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 열번 나도, ‘통나무 연기’ 구박받아도 이웃과 함께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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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르포/파주 문발동 주민들의 웹드라마 제작기

각양각색 직업 가진 주민들 모여

7달동안 각본·촬영·연기 등 해내

60분 분량 3회짜리 웹드라마

<문, 발리에서 생긴 일> 유튜브 공개

“연기 뒤 나도 모르는 나 발견해”

“마을 사람들과 협업 과정 감동적”



웹드라마 <문, 발리에서 생긴 일>을 촬영 중인 경기 파주 문발동 사람들. 왼쪽부터 이채영(연기), 김영준 촬영감독, 장지영 제작부장(뒤에 선 이), 김선재 감독, 정용준씨. 문발동 주민 허심 제공
‘세계 최초, 우주 최초의 마을 드라마.’

이들의 주장대로 세계 최초, 우주 최초일지는 자신할 수 없으나, 적어도 한국어를 사용하는 ‘동네 사람들’이 직접 만든 드라마로는 ‘세계 최초, 우주 최초’임이 확실해 보인다. 경기도 파주 문발동 일대 주민들이 만든 <문, 발리에서 생긴 일>은 기획·각본·촬영·연기·연출·편집까지 모든 과정을 주민들 손으로 해낸 3회짜리 웹드라마다. 8일부터 유튜브를 통해 공개됐다.

지난 2일 저녁 <문, 발리에서 생긴 일> 시사회가 열린 경기 파주 교하문화청소년회관 홀은 100석에 이르는 좌석이 동네 사람들로 모두 메워졌다. 회관은 자기 얼굴이 나오는 드라마를 본다는 데 잔뜩 흥분한 아이들과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는 어른들의 목소리로 시끌시끌했다. 잔치의 주인공은 오롯이 동네 사람들이었다. 평소 공동체 문화에 관심이 많다는 최종환 파주시장이 축하해주기 위해 왔지만, 반갑게 맞았을 뿐 따로 마이크를 건네진 않았다. 무대에 오른 이들은 총감독·조연출·촬영감독·시나리오 작가·제작부장과 주연배우들이었다.

<문, 발리에서 생긴 일>의 극중 주요 배경인 마을 사랑방 ‘마당’ 앞에 모인 출연·제작진들. 드라마 화면 갈무리
이웃들 이야기 시트콤 형식으로 다뤄

각 20분 분량의 드라마 3개가 묶인 <문, 발리에서 생긴 일>은 문발동을 무대로 개성 강하면서도 다정다감한 이웃들 얘기를 시트콤 형식으로 다뤘다. “다큐가 아니기에 극중 배역과 실제 인물의 캐릭터는 차이가 있다”고 동네 사람들은 강조했다. 실제론 가족이 아닌데 모녀로 등장하거나, 경우 바른 사람이 얄미운 캐릭터로 나오거나, 진중한 성격의 소유자가 깨방정 떠는 것은 그냥 ‘설정’임을 감안해달라는 것이다.

첫회인 <천불교, 베일을 벗기다>는 코믹을 기본으로 깔고 미스터리 요소를 깨가루처럼 섞어놓았다. 촛불이 불타오르는 방에 ‘문발리 아녀자’들이 종종 모여 비밀스러운 회합을 벌이는데 이들은 모두 ‘천불교’라는 수상한 종교로 엮여 있다. 동네 여성들의 영혼을 잠식하는 천불교의 정체를 밝히려, 기자를 꿈꾸는 대학생 이채영이 동네에서 식당을 하는 전영미의 뒤를 밟는다.

두번째 작품 <통장의 발견>은 아이돌에 빠진 흥 많은 주부 박경희가 ‘통장이 되면 매달 220만원(실제론 1년에 240만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짜 정보에 홀려 문발동 28통 통장 선거에 출마한 얘기다. 쟁쟁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뽑힌 박 통장은 뜻밖의 재능을 발휘해 어엿하게 공직을 수행해낸다. 길고 가느다란 눈매에 장난끼가 잔뜩 담긴 박 통장이 문발동 거리를 활보하며 춤추는 롱테이크 신이 압권이다.

<마을이 보약이다>는 심술궂었던 폐지 줍는 할머니가 문발리 사람들과 아웅다웅하면서 마음을 열어가는 줄거리다. 할머니와 동네 꼬마 최희진은 덩실덩실 춤추면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자식보다 좋고 돈보다 좋아 보약같은’ 마을을 칭송한다.

