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NAVER 연예

[정달해의 인사이트] 신성일, 영면에 들다

[김봄이 기자 bom@msnet.co.kr] 지난 4일 세상을 떠난 신성일

#한국영화 톱스타 신성일, 영면에 들다

명실공히 충무로 최고의 톱스타였던 배우 신성일이 지난 4일 지병이었던 폐암이 악화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지난해 6월 폐암 3기 확정 진단을 받을 뒤에도 열심히 운동하고 치료에 전념하며 웃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병마를 이겨내지 못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삶에 대한 의지 뿐 아니라 연기활동 재개에 대한 계획까지 세워두고 이장호 감독의 신작 '소확행' 크랭크인을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항암치료를 이어가던 중에도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린 자신의 회고전에 모습을 보였으며 "음식도 잘 먹고 운동도 병행하고 있다"며 신작 준비 계획까지 밝히는 등 건재함을 과시했던 인물이다. 한편으로 고 신성일은 가족에 대한 생각, 또 이성과의 만남 등 사생활 면에서 국민정서에 반하는 가치관을 드러내거나 정치에 대한 뜻을 보이며 스스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쌓기도 했다. 그로인해 말년에는 영화계 대선배라는 타이틀보다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로 부각됐다. 하지만 무려 5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한국영화 부흥기에 큰 역할을 했던 배우라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빛나는 스타로, 넘치는 열정을 드러내며 한국영화계 대배우로 살다 간 신성일의 삶을 돌아봤다.

한 영화시사회 포토월에서 신성일의 모습.

#마지막 가는 길, 수많은 동료들 애도물결

신성일은 지난 3일 병세가 급격히 나빠져 다음날인 4일 새벽 눈을 감았다. 서울 아산병원에 빈소가 마련됐으며 장례식은 한국영화인총연합회 주도 하에 영화인장으로 치러졌다. 배우 안성기가 공동 장례위원장을 맡았고, 신영균-이순재-최불암-김수미-문성근-조인성 등 선후배 배우들과 영화감독 이창동-정지영, 오석근 영화진흥위원장, 나종민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을 포함한 문화 및 그 외 각계 인사들이 줄지어 빈소를 찾았다.

신성일의 아내이자 배우 엄앵란은 아들 강석현 등 가족 및 영화 관계자들과 함께 장례식장을 지켰다. 상복을 입은 채 기자들 앞에 서서 "마지막까지 영화 생각만 하고 영화 얘기를 꺼냈던 영화인"이라고 신성일의 이미지를 고이 지켜줬다. 이미 가정사가 널리 알려진 만큼 가정적인 남자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철저히 일에 미쳐 집안일은 신경 안 썼다"고 솔직하게 얘기했다. 그러면서도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라 55년을 함께 했다"고 강조하며 끝까지 신성일에 대한 정을 보여줬다.

5일 오전 영결식과 발인식까지 진행한 후 서울 양재 추모공원에서 화장까지 마쳤다. 신성일의 유골은 이후 경북 영천의 성일각에 안치된다. 이 곳은 신성일이 직접 건축에 관여해 지은 후 자신의 이름까지 붙이고 거주하던 집이다.

신성일의 데뷔작 '로맨스빠빠'

#신성일, 당대 가장 빛나던 영화스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영화산업은 급격히 발전했다. 그 뒤로 갑작스런 몰락의 과정이 이어지며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 시기를 두고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는 말을 쓰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앞서 충무로 1차 르네상스기가 있었으니 이 때가 바로 1960년대다. 한 해에만 200여 편에 달하는 한국영화가 만들어지고 영화스타들이 대중문화계의 중심에 섰던 그 시절, 신성일은 그 중에서도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별이었다. 1960년 '로맨스빠빠'로 데뷔해 '상록수' '김약국의 딸들' '현해탄의 구름다리' '맨발의 청춘' '떠날 때는 말없이' '만추' '별들의 고향' 등 무려 5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훤칠하고 잘 생긴 얼굴에 남성미와 지적인 매력까지 두루 갖춰 멜로 뿐 아니라 액션 장르에서도 남다른 존재감을 보여줬다. 여성들의 우상으로 군림하는 동시에 반항아나 건달 등의 캐릭터를 연기하며 남성들의 '워너비'로 불리기도 했다. 현실 속의 신성일 역시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외제차를 몰고 대통령 차를 보기좋게 앞질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배우로서 약점이 있었다면 대구 출신으로 사투리가 남아있어 젊은 시절 출연작의 대부분을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성우 더빙으로 대체했다는 것인데, 당시만 해도 동시녹음보다 성우가 동원되는 후시녹음 방식이 주를 이뤘기에 흉은 되지 않았다. 물론 이 시기 이후 촬영현장이 동시녹음으로 진행되면서 신성일도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연기했으며 연기력이나 자기 관리 면에서 항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흔히 톱스타에게는 그와 함께 시대를 풍미했던 라이벌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신성일의 옆자리를 차지한 라이벌은 없다.

