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3월15일, <한겨레> 방송연예면에는 머리기사로 ‘고문기술자 드라마 만든다’(김도형 기자) 제목 아래 이근안과 고석만의 사진을 나란히 실었다. ‘수배 중인 전직 대공수사관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만들어진다. 마치 현재 7년째 도피 중인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을 설정한 것처럼 비쳐지는 이 드라마는 문화방송에서 6·25 특집극으로 기획 중이다. … <제3공화국>과 <땅>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품을 만든 고석만 프로듀서가 제작중인 6·25 특집 60분짜리 2부작 <현악 6중주>(극본 김상열)는 수배 중인 전직 대공수사관 유철주라는 인물의 궤적에 초점을 맞춘다. 현실에서 이근안 경감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행방이 묘연하지만 드라마 속의 유철주는 천형의 땅 르완다에 있다. 르완다와 자이르의 접경지대인 키붐바 난민촌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콜레라에 걸려 탈수 증세를 보이는 58살의 한국인. 한때 사명감에 불타 빨갱이를 잡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정권안보 지상주의자가 이제는 쫓기는 몸이 되어 아프리카의 르완다라는 지구의 끝으로 흘러들어 왔다.’
기사는 이어진다. ‘마지막 남은 생을 정리하기 위해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르완다로 몸을 피해 온 그는 한국인 의료봉사대원 준식과 르완다의 현장을 취재 중인 파리특파원 노 기자의 눈에 띈다. 여권을 불태우는 등 신분을 철저히 감추지만 결국 정체가 탄로난 그는 마침내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침묵으로 일관한다. 여기에 그의 행적을 쫓는 두 사람의 여자가 등장한다. 어둠의 시대에 운동권 아들을 잃은 민가협 어머니 박 여사와 유철주의 딸 미란이다. 서울~파리~르완다를 잇는 이들의 만남과 고통·회한·속죄 속에 전직 대공수사관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감한다.’(캐스팅을 한다면, 전직 대공수사관에는 최불암, 미란 역에 황신혜를 떠올렸다. 최불암과 황신혜.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울리는 조합이다.) ‘고 프로듀서는 “좌와 우의 대립 등 대결구조를 극복하고 조화의 시대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번 작품을 기획했다”면서 “민족분쟁 현장인 르완다를 통해 6·25 전쟁의 의미를 반추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 기사 말미에는 기대와 우려도 덧붙였다. ‘이 드라마는 이근안을 연상시키는 전직 대공수사관이라는 파격적인 인물 설정뿐 아니라 우리나라 드라마 사상 최초의 아프리카 현지촬영, 대사가 한마디도 없는 주인공 등 풍성한 화젯거리도 제공할 예정이다. 거기다 고석만이라는 이름값도 이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의 기대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수배중인 전직 대공수사관과 르완다라는 드라마의 두 기둥이 서로 성기지 않고 어울려 소화될지 주목된다. 또 6·25 특집극이라는 형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이념의 허망함을 드라마 속에서 충분히 표현해낼 수 있도록 방송사 안팎의 여건이 보장될 수 있을지도 관심거리다.’
실내악 ‘현악 6중주’는 바이올린·비올라·첼로 2대씩 모두 6대의 악기로 구성된다. 김상열 작가가 <현악 6중주>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실제로 6개의 시추에이션으로 구성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앙상블’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을 것이다. ‘현악 6중주’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브람스의 ‘현악 6중주 제1번’이 널리 알려져 있다. 브람스 실내악의 본령이라 할 것이다. 제1악장은 교향곡풍이다. 1865년 꽃다운 나이의 두 여인을 위한 사랑의 곡이다. 민요풍이며 감성적인 ‘길고 센티멘털한’ 작품이다. 두 여인을 주제로 쓰고 싶었다고 전해지는 ‘4악장’은 드라마틱한 론도와 행진곡풍으로 경쾌하다. 하이든을 떠올리게 한다. 제1악장은 종반으로 치달으며 현란하고 절정 감동을 일으킨다. “아! 이런 브람스라니?” 감탄하게 한다. 훗날 사람들이 ‘브람스의 눈물’이라고 별칭을 지어준 부분, 12분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4악장도 압권이다. 그중에 마지막 3분을 드라마의 주제로 정했다. 이 향기가 드라마로 전해진다면 좋으련만….