외부자의 눈으로 보자면, 문발동 사람들에게 ‘문발리 마을’은 보약이라기보다는 ‘마약’같다. 보고 또 보고, 놀고 또 놀고, 모이고 또 모이는 걸 보면 웬만큼 중독성이 강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끈끈한 관계가 없었더라면 40℃를 웃도는 폭염 속에 불타는 아스팔트를 디디며 춤추진 못했을 것이고, 직업이 영화인도 아닌데 새벽 3시까지 촬영에 심취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시나리오를 시작한 4월부터 편집을 끝낸 10월 말까지 일곱달 동안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문발리 마약’에 단체로 취해 있었던 것이다.

주민들이 모여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이 무모한 시도의 첫 단추를 누른 사람은 <토지> <그대를 사랑합니다> 등을 쓴 드라마 방송작가 김선재(필명 김명호)씨였다. 9년째 파주에 살고 있는 그는 큰 욕심 없이 경기문화재단에서 공모하는 주민교육지원사업에 웹드라마 제작 교육을 신청했는데, 그만 2 대 1의 경쟁을 뚫고 붙어버렸다. 후배 방송 작가 박수진씨와 동네 주민 신순주·고운해씨가 줄거리 틀을 잡았고 30여명이 함께하는 동네 사람들 단톡방을 통해 집단 개작이 진행됐다. 완성된 시나리오를 놓고 ‘누가 이 배역을 맡겠냐’고 물어보면 항상 누군가 나서 ‘아무개가 딱 맞을 거 같다’며 이웃의 옆구리를 찔렀다.

프리랜서 촬영감독인 김영준씨가 카메라를 잡았고, 새로운 직업을 찾기에 앞서 재충전 시간을 갖고 있던 장지영씨가 제작부장을, 주부 정민영씨가 조연출을 맡았다. 경기도에서 나오는 지원금 1300만원만으로는 빠듯해 촬영 도중 드는 경비 일부는 십시일반으로 분담했다. 자영업·프리랜서·회사원·대학 강사·학생·청소년 상담사 등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모였기에 촬영은 주로 평일 저녁과 주말을 이용해 이뤄졌다. 각 신마다 필요한 인물들의 각자 일정을 고려해 깻잎 한 장 한 장 쌓듯 정교하게 촬영 스케줄을 짜는 것이 조연출의 주요 임무였다.

<문, 발리에서 생긴 일> 2화 ‘통장의 발견’에서 ‘방탄성인단’이 ‘엄지 척’ 군무를 하고 있다. 드라마 화면 갈무리


마을 사랑꾼들이 사는 법

이런 ‘마을 사랑꾼’들이 경기도의 신도시에 생겨난 것은 2014년 세월호 참사가 계기가 됐다. 그 참혹한 사건과 그 뒤 이어진 정부의 잔인하고 무책임한 처사에 애도와 분노의 마음이 뭉쳤다. 세월호 추모 모임을 함께 하며 낯을 익힌 이들이 이후에도 자연스럽게 모이기 시작했고, 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것뿐 아니라 탁구(동호회 우리동네탁구, 우동탁), 당구(우동당), 낚시(KFC, 교하피싱클럽). 노래(파노라마), 자전거(파라오), 달리기(미토) 등 취미와 기호를 나누는 느슨한 모임들이 잇달아 만들어졌다. 촛불이 타오르던 2016년 겨울 광화문 광장은 문발동 주민들의 ‘필참 코스’였다.

함께 할 수 있는 공간도 생겼다. 주민인 최석진 성공회 신부가 2년여 전 집을 새로 지으면서 1층을 마을 아지트로 내놓았다. ‘마당’이라 이름 붙인 이 마을회관은 <문, 발리에서 생긴 일>에도 주요 무대로 등장한다. 마을 사람들은 마당의 탁구대에서 라켓을 휘두르다 출출해지면 탁구대 위에 신문지를 깔고 각자 싸온 음식을 펼쳐 놓는다. 도자기·가죽공예를 하는 사람들 12명이 모여 ‘짝작’이라는 협동조합을 만들었고, 카페와 서점을 겸한 협동조합 ‘발전소책방.5’도 만들어졌다. 발전소책방.5에선 정기적으로 저자를 초대해 강연하는 행사도 열린다. 문발동 사람들의 독특한 마을문화는 최근 발간된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조현 지음)에도 소개된 바 있다.