2013년 출연작 '야관문'

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한국영화산업은 60년대에 비해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당시 정권의 검열강화, 외화 수입쿼터제 시행 등 정책적 이슈가 충무로에 악영향을 끼쳤다. 이 때부터 신성일은 서서히 영화가 아닌 사업과 정치계로 눈을 돌리며 조금씩 노선을 바꿨다. 하지만 첫 도전이 쉽진 않았다. 60년대 후반에 이미 필름공장 건립을 추진하다 사기를 당해 거액을 날렸고 국회의원에 출마해서도 두 차례나 떨어져 큰 빚을 졌고 집안이 어려워져 아내 엄앵란이 운영하는 식당 수입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 사이에 성일시네마아트라는 제작사를 차려 6편의 영화를 제작하며 연기 뿐 아니라 제작 전반을 아우르는 영화인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은 큰 문제였다. 영화 제작자로 자리를 잡은 뒤에도 또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해 어려움을 겪었다. 2000년 제16대 선거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대구 동구에 출마해 3차례 도전 끝에 당선돼 본격적으로 정치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운도 오래 가지 못했다. 2005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 지원법 연장 건과 관련돼 옥외 광고물 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징역을 살게 됐다. 5년 형을 선고받고 2년 동안 수감생활을 한 끝에 석방됐으며 그 뒤로는 간간히 영화와 드라마 등에 모습을 보이며 주로 경북 영천의 자택에서 생활했다.

사실 여생을 연기와 영화 제작활동에 주력했다면 존경받는 영화인의 모습으로 남아 더 좋았을 뻔 했다. 하지만 신성일은 지나치게 솔직했다. 일간스포츠와 중앙일보에 연재한 자신의 일대기를 모아 2011년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를 내놨으며 이 자서전에서 자신의 여자관계까지 솔직하게 털어놔 논란을 부추겼다.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 등을 통해서도 자신의 이성관을 허심탄회하게 밝히며 법적 혼인관계에 있는 엄앵란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이 시기에 필자도 신성일과 만나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그의 이성관을 두고 대화한 적이 있다. 신성일은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고 그 표정과 목소리는 소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시 필자는 신성일이 내뱉은 말의 상당부분을 기사화하지 못했다. 긴 대화를 그대로 옮기지 않고 단편적인 부분만 발췌했을 경우 신성일을 또 한번 궁지로 몰아넣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생각의 옮고 그름은 듣는 이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다만 신성일의 태도는 마주앉은 기자를 압도할 만큼 당당했다. "네가 물어봤으니 나는 대답한다. 거짓말은 하기 싫다." 필자의 귀에 신성일의 목소리는 그렇게 들렸다.

신성일은 자신의 회고전을 열어준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하며 청바지에 자켓을 입고 활짝 웃으며 힘차게 레드카펫을 밟았다. 암에 걸린 상태였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도 의자에 앉지 않고 1시간 넘게 꼿꼿하게 서서 마이크를 잡았다. 환자 티를 내기는 싫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정치권에서 발을 뺄 때도 간과 쓸개를 다 내줘야 살아남는 그 바닥 생리가 싫었다고 한껏 허세를 부렸다. 팔순의 나이에도 열심히 운동하며 젊은 사람 못지않게 탄탄한 몸을 유지했다.

자신의 가치관에 솔직하기 위해서였건 또는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였건 가족을 꽤나 힘들게 만들었던 인물이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톱스타의 자리에서 품위를 지키고자 죽음 직전까지 당당한 태도를 보여주려 했다. 그리고 엄앵란과 가족들은 그런 신성일을 '멋있고 폼나게' 보내줬다. 허세와 겉멋이 상당했다고 하더라도 신성일의 삶은 인생이란 카메라 앞에서 보여준 '연기' 그 자체였다. 그리고 한국영화사의 상당 부분을 자신의 필모그래피로 장식했다. 일평생 '멋스러운 삶'을 '연기'했던 영화스타 신성일이 하늘로 갔다.

정달해(대중문화칼럼니스트)



ⓒ매일신문 - www.imaeil.com

기자 프로필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연예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광고

AiRS 추천뉴스

새로운 뉴스 가져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