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깊이보기]독재자 전 부인과 손 잡은 라이베리아 ‘축구 영웅’ 조지 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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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로 나선 라이베리아 축구영웅 조지 웨아가 대선 1차투표가 열린 지난 10일(현지시간) 수도 몬로비아 투표소에서 투표한 뒤 빠져나가고 있다. 몬로비아|AP연합뉴스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전부인을 러닝메이트로 지목할 수 있겠는가? 이라크와 리비아 그리고 우간다에서 사담 후세인과 무아마르 카다피, 이디 아민의 전부인을 러닝메이트로 지목할 수 있겠는가?”

지난 1월 라이베리아 일간 프런트페이지아프리카에 실린 기고문의 일부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라이베리아 출신 언론인 제리 위온이 썼다. 위온은 라이베리아 ‘축구 영웅’ 조지 웨아(51)가 대선에 도전하면서 부통령 후보로 찰스 테일러 전 대통령의 전 부인 쥬얼을 지목한 것을 거세게 비판했다. 그는 테일러를 히틀러, 후세인과 비교하며 “웨아의 선택에 전적으로 실망했다”고 적었다.

■독재자와 손잡은 축구영웅

테일러는 라이베리아 무장군벌 출신으로 자신의 나라와 이웃국 시에라리온을 참혹한 내전으로 몰아넣은 전쟁범죄자다. 1989년 ‘국민애국전선(NPFL)’ 반군을 결성해 내전을 일으켰고, 다이아몬드 이권을 위해 시에라리온 반군도 지원했다. 1996년 그는 다른 군벌들을 제압했다. 이듬해에는 대선에서 승리해 대통령이 됐다. 당시 테일러의 선거 구호는 “그(테일러)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투표한다”였다.

테일러 취임 2년 만인 1999년 또 다른 반군 세력들이 들고 일어서면서 내전은 다시 시작됐고, 반군에 포위된 테일러가 나이지리아로 망명한 2003년까지 이어졌다. 20여년간 2차례에 걸쳐 이어진 내전으로 적게는 50만, 많게는 100만명 가까운 사람이 숨진 것으로 추산된다. 위온이 테일러를 히틀러, 카다피, 아민과 비교한 것도 크게 무리가 아니다.

이후 테일러는 망명지 나이지리아에서 추방됐고, 2006년 체포됐다. 2012년 유엔이 설치한 특별전범재판소에서 징역 50년형을 선고받았다. 테러, 살인, 성폭행, 성노예 등 성범죄, 소년병 이용 등 11가지 혐의에서 유죄가 인정됐다.

라이베리아 전 대통령 찰스 테일러.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을 내전으로 몰아넣어 수십만 명을 희생시켰다.

그런 테일러의 전 부인을 웨아가 러닝메이트로 지목했다. 웨아가 테일러 본인과 직접 연결돼 있다는 의혹도 나왔다. 테일러 재판 당시 유엔 특별전범재판소 조사위원장을 맡았던 앨런 화이트는 지난해 11월 미국의소리(VOA) 인터뷰에서 “웨아가 수감 중인 테일러와 대화를 나눴다. 테일러는 대선에서 웨아를 지지하기로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웨아는 지난 3월 테일러와 전화통화한 사실을 인정했다.

웨아는 유럽에서 활동하던 선수 시절부터 조국의 평화를 위해 애써온 인물이다. 테일러가 집권 중이던 1996년 라이베리아 내전 종식을 위해 유엔군 개입을 호소하기도 했다. 당시 웨아는 테일러의 무장세력이 유엔군 개입 호소에 대한 보복으로 수도 몬로비아에 있는 자신의 집을 습격했고, 사촌 2명을 성폭행했다고 주장했다. 프런트페이지아프리카는 웨아 본인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 조국으로 들어가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넬슨 만델라를 만나 정치적으로 각성했다”는 ‘평화의 전도사’ 웨아가 이런 악연까지 있는 과거의 독재자와 손잡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를 사랑한다면 내 전 부인에게 투표하라”

테일러는 지금 영국 더럼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하지만 라이베리아에서 그의 영향력은 아직도 상당하다. 특히 그의 근거지인 봉 카운티 주민들 가운데는 지금도 테일러를 ‘자유를 위해 싸운 투사’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2014년 이곳에서 상원 선거에 출마한 쥬얼은 선거 기간 표를 얻기 위해 테일러의 녹음된 목소리를 이용했다.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면, 내 전 부인 쥬얼 하워드 테일러에게 투표하라. 쥬얼이 당선되면 나도 감옥에서 나갈 수 있다”는 테일러의 목소리가 지역 방송을 타고 주민들에게 전해졌다. 쥬얼은 선거에서 승리했다. 프런트페이지아프리카는 테일러의 목소리가 지역 유권자들의 열띤 반응을 이끌었고, 선거 전환점으로 작용했다고 보도했다.