여러 취미활동을 함께 해온 문발동 사람들이지만, 드라마는 도전이었다. 전문 배우를 모셔와 입술에 연필을 물고 발음연습을 하는 등 연기지도를 받았다. 그대로 카메라 앞에 서면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다리가 후들후들거렸다. 처음엔 엔지가 10번 이상 반복돼, 하루에 4~5장면 찍기도 어려웠다고 했다. 김선재씨가 전문 작가 출신으로 드라마 만드는 일을 했다고는 하나 직접 메가폰을 잡은 건 처음이라 일 순서를 효율적으로 정비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열정은 무한대였다. 정순영씨는 문발동이 아닌 파주 운정에 살지만 ‘연극인’라는 못 이룬 소원이 간절해 연기하는 꿈까지 꾸다가 이번에 합류했다. <통장의 발견> 주인공인 박경희씨는 직장에서 얻은 안식휴가 2주를 몽땅 드라마에 바쳤다. 2화 <통장의 발견>에 나오는 ‘방탄성인단’의 공연 장면을 찍기 위해 김춘식·박상희·이재정·정용준·최석진·허심씨 등 6명은 군무를 익히느라 호된 훈련을 했다. 그래도 끝내 어색함을 극복하지 못해 드라마에서 또박또박 책읽는 어조에 사람 좋은 웃음만 흘렸던 정용준씨는 “통나무 연기로 동료에겐 고통을, 시청자들에겐 즐거움을 안긴” 공로를 인정받아 2일 시사회 뒤 열린 시상식에서 ‘나무주연상’으로 격려받았다.

<문, 발리에서 생긴 일> 1화 <천불교, 베일을 벗기다>를 촬영 중인 문발동 주민들. 왼쪽부터 장지영·전영미·조형근씨. 문발동 주민 허심 제공


커뮤니티 아트의 가치

밥 나오는 일 아니라 오히려 밥 축내며 하는 일인데 왜 다들 이렇게 드라마에 빠졌던 걸까. 시사회 뒤 이재정·전영미 부부가 운영하는 만두가게로 자리를 옮겨 진행된 뒤풀이에선 ‘극예술을 통한 내적 변화’를 강조하는 ‘간증’이 이어졌다.

<천불교, 베일을 벗기다>에서 ‘강인하면서도 나름 귀엽고 섹시한’ 경상도 출신 부인을 열연한 전영미씨는 “나는 본래 무뚝뚝한 성격이었는데 내 안에 이런 애교가 있었는지 몰랐다. 연기 뒤로 내가 좀 많이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박경희씨는 “아이들한테 늘 과정이 결과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한구석엔 의구심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드라마를 만들면서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했다. 엄마나 아내가 아닌 딱 박경희로서, 이렇게 내가 반짝빤짝 빛나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남편 직장 일로 1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첫날부터 드라마에 투입된 박은선씨는 “마을 사람들과 협업하는 게 너무 감동적이어서 시차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공동체를 예술의 기반으로 삼은 시도는 많았다. 평범한 시민이라도 문화예술 작품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문화의 민주화’에 이어 시민들이 직접 문화예술을 생산하고 향유하는 ‘문화의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대됐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최근 ‘도시재생’이라는 화두 속에서 동네를 파고들어 작업하는 작가들의 작업이 주목을 받고 있다. 동네에 터잡고 살면서 이웃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거나 각자의 직업을 활용한 작품을 만드는 작업이다.

대표적인 ‘커뮤니티 아티스트’인 김월식 작가의 경우 집값 때문에 서울 외곽의 오래된 동네로 이사를 다니다 ‘공동체 예술’에 눈을 떴다. 그는 재래시장, 달동네, 유흥가 등을 무대로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골목에서 주운 폐품으로 조형물을 만들고 길거리에서 퍼포먼스를 했다. 생선가게 주인으로부터 듣는 ‘물고기 강의’, 동네 할머니의 지도를 받아 아이들이 함께 하는 모내기 등 이웃들의 경험과 정보를 공유하는 친목 겸 교육프로그램도 기획했다.

김 작가의 ‘커뮤니티 아트’가 예술가가 중심이 돼 마을 주민들을 참여시키는 방식이라면 <문, 발리에서 생긴 일>은 예술가가 주도하지 않고 주민들이 직접 문화 생산의 주체로 참여한 사례다. 전문적인 콘텐츠 생산자 영역인 드라마 촬영에 아마추어들이 뛰어들어 하고 싶은 동네 이야기를 진솔하게 표현한 것이다. 문발동 노래동아리 ‘파노라마’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형근 한림대 HK교수(사회학)는 “커뮤니티 아트에선 예술작품이 어떤 메시지를 얼마나 강력하고 얼마나 완성도 있게 전달하느냐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예술적 체험을 통해 변화해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며 “<문, 발리에서 생긴 일>가 마을 밖에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있다면 물론 좋은 일이겠지만, 그 자체로도 문화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커뮤니티 아트의 본질적인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만하다”고 짚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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