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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나혜석 그녀에 관한 모든 것.(삶과 그림)
ab**** 조회수 27,351 작성일2006.03.31

나혜석에 관해서 궁금합니다.

그녀의 살아온 연대별 삶은 있는데..

그 때 마다 그렸던 그림들이 안나와있어서요...

그녀의 그림을 보려면 어느 사이트에 들어가면 있는지요?

논문때문에 그러는데..'

꼭 좀 답변 부탁드릴게요..

 

그녀의 삶과 관련하여 화법의 변화를 보려고 하는거라.. 그림이 중요합니당...

아시는 분 꼭 가르쳐주세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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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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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 여류서양화가, 여권운동 선구자, 진보적 사회사상가

호는 정월, 군수기정의 딸. 경기도 수원 출신.
1896년 4월18일 수원의 부유한 개명 관료 나기정의 5남매중 차녀로 태어났다. 서울 진명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13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유학시절 1914년에 유학생 동인지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이라는 최초의 글을 발표하고 근대적 여권을 주장하였다.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다.

1918년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서울에서는 첫 번째로 개인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유화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데 힘썼고 초창기 「이른 아침」(早朝)과 같은 목판화로 민중의 삶을 표현했으며, 1922년부터 1932년까지 해외 여행을 떠났을 때를 빼고는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을 한 재주 있는 화가였다.

미술 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소질이 있던 그녀는 동경유학시절부터 여성이 각성하여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근대적인 여권신장에 관한 글을 발표했고, 1918년 '여자계'에 그렇게 살기 위해서 여성들이 살림살이를 개량하는 구체적 방법까지 담은 여러 논설들과 신여성이 주변의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해 가는 과정을 담은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뚜렷한 여성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폐허> 동인을 구성하여 김억, 오상순, 염상섭, 김일엽과 함께 문학 활동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여학생들을 만세운동에 참가시키기 위해 김활란, 박인덕, 신준려, 김마리아 등과 함께 이화학당에서 비밀 회합을 가진 죄로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중국 단둥에서 외교관 부인 신분을 이용해 독립운동가들을 비밀리에 지원한 민족주의자였다. 특히 나혜석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주장을 글로 썼을 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을 생활 속에서 온몸으로 실천해 나간 진보적인 여성 해방의 사상가였다.

일본 유학시절 좋은 혼처가 나섰으니 공부를 그만 두라는 아버지에게 맞서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했으며,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하였으며 결혼식전 당시는 파격적으로 신문지상의 자신의 약혼식 발표를 하기도 하였으며, 결혼식 때는 예술활동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남편에게 받아내었고, 화가로 3남매의 어머니로 거기다가 외교관의 아내로 어느 하나도 소홀함이 없이 잘 해내었던 능력 있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모든 역할을 잘 해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던 나혜석은 자신의 그림이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과 아내의 예술활동에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는 남편이 예술 세계를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가중한 가사노동에 지치기 시작했고, 이에 1927년 남편과 함께 3년간의 유럽과 미국 등 세계일주 여행을 시작하였다.
여행중 파리 등에서 나혜석은 서구 여성들의 좀더 인간생활을 위한 노력을 목격하고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새로운 그림의 세계에 눈떠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예술을 논할 수 있었던 남자 최린과 사랑에 빠졌고 귀국 후 아이들을 두고 이혼을 하였다. 이혼을 하고 나온 후 나혜석은 제10회 선전에서 <정원>으로 특선을 수상하였고, 다음해에 세계 일주 기행문인 「구미유기(歐美遊記)」를 『삼천리』지에 연재하였다. 1933년에는 미술연구소인 '여자미술학사'를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했으며, 1년 뒤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발표하면서 당시의성의 억압철폐, 여성의 자유실현 등 기존의 인습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1937년 무렵부터 방랑생활에 빠져들었고 1946년에 행려병자로서 불우한 삶을 마쳤다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비난에 맞닥뜨리게 되면서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정조관념을 지키라고 하는 사회 관습을 비판하고 나아가 그런 관념은 상대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해체되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주장을 펼쳤다.