대통령 후보 조지 웨아(왼쪽사진)와 부통령 후보 쥬얼 하워드 테일러.

웨아가 쥬얼을 러닝메이트로 지목한 것 역시 테일러로 쏠리는 이런 표심을 잡기 위한 선택으로 보인다. 웨아의 대선 도전은 벌써 3번째다. 2005년 대통령 후보, 2011년 부통령 후보로 선거에 나섰지만 연이어 패배했다. 그의 권력 의지는 확고하다. 두 차례 선거에서 상대 진영이 웨아가 대학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공격하자 미국 유학길에 올라 2013년 경영학 석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대권 도전을 위해서였다.

웨아는 지난 10일(현지시간) 치러진 대선 1차투표에서 39.0%를 득표해 1위로 결선에 올랐다. 앞서 두 차례 대선에서 모두 승리한 앨런 존슨 설리프 현 대통령이 3선 금지 원칙에 따라 이번 대선에 나서지 못한 상황이라 그 어느 때보다 웨아의 당선 가능성이 높다. 웨아는 1차투표를 마치고 지역 방송에 출연해 “그 무엇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승리를 확신한다”고 말했다.

■웨아가 이기면 테일러가 돌아온다?

웨아는 테일러와 연계돼 있다는 의혹을 부인한다. 전화통화는 “지지자 모임에 테일러의 친척이 있었는데, 그가 테일러에게 전화를 걸더니 내게 바꿔줬다”면서 “그저 안부를 물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웨아는 “전직 지도자는 합당한 예우를 받아야 한다”면서 “설리프 현 대통령이 퇴임하면 그에게도 똑같이 할 것”이라고 말했다. 쥬얼을 러닝메이트로 지목한 것 역시 “쥬얼이 적임자다. 그의 능력만 봤다”면서 테일러를 의식한 선택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테일러와 개인적인 관계는 없다”고 잘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의구심이 남는다. 부통령 후보 쥬얼이 득표에 도움이 된다 해도, 당선 이후에는 오히려 짐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아일랜드 일간 아이리시타임스는 한 외교관을 인용해 “웨아가 당선되면 테일러와 연계돼 있다는 주변의 인식부터 극복해야 할 것”이라며 “그와 테일러의 관계를 걱정하는 나라가 많다”고 보도했다. 위온은 프런트페이지아프리카 기고에서 웨아가 러닝메이트 쥬얼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고립될 수도 있다고 적었다.

웨아가 당선 이후 쥬얼과 함께 테일러의 감형과 라이베리아 복귀를 위해 나설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대선 기간 쥬얼은 “테일러는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였다. 그는 가족의 중심이었다”면서 테일러가 라이베리아로 돌아와 자녀들과 함께 살 권리가 있다고 발언했다. 현지 일간 두코르포스트는 “쥬얼은 부통령 당선 후 전남편의 라이베리아 복귀를 위해 뭐든지 하기로 결심한 것 같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11월 VOA 인터뷰 당시 화이트는 “테일러가 은닉한 재산은 수백만 달러에 이른다. 누구든 대통령이 되면 그의 형기를 줄이고 그를 라이베리아로 데려오려 애쓸 것이라는 의혹이 있다”고 말했다. 쫓겨나기 전 테일러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나는 돌아올 것이다”였다.

물론 전쟁범죄로 수감된 테일러의 감형이나 석방 가능성은 높지 않다. 라이베리아 주재 유럽연합(EU) 대사관은 우려에 대해 “찰스 테일러는 특별전범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50년형을 선고받았다. 라이베리아 대통령이 바뀐다고 이 선고가 무효화될 수는 없다”고 못박았다. 웨아와 쥬얼이 선거 승리를 위해 비현실적인 테일러 석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그러나 최소한 웨아와 쥬얼 당선 이후 감옥 안 테일러가 라이베리아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다. 대선기간 쥬얼은 “테일러가 1997년 대선 때 약속했던 정책들은 갑작스런 체포로 이뤄지지 못했다”면서 “당선 되면 그것들을 다시 테이블 위로 올리겠다”고 말했다. 두코르포스트는 “쥬얼과 그 지지자들은 테일러를 감옥에서 빼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다. 성공하든 못하든 테일러는 라이베리아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쥬얼이 부통령이 되면 그는 분명히 테일러의 이념을 정치에 적용할 것”이라고 적었다.

<심진용 기자 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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