1995년 3월 15일 ‘한겨레’ 단독 보도
“수배중 대공수사관 이근안 소재 기획”
김상열 작가 ‘동족분쟁 르완다 배경’
‘현악6중주 기획안’ 치안본부 전송
제작본부장-치안본부장 친분관계
문화방송노동조합 “엄중 항의” 불구
군사작전하듯 ‘물밑 봉쇄작전’ 착착
예산부서 ‘르완다 현지촬영비’ 삭감에
코미디언 출신 사업가 “항공권 협찬”
탤런트실 ‘노 개런티 출연’ 결의하기도
‘비리 사건’ 수배 피디들 돌연 승진
“더 이상 문화방송이 아니다” 선언
수면하의 시한폭탄은 재깍거리며 돌고 있다. 6·25 특집극 예산이 이미 기획안 결재 때 책정되어 있는데, 예산 부서에서 재조정하자고 연락이 왔다. 긴 시간 논의 끝에 국외 촬영 예산 삭감을 들고나왔다. 맥을 끊는다. 항의하고 설득도 해보았지만 막무가내다. 이미 드라마국 데스크와 사전협의가 끝난 상태로 보였다. 차츰 시한폭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산 부서와 논의하는 중 ‘올해의 드라마 라인업’을 보게 되었다. 6·25 특집극이 끝난 이후 모든 프로그램이 연성화되고 있었다. 한구석 맑은 물이 고일 자리조차 없어지고 있다. 진골· 성골들만 편성되는 방송권력 재편 신호가 켜졌다. 권력의 집중화에서 권력의 조직화로 변형되고 있었다. 압력 형태도 ‘진화’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한명 혹은 직계 라인에서 악역을 맡아 압박하고 처리하면 그만이었는데, 지금은 구조적 박해를 가해 오고 있다. 비드라마 출신이 드라마를 통제하며 작품 이해도가 현격히 떨어지고, 상명하달의 단계적 간부회의가 조직화되고, 통제체제로 전환되었다. 군사작전하듯, 도사리고 있던 전술들이 속출했다. 무섭다. 그러나 현실이다. 이대로 간다면 방송사 내부의 권력도 외부 권력으로 옮겨갈 것이 뻔해 보였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치안본부의 물밑 봉쇄작전이 이뤄진 걸까? 캐스팅과 스태프 조직이 멈춰 섰다. 편성 다음의 일정이 올스톱 되었다. ‘알아서 긴 것인가?’
그즈음 협찬사가 찾아 들어왔다. 아프리카 항공권을 전량 제공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이다. 문화방송 코미디언으로 활약하다가 사업가로 변신한 이규혁과 진지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현악 6중주> 1부에 2번, 2부에 2번, 간접광고 노출을 제시했다. 극본을 샅샅이 검토한 뒤 노출 포인트를 정확하게 제시하는데, 숨막히게 무더운 아프리카에서 주인공 뒤로 노출되는 간접광고가 그것이다. ‘카나다 생수’ 간판. 그다음은 생수를 마시는 장면의 삽입을 요구했다. 무리한 요구는 아니라고 보았다. 방송위원회에 문의했다. 그런데 문의도 하기 전에 이미 내부회의에서 불가 판정을 내린 뒤였다. 우리가 움직이는 모든 동선에 ‘정지 마크’가 서 있었다. 심지어 홍보 라인도 서 버렸다. 시한폭탄은 물밑 어디를 헤매나? 신문이나 노조나 사건만 터트려 놓고 후속취재가 없다. 절박함과 절박함이 충돌할 때 ‘을’은 비장하고 냉철해질 수밖에 없다.
그때 실로 감동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탤런트실 간사 정태섭을 중심으로 후배들이 <현악 6중주> 노 개런티 출연을 협의 중이라는 소식이었다. 다만, 자신들은 힘없는 조연 단역급이니, 주연급이 확정되고 흔쾌히 자신들의 뜻에 동참하면 일부 자비를 들여서라도 아프리카 촬영에 동참하겠다는 것이다. 참으로 고맙다. 마지막 보루다.
그 다음날 아침 국장실 회의 때 사표를 제출했다. 1995년 3월29일. 잠수하고 있던 시한폭탄은 수면 위로 급부상하더니 이내 폭발해 버렸다. <현악 6중주>도 공중분해되어 버렸다. 간부들은 ‘문제 연출자가 스스로 자폭하길 기다렸다’는 분위기다. 다만 입사한 지 오래지 않은 후배 피디 한명은 얼굴을 처박고 울고 있었다. 책상을 정리하니 라면 상자 2개가 좀 넘었다. 22년을 220년처럼 보냈다. 한 점 부끄럼 없이 일했다. 오늘을 잊지 않겠다. 라면 상자 맨 위에 <현악 6중주> 대본이 놓여 있다. 조용히 그 대본을 빈 책상 위에 놓고 나왔다. “순수했으므로 절망해야 했던, 한때의 젊은이들과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바친다.”
‘어리석은 사람은 서두르고, 영리한 사람은 기다리지만, 현명한 사람은 정원으로 간다.’ 타고르의 말이 떠올랐다. 변산의 산소를 찾았다. 어머니께 큰절하고 내려오는 길의 저 장엄한 서해 노을을 잊을 수 없다.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문득 ‘광주 망월동으로 가주세요’ 했다. 왜 망월동을 찾아 나섰는지 모르겠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첨병’, 목숨을 걸지 않는 첨병은 없다. ‘길을 찾아서―첨병’은 내 여정의 기록이자 내부고발이며 한 전문가로서 전하는 제안이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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