현모양처가 여성의 모범상으로 굳어버린 시대에 자기의 예술을 추구하다가 이혼을 당하고 빈몸으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한 여성을 파멸로 몰아 넣은 두 남자와 그들 남성이 멀쩡하게 행사하도록 하는 사회 관습에 도전한 나혜석이 연 전람회에 대한 조선사회의 반응은 차가웠고, 사회의 냉대속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나혜석의 심신은 서서히 병들어 갔다. 화재로 그림을 태워 먹고 아이들을 보지 못하게 된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반신불수의 몸이 된 나혜석은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절집들을 떠돌아 다녔고, 해방 후에는 서울의 한 양로원에 맡겨졌으나 그는 걸핏하면 몰래 빠져 나왔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쌀 때면 늘 기운이 솟아오른다고 했던 나혜석은 어느 날 양로원을 나선 뒤 종적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그의 무덤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나혜석은 여자도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온몸으로 살아간 화가이며 민족주의자이고 여성해방론자였다.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의 진보가 조선 여성의 진보가 될 것이라는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인간적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고 봉건적이고 인습적인 관념의 억압성을 드러내어 해체하는 글들을 써서 사회의 비난을 자초하면서도 시대를 앞서 살아갔던 나혜석은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여성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 나혜석의 회화는 시기별로 화풍이 다르게 나타난다. 동경유학이후부터 세계일주 이전까지의 작품(1918-1926)은 일본에서 습득한 아카데미즘과 인상파가 절충된 화풍을 보인다. 세계일주 및 유럽체류시기 작품(1927-1929)경향은 인상파 화풍위에 야수파 화풍과 입체파 화풍이 함께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귀국이후의 작품(1930-1935)은 인상파 화풍의 작품과 파리시절의 스케치로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작품 그리고 기법면에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등 다양한 경향이 보인다. 대표작으로는 <자화상>, <스페인의 풍경>, <파리풍경>등이 있다.

2006.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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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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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蕙錫, 1896.4.18~1949]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제1회부터 제5회까지 입선하였고,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건물 안의 내청각에서 한국 여성화가로서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다. 또 소설가로도 활약하였다.

 

- 성장과정;

신문학을 존중하는 개화되고 부유한 가정에서 기정의 5남매 중 네번째로 출생,

자매중에는 2번째 딸로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 작품의 연관성

 

도쿄 조선인 유학생 잡지「학지광」3호에 최초의 글 「이상적 부인」을 1914년 12월(18세)에 발표.

당시 일본에서는 여성문예동인지 「청탑」을 중심으로 여성해방론과  신여성 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나혜석도 그러한 지적 자장 안에서 글쓰기를 시작.

 

 

- 학력 ;및 경력

1910[14세]6월 삼일여학교. ( 매향여자경영정보고등학교로 바뀜)졸업.

 

1913(17세)3월 28일 경성 사립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수 졸업

1913.4월 15일  일본도쿄 '사립 여자 미술학교' 서양화부 선과 보통과 1학년(4년 과정)에 입학

 

1915 (19세)여주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1년간 근무

 

1917(21세)3월 학지광에 「잡감」을 발표.

7월 「학지광」에 「잡감-K언니에게 여함」발표.
7월 도쿄 여자친목회의기관지인 「여자계」창간호에 소설을 발표했을 것으로 추측.

 

1918(22세)3월 「여자계」2호에 단편 소설 「경희」발표. H.S란 이름으로 시「광(光)」도 발표.

1918(22세) 일본 도쿄[]여자미술학교 유화과를 졸업

4월 귀국 후 진명여학교에서 교편.

8월 경에 건강이 안 좋아 그만 두고 집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
9월 「여자계」3호에 단편 소설 「회생한 손녀에게」발표
 
1919(23세) 1월 21일~ 2월 7일까지

「매일신보」에 '섣달 대목'이란 주제로 5회.

 '초하룻날'이란 주제로 4회, 모두 9점의 만평을 연재함.

