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과거, 현재, 미래가 이 한곳에! 팔색조 창신동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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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리으리하고 짱짱한 건물, 반듯한 인테리어, 화려함을 찾아 떠나는 여행도 있지만 어떤 날엔 사람 냄새 폴폴 나는, 그런 곳이 당길 때가 있다. 가파른 오르막, 북적거리는 시장통, 시간이 멈춘 듯한 꼬불꼬불 골목이 눈앞에 펼쳐지는 창신동으로 떠나 보자.

▶혼자 걷는 골목 여행

왁자지껄 삼삼오오 모여 가는 여행도 좋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혼자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머릿속을 정리하거나 무언가로부터 에너지를 받고 싶을 때 떠나면 좋을 곳이 바로 창신동이다.

창신동은 화려한 동대문 패션타운을 등지고 골목으로 들어 서서부터다. 눈앞 산등성이까지 빼곡하게 들어선 집들이 장관이다. 누군가는 이 골목이 뭐 볼 게 있냐고 할 수도 있다. 새로운 것, 세련된 것은 없지만 잊고 지내던 것들이 예고 없이 곳곳에서 툭툭 출몰하는 동네다. 뉴타운으로 지정되어 아파트 공화국이 될 뻔한 이곳은 주민들의 반대와 자립으로 도시 재생 지역 1호로 지정된 마을이기 때문에 현대적인 것보다는 이곳만의 방식, 사람 냄새를 제대로 풍기고 있다.

북적북적한 진입로, 한두 사람 지나다닐 정도의 좁은 창신 시장통 골목은 내 몸 어딘가에 숨어 있던 추억의 세포를 깨운다. 어릴 적 향수, 훈훈한 인심, 으샤으샤 아저씨들의 호객 외침을 들으며 걷다 보면 기분 좋은 에너지가 수혈되는 느낌. 입맛 다시게 하는 떡 한 팩, 향긋한 귤 한 봉지 사서 오물거리며 걸어 보자. 여기서부터는 지

도를 보고 움직일 필요가 없다. 발 닿는 대로, 내가 가고 싶은 대로, 오래된 건물, 한 평 남짓한 가게, 촌스러운 간판, 정돈되지 않은 전선, 마구잡이로 세워 놓은 짐 더미들, 한 짐 가득 실은 날쌘 오토바이를 피해 가며 오르막 골목을 기웃거리며 걷는다.

걷다 보면 잔잔하게 들리기 시작하는 ‘차르르’ 소리. 그렇다, 창신동은 한 집 건너 한 집이 봉제업을 하는 곳으로, 우리나라 봉제 산업의 메카이자 패션 산업의 현장이다. 여느 가정집이나 사무실 같지만 문 앞에 붙어 있는 입간판은 자랑스러운 이름표 마냥 그들의 이름과 작업 분야를 표기하며 각자의 일을 알린다. 대부분 30년 이상 된 마스터들이 한자리에서 미싱을 돌리며 한 우물을 파며 오랜 시간 살아온 터전이다. 골목골목 이들의 작업물을 각지로 실어 나르느라 오토바이가 이리들 바빴구나. 걷기에도 가파른 언덕길을 차르르 차르르 미싱 소리에 맞춰 오토바이는 잘도 다닌다. 오가는 사람 드물고 움직이는 건 지저귀는 새들뿐인데도 뭔가 리드미컬한 삶의 힘이 느껴진다. 세상이 바뀌어도 이곳의 미싱은 돌 것이다.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노랫말처럼 말이다.

▶창신동 절개지 & 창신 소통 공작소

봉제 작업장 골목을 지나 오르면 집과 집 사이로 이어지는 계단이 등장한다. 요리조리 이어지는 미로 같은 계단 틈 사이를 지나면 만날 수 있는 컨테이너 박스형 건물. 건축가 승효상의 디자인과 건축사 정보영의 설계로 완성된 건물이다. 예술가와 교육 전문가가 함께, 봉제, 목공, 손 공작 등 창신동 주민들만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 데크에서 바라보는 창신동 뷰는 전망이 꽤 근사해 관광객들이 들르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을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도착한 사람들을 위해 아기자기한 찻집이나 친근한 숍을 구경하는 작은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

