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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전자대전

김우영

[ 金雨英 ]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1가 18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출처 디지털부산문화대전-김우영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친일 법조인이자 관료.

활동 사항

김우영(金雨英)은 지금의 동래구에 있던 개양학교를 졸업하고 1906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09년 일본 오카야마 제6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6월에 졸업하였다. 1918년 7월 교토제국대학 법학부 법률학과 및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유학 중이던 1915년 1월 교토 조선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였다.

1919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경성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고, 같은 해 12월 조선경제회 이사로 활동하였다. 1920년 4월에는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배동석 등의 재판에 변호사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대동단 사건의 재판에 변호사로 참여했고, 1921년 5월에는 강택진과 곽병도 등, 7월에는 이원직과 김청풍 등의 군자금 모집 사건을 변호하였다.

1921년 9월부터 1927년 5월까지 일본 외무성 관리로 만주 안동현 부영사를 역임했고, 1932년에는 전라남도 산업부 산업과 이사관으로 재직하였다. 1937년에는 전라남도 산업부 상공과장을 역임하였다. 1940년 9월에는 충청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 사무관으로 산업부장을 맡았다. 1943년 9월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를 지냈다.

해방 후인 1945년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가 1946년 1월 부산으로 왔다. 1949년 1월 22일 부산 부용동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김용희에게 체포되었다가 2월 12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체포 구금된 기간에 자신의 청렴결백을 주장하며 단식 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1949년 부산에서 다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51년 신생공론사라는 출판사를 경영하며 『신생공론』이란 잡지를 발간하였다. 1952년에는 부산에서 국회 의원 보궐 선거에 입후보했다가 낙선하였다. 1956년 부산 민주당 영도구당 위원장인 이만우(李晩雨)가 박헌영(朴憲永)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피소되자 무료 변호를 자청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서양화가였던 나혜석과의 결혼과 이혼은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36년에는 부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여성 사회사업가인 양한나와 결혼하였다. 1958년 사망하였으며,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논설과 회고를 담은 『청구 회고록』[1953], 『회고』[1954], 『민족 공동생활과 도의』[1957] 등이 있다.

참고문헌

  • 김우영, 『회고』(신생공론사, 1954)
  • 김우영, 『민족 공동생활과 도의』(신생공론사, 1957)
  •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 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
  • 「김우영, 하판락은 부산에서 체포, 구금」(『동아 일보』, 1949. 1. 26)
  • 「부산 무구에 23명 출마」(『경향 신문』, 1952. 1. 13)
  • 「기소 사실 전적 부인, 이만우 씨 사건 공판」(『경향 신문』, 1956.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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