 

3월초 서울의 신마실라(이화학당 교사), 박인덕(이화학당 교사), 신준려(이화학당 교사), 황에스터(黃愛施德, 호적명 황애덕,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마리아(정신여학교 출신 동경유학생)등과 이화학당 지하실에서

비밀 회합을 가지며 3.1운동에 여학생 참가 계획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었다.
8월 4일 5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경성지방법원의 「면소 및 방면」결정으로 풀려남. 풀려 난 뒤 정신여학교 도화(미술)교사로 재직.

 

1920(24세)9월 조선노동공제회의 기관지인 「공제」창간호에 판화 <조조(早朝)>를 발표했다.
4월「신여자」제2호에 판화 <저건이 무엇인고> 발표.
4월 10일  정동 예배당에서 김필수 목사의 주례로 김우영과 결혼

여름, 첫 딸 나열을 임신,정신여학교를 그만 둠.
6월 김우영과의 약혼시대를 회상한 「4년 전의 일기 중에서」를 신여자 제4호에 발표(3월 집필).
동지에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을 그린 4장의 목판화를 발표.

 

1921(25세)1월 「폐허에 시「사(砂)」, 「냇물」발표
2월 「동아일보」에 「회화와 조선여자」발표
3월 19∼20일 임신 9개월의 무거운 몸으로 경성일보사(조선총독부의 일어판 기관지로 한글판은  매일 신보)

내청각에서 유화 70 여점의 개인전람회 염.

4월  1∼3일 제1회 서화 협회전람회(協展)에도 유화를 출품했다.
"매일신보'가  입센의 희곡을 「인형의 가(家)」란 제목으로 번역 연재하면서 제일 마지막회에 나혜석에게 가사를 지어줄 것을 청탁하여 4월 3일자 신문에 노래 가사 「인형의 가」를 발표.

(이 가사에는 김영환이 작곡한 악보가 함께 실렸다.)

4월 29일  첫 딸(나열)을 낳았다.
7월 「신가정」에 소설 「규원(閨怨)」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제2호에 계속  연재될 예정이었으나 「신가정」 제2호가 나오지 못함으로써 미완상태다.
7월 「개벽」에 판화 <개척자>발표.
9월  김일엽의 「부인 의복 개량에 대하여 한 가지 의견을 드리나이다」에 반박하는 글 「김원주 형의 의견에 대하여 - 부인의복 개량문제」를 「동아일보」(9.21-10.1)에 발표.

 

1922(26세)
3월 안동현에 여자야학 설립을 주도했다.
6월 조선총독부 주최의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유채수채화 분야에 출품 <봄><농가>가 입선했다.

 

1923(27세)
 1월 첫딸을 나열을 임신해서 낳아 돌이 될 때까지의 심리적 육체적 변화를 솔직하게 기록하면서 '모성'의 신화를 부정한「모(母)된 감상기」(「동명」 1923.1.1-1.21)를 발표했다.
3월 백결생이 「모된 감상기」를 비판하는 「관념의 남루를 벗은 비애」를 발표하자 이에 반박하는 글 「백결생에게 답함」(「동명」1923.3.18)을 발표했다.
3월 부터 터진 의열단 사건(황옥 경부사건)에 나혜석 김우영 부부가 도움을 주었다는 회고가 있음.
6월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봉황성의 남문>이 4등, <봉황산>이 입선했다.
6월 부잣집 아들과의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한 기생 강명화의 자살에 대한 시론 「강명화의 자살에 대하여」(「동아일보」1923.7.8)발표.
9월 고려 미술회에 발기 동인으로 참가(정규익, 박영채, 나혜석, 강진구, 백남순)
11월 「신여성」에 「부처간의 문답」발표 염상섭의 단편소설집 「견우화」에 표지 그림 <견우화>를 그림
 
1924(28세)
 6월 제3회 조선미전에 <추의 정> 4등, <초하의 오전>이 입선했다.
7월 「만주의 여름」(「신여성」1924.7)발표. 「1년만에 본 경성의 잡감」(「개벽」1924.7)발표. 미전을 위해 오랜 만에 서울에 온 감상을 기록한 것임.
8월 「나를 잊지 않는 행복」(「신여성」1924.8) 발표,
이해 말엽에 첫 아들 선(宣) 낳음.
9월 일본 외무성의 관리로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만주로 이주. 사택에서 살기 시작.


