 그 조름나물을 어디서 옮겨 왔다면 비교적 오래전일 것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습지 같지는 않으므로 그곳의 조름나물을 자생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고성군의 조름나물 군락지

식물의 자생지 정보에 관해 최근에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 생겼습니다. 공개되어서는 안 될 희귀식물의 자생지를 찾아가는 방법을 적나라하게 알려준 책이 서점에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자생지 정보를 유출하지 않으려고 의까지 틀어져가며 애썼던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책 앞에서 그 식물들의 엉망이 될 미래가 너무나도 훤히 보였습니다.

황폐해진 넓은잎제비꽃 군락지

다른 식물은 차치하고서라도 난초 종류의 자생지 정보 공개는 해당 식물에게 치명적입니다. 대체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 그런 책을 낸 건지 알 수 없습니다. 식물은 스스로 보호할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완전히 파괴된 넓은잎제비꽃의 자생지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켜주지 않으면 그들은 언제 사라질지 모릅니다. 그런데 자생지 공개라니요? 불문율을 깨는 그런 일은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선주성 runman@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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