1926(30세) 1월 자신의 육아 경험을 「내가 어린애 기른 경험」(「조선일보」1926.1.3)으로 발표,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 생활 개량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음 「생활개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동아일보」1926.1.24-30)을 발표했다.
4월 소설 「원한(「조선문단」1926.4)발표.

 

5월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천후궁(天后宮)>이 특선, <지나정(支那町)>이 입선했다.
자신의 창작 과정을 쓴 「미전 출품 제작 중에」(「조선일보」1926.5.20-23)발표.
6월「내 남편은 이러하외다」(「신여성」1926.6)발표

12월 19일 둘째 아들 진(辰)낳음.
 
1927(31세)
 봄, 만주 안동현의 살림을 정리,구미 여행 준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봄의 오후>가 무감사 입선

「경성 온 감상의 일편」(「동아일보」1927.5.27)발표.

6월19일 부산을 출발하여 구미 여행길에 오름(나열, 선, 진의 세 아이는 칠순의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7월 파리에 도착.

김우영은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가고 나혜석은 파리에서 야수파의 화가인 비시에르의 화실에 다니면서 그림 공부를 했다.
10월 최린이 파리에 와서 한국유학생들이 주최한 환영회에서 처음 최린을 만났다.

 

1928(32세)7월 영국을 관광하고 영국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가했던 여성으로부터 영어를 배우면서 여성 참정권 운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9월 17일 미국을 향해 파리를 떠났다. 파리의 비시에르의 화실에서 그림 공부를 하면서 나혜석의 그림은 야수파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유럽여행중의 소산으로 <스페인 국경>, <스페인 해수욕장>, <무희>, <파리 풍경>, <나부>등의 유화가 남아 있다.
 

1929(33세)
 2월 1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항을 떠나 하와이를 거쳐 17일 만인 3월 3일에 요코하마항 도착.

1주일 정도 도쿄에 머무른 뒤 3월 12일. 부산에 도착함.

동래 시댁에서 삶,김우영은 무직자로 변호사 개업준비를 하느라고 서울에 머물러 있음.

6월 20일 셋째 아들 건(健)을 낳음.

8월 「별건곤」에 기자 차상찬이 쓴 탐방 기사 「구미를 만유하고 온 여류화가 나혜석 씨와의 문답기」가 실렸다.
9월 23-24일 이틀간 수원성 내 남수리 불교 포교당에서 '구미사생화 전람회'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구미 여행중 그린 그림과 수집한 그림(복제품)을  함께 전시

 

1930(34세)
 1월 김우영은 서울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으나 경제적으로 곤궁했고 파리에서  있었던 나혜석과 최린의 연애에 관한 소문이 조선 사교계에 퍼져 나가면서 나혜석과 김우영의 관계가 악화.

 

3월말 구미 여행담을 쓴 「프랑스 가정은 얼마나 다를까」(「동아일보」3.28-4.2)발표. 이후 수 차례 나혜석은 구미 여행기를 쓴다.
4월 「구미시찰기」(「동아일보」1930.4.3-4.10)발표.
6월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딸 나열이 갓난 아들 건을 업은 그림<아이들>과 파리의 풍경을 그린 <화가촌>이 입선했다.
6월 인터뷰 「우애결혼, 시험결혼」(「삼천리」1930.6)에서 이혼의 비극을 예방하기 위해 시험결혼이 필요하며, 시험결혼기간 동안에는 산아제한이 필요하다는 조선의 인습을 뛰어넘는 발언을 하고 있다.
7월 「파리에서 본 것, 느낀 것」(「대조」1930.6.7합병호)발표
9월 「젊은 부부」(「대조」1930.9)발표 이 무렵 김우영은 서울에서 이미 다른 여성과 살림을 차리고 나혜석에게 이혼을 요구.나혜석은 만주 봉천에서 살고 있는 오빠 나경석에게 가서 잠시 머물렀다.
11월20일 김우영은 이혼신고서를 부청에 제출, 이혼이 성립됨.

 

1931(35세)
 2월 김우영은 변호사 일이 잘 되지 않아 일본인 친구(宇桓 총독의 비서관)의 도움으로 다시 일제의 관료로 들어갔다.
전라남도 이사관이 되어 전남광주로 갔다. 이후 1940년까지 김우영은 광주에 살면서 산업부의 산업과장, 상공과장, 수산과장, 농촌진흥과장을 지냈다.
5월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정원>이 특선, <작약>과 <나부>가 입선했다. <정원>특선 소식은 이혼 후의 나혜석에게 큰 기쁨과 힘이 되었다.
여름, 선전 특선에 용기를 얻어 일본 문부성이 주최하는 '제국미술원전람회'에 도전할 생각으로 여름 1달동안 금강산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다.
10월 일본 제12회 제전(帝展)에 <금강산 삼선암>과 <정원>을 출품, <정원>이 입선했다.
11월, 도쿄에 있으면서 제전 입선 후의 소감인 「나를 잊지 않는 행복」(「삼천리 」1931.11)을 발표했다. 이미 한번 발표했던 글이나, 이혼 후 전업화가로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덧붙이고 있다.
 
1932(36세)
 1월,「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삼천리」1932.1)발표.
4월 일본에서 돌아와 잠시 중앙보육원에서 미술 교사로 근무함. 「파리의 모델과  화가 생활」발표(「삼천리」1932.3-4)
6월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소녀>, <금강산 만상정>, <창가에서>가 무감사 입선되었다. 그러나 이미 조선 미전 특선, 제전 입선의 경력을 가진 나혜석으로서는 그리 영광스러운 일은 아니었고 나혜석의 그림에 대한 평도 그리 좋지 못했다. 나혜석 또한 미전 제도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글을 썼다.
7월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 총평」(「삼천리」1932.7)「앙데팡당 식이다 - 혼미 저조의 조신미술전람회를 비판함」(「동광」1932.7)을 발표했다.
여름, 다시 금강산 해금강에서 가을의 제13회 제국미술원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그림을 3,40점 그렸는데 머무르고 있던 집에 불이나 10여점밖에 건지지 못해 애통해하고 이때의 충격으로 몸도 아프게 되었다.
12월부터 1934년 9월까지 「삼천리」지에 9번에 걸쳐 구미 여행의 기행문 「구미 유기」를 연재했다.
 
1933(37세)
 1월 분주했던 결혼 생활을 회상한 「화가로 어머니의 나의 10년간 생활」(「신동아」1933.1)발표. 구미 여행시 베를린에서 맞았던 정월 풍속을 소개하는 글 「베를린의 그 새벽」(「신가정」1933.1)발표.
2월 4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146의 15호에 '여자미술학사'를 열었다. 이혼과 화재 의 심적 타격으로 수전증이 생겨 왼팔의 부자유를 느끼면서도 미술 개인 지도를 하는 한편 주문을 받아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모델」(「조선 일보」1933.2.28)을 발표.


4월 죽은 지 17년이 된 애인 최승구를 추모하는 글 「원망스런 봄밤」(「신동아」1933.4)을 발표.
5월 「파리의 어머니 날」(「신가정」1933.5)발표.
5월의 제1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2점 출품할 예정이라고 했는데, 출품을  하지 않았는지 입선하지 못했는지 입선자 명단에 나혜석의 이름은 찾을 수 없다. 이후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나혜석의 그림을 볼 수 없게 된다. 대신 선전에 대한 평인 「미전의 인상」(「매일신보」1933.5.16-5.21)을 썼다.
10월 「연필로 쓴 편지」(「신동아」1933.10)을 발표. 도쿄 유학시절 일본인 화가 사또가 자기를 연모하면서 일어났던 사건을 회상하여 쓴 것임.
12월 자전적 장편소설 '김영애'를 써서 이광수에게 보이려고 발표를 주선해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하나 발표되지는 않은 것 같다. 개성 <선죽교>를 그림.
 
1934(38세)
 1월 4일 「조선중앙일보」현상 공모 '우스운 이야기'부문에 「떡 먹은 이야기」가 당선되었다. 상금은 2원이었다.
2월 「밤거리의 축하식 - 외국의 정월」(「중아」1934.2)를 발표, 「베를린의 그  새벽」과 유사한 내용이다.
3월 「다정하고 실질적인 프랑스 부인 - 구미 부인의 가정 생활」(「중앙」1934.5)발표. 수원에서 삼일 여학교를 다니던 시절 삼일학교를 다녔던 남학생에 얽힌 추억담이다.
7월 「여인 독거기」(「삼천리」1934.7)발표.
8월 1932년 여름 총석정 해변에서 만난 구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총석정 해변」(「월간 매신」1934. 8)을 발표했다.
8-9월 「이혼 고백장」(「삼천리」1934.8-9)을 발표했다. 김우영을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기까지의 개인적인 생활과 심경을 솔직하게 쓰고,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정조관념을 비판화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9월19일 변호사 소완규를 통해 최린에게 정조 유린에 대한 위자료 12,000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이 사실이 9월 20일자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최린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의 기사는 삭제되었고, 나혜석은 소송 취하조건으로 최린으로 부터 수천원을 받았다고 한다.
 
1935(39세)
 2월 「신생활에 들면서(「삼천리」1935.2)를 발표했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가 얽혀 있는 조선을 떠나 미래를 향해 다시 파리로 가고 싶다는 희망과 의지를 담은 글이며, 이혼 후 자신이 겪은 조선 사회의 인심을 비판하면서 인습에 얽매인 정조관념의 해체라는 한 시대를 앞선 주장을 했다.
3월 시「아껴 무엇하리 청춘을」발표 (「삼천리」1935. 3) 이해 봄, 수원 서호 근처에 집을 마련하고 약을 먹고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파리에 가고 싶다고 하던 나헤석이 파리에 가지 못하고 수원에 거처를 마련한 이유는 경제사정 등 여건의 불비함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몇 년 간 아이들을 보지 않고 살 수는 없어서 였다.
6월 「삼천리」에 「구미여성을 보고 반도 여성에게」와 「이성간의 우정론-아름다운 남매의 기」발표.
7월 「나의 여교원 시대」발표. 10월 「독신여성의 정조론」(「삼천리」1935.10)발표.
10월 24일 서울 진고개(지금의 충무로)의 조선관 전시장에서 '소품전'을 개최. 200여점을 전시했으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첫 아들 선, 폐렴으로 열 두 살의 나이로 요절.
11월 희곡 「파리의 그 여자」(「삼천리」1935.11)발표. 구미여행 당시 있었던 일과 조선에 와서 다시 최린을 만났던 일을 소재로 한 희곡이다.
 
1936(40세)
 1월 「영미 부인 참정권 운동자 회견기」(「삼천리」1936.1)
4월 「런던 구세군 탁아소를 심방하고」(「삼천리」1936. 4)「프랑스 가정은 얼마나 다를까」(「삼천리」1936. 4)
12월 소설 「현숙」발표

이혼 후 이 무렵까지 그린 것으로 <수원 서호> <인천풍경> <별장> <화령전작약> 등의 그림이 남아 있다.
 
1937(41세)
 5월「나의 도쿄 여자 미술학교 시대」(「삼천리」1937.5)를 발표.
10월 소설「어머니와 딸」(삼천리)을 발표했다. 이혼 후 하숙하고 있던 집에서의 경험을 소재로 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하숙집 주인 여자가 딸을 시집 보내려  하나 신식 공부한 딸이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아 일어나는 갈등을 그린 소설이다. 이 해 언젠가 시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동래로 달려갔으나 김우영의 완강한 거부로 상청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이 해 말, 김일엽을 찾아서 수덕사 견성암으로 갔다. 1943년까지 주로 수덕사 밑의 수덕 여관에 몸붙여 있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또 해인사, 다솔사 등.....

 

-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가

약 2년간의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 파리에서 약 8개월을 머무르며 야수파와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신문학을 존중하는 개화되고 부유한 가정의 영향을 받았으며,이미 일본 유학길에서 근대적 여성 의식에 눈을 떴었고 자아 의식을 갖고 있엇으며 작품세계를 제대로 이해 받기 전에 기구한 삶과 도드라진 만평 글,언행으로

더 외면 당하고 후일에 와서야 유명해졌습니다.

 


 

 

- 사상적 배경

이혼 후 자신이 겪은 조선 사회의 인식을 비판하면서 인습에 얽매인 정조관념의 해체라는

한 시대를 앞선 주장! 하는 희망과 의지가 아니였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의 인습적인 도덕관에 저항하는 자신의 입장을 강변하는 글을 발표했으나 보수적인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

행려병자로 쓸쓸히 인생을 50세의 나이로 마감한 것으로 보아도....

2008.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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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신문학을 존중하는 개화된 가정에서 기정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도쿄에 유학중이던 오빠 경석의 권유로 1913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유화를 전공했다. 유학시절에는 최승구·이광수와 사귀면서 동경 유학생 동인지였던 〈학지광〉에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이상적 부인〉 등의 글을 발표했다. 1918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함흥 영생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를 지내다가 3·1운동에 참가 후 체포되어 수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고, 남편의 도움으로 1921년 서울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첫 전람회를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서양화전시회로, 〈매일신보〉의 기사에 의하면 "낙역부절하여 인산인해"(絡繹不絶人山人海)였다고 한다. 1923년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된 남편을 따라 만주에 거주했다. 1927년 모스크바를 거쳐 프랑스·영국·이탈리아·스페인 등을 여행하면서 미술관과 박물관을 견학하고 파리에서는 야수파 계열의 그림을 그렸다. 제1~11회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9번 출품하여 제3회 때 〈가을의 정원〉으로 4등상, 제4회 때 〈낭랑묘 娘娘廟〉로 3등상, 제5회 때 〈천후궁 天後宮〉으로 특선을 받았다. 유럽 여행중 사귄 최린과의 만남이 문제가 되어 귀국한 뒤인 1931년 이혼했다. 그뒤 사회의 인습적인 도덕관에 저항하는 〈우애결혼, 실험결혼〉·〈이혼고백서〉 등 자신의 입장을 강변하는 글을 발표했으나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되었다. 1935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그뒤 수덕사·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유랑생활에 들어가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다. 1946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다.

 

[작품세계]

그녀의 작품은 크게 1918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 때부터 1927년 무렵 만주 봉천 시기까지, 유럽 체류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그리고 미술활동을 거의 중단한 이후의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에는 사실주의적 경향의 작품을 그렸다. 1924년 판넬에 제작한 〈만주 봉천 풍경〉은 안정된 구도에 색채의 표현이 부드럽고,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어, 서양화 도입 초기의 사실주의적이고 인상주의적인 화풍을 견고하게 다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유럽 여행을 통해서는 활달한 필치와 과감한 표현으로 점차 바뀌어갔다. 〈자화상〉(1928)에서는 강한 색채의 대비적 효과를 살린 표현기법으로, 〈스페인 해수욕장〉(1928경)·〈불란서 마을 풍경〉에서는 거침없는 필치에 자유분방한 기법으로 야수파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1931년 이혼 이후 생활과 정신의 불안정을 반영하듯 작품에는 생동감과 활발함이 사라졌으며 작품창작도 거의 하지 않았다. 죽은 뒤에 그의 글을 모아 〈날아간 청조〉·〈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등이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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