공작소 뒤는 절개지 전망대로 이어진다. 절개지, 또는 절벽 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거대한 돌산 주변으로 아찔하게 집들이 요리조리 채워져 있다. 쉽게 보기 힘든 장면이다. 이런 기이한 주택지가 된 배경엔 일제 강점기의 아픔이 있다. 1900년대 초반, 석조전과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본점)을 지을 때부터 질 좋은 돌을 확보하기 위해 창신동의 채석장은 바삐 돌아가기 시작했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거대한 공사가 시작되고 경성역, 경성부청 신청사를 짓는 등 화강석을 조달해야 하는 일이 늘어날수록 이곳의 돌산은 날카롭게 변해 갔다. 어쩌면 이곳 주민들의 희생과 고통으로 낙산의 돌들이 서울 곳곳에 뿌려져 매끈한 건물과 도로가 완성된 셈이다. 퍼즐처럼 맞춰진 집, 그 집을 오가기 위해 만들어진 수많은 계단, 오랫동안 동네를 지키는 창신동 사람들. 서울의 흘러간 시간을 보는 듯하다.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창신 소통 공작소 주소 서울 종로구 창신6가길 47 프로그램 신청 및 문의 종로문화재단 공식 홈페이지 참고

▶숨어 있는 박물관 여행

▷이음피움 봉제역사관

창신동 문화에서 봉제를 빼놓을 수 없다. 서울의 대표 도심 제조업으로 1970~80년대 산업화를 이끌었던 봉제의 현주소 창신동에 봉제 역사관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올해 개관해 아직은 낯선 탓일까, 생업에 바쁜 탓일까. 역사관을 지척에 두고도 주민들은 역사관이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어 아쉬웠지만, 타 지역 사람들에게 창신동을 자세하게 알려줄 수 있는 곳임은 분명했다.

과거 봉제 산업에 관한 사료는 물론이고 이 시대 마스터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작업물을 소개하고 있어 골목 가득 울려 퍼지는 ‘차르르’ 소리의 위대함을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된 듯하다. 시대별 옷을 만들거나 봉제 기계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으며, 단계별로 옷을 만들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입구의 ‘단추 가게’ 숍에서는 봉제인들이 직접 생산한 봉제 제품, 오색 단추, 봉제 관련 도구와 기념품을 구매할 수 있다. 맘에 드는 단추를 고르면 4층 바느질 카페에서 직접 달아 볼 수 있다. 역사관 최상층에 위치한 바느질 카페는 셀프 카페로 직접 커피를 내려 마시는 공간이다. 휴식 공간 이상의 매력은 바로 창신동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라는 점인데, 한쪽 창으론 창신동 절개지를 한눈에 볼 수 있고 반대편으로 도심의 높은 빌딩 숲이 저 멀리 펼쳐진다. 올드 앤 뉴. 도심의 과거와 미래의 모습을 동시에 만나는 듯하다(절개지가 제법 가파르고 계단이 많아 직접 오르기보다는 이곳에서 감상하는 것도 좋다).

주소 서울 종로구 창신동 창신4가길 26

More Inside… ◆창신동 먹거리 ‘맛있게 맵다! 창신동 매운족발’

창신시장에 가면 꼭 먹어야 하는 음식. 바로 매운 족발이다. 식당을 몇 미터 앞에 두고 이미 맛깔스러운 향이 우리를 인도한다. 주문과 함께 매콤한 양념을 발라 족발을 바로 구워 내는데 칼칼한 불맛이 일품이다. 고무장갑을 끼고 버무린 뒤 등장하는 석쇠구이 족발은 2만8000원. 거기에 2000원짜리 계란찜과 주먹밥을 추가하면 두세 명이 배부르게 먹기 충분하다. 입안 가득 퍼지는 맛깔스러운 매콤함은 적당한 자극과 함께 배시시 웃음이 번지게 한다. 입안이 얼얼하고 후끈해질 때 한입 가득 넣는 부드러운 계란찜과 고소한 주먹밥으로 기분 좋은 한 끼를 마무리할 수 있다. 매운 것을 못 먹는다면 반반에 도전해 보는 것도 좋다. 위치 창신시장 내(서울 종로구 창신1동 종로 51길 23)

▶백남준 기념관-백남준을 기억하는 집

서울시에서 2015년에 창신, 숭인 도시 재생 선도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의 의견으로 만들어졌다. 1937년부터 1950년, 백남준이 성장기를 보낸 이곳 창신동 137번지 일대에 백남준 기념관이 준비돼 2017년 3월에 개관했다. 옛집이 그대로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전시 콘텐츠 속에서 전달되는 백남준의 말, 글, 작업물, 지인들의 회고담을 보다 보면 생가 이상의 의미로 그의 생각을 따라갈 수 있다. 문을 열고 마주하는 중정부터 실내 곳곳에 숨어 ‘그림 찾기’ 하듯 포진된 조형물들을 통해, 백남준이 남긴 작품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직접 만져보며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이름 그대로 백남준을 기억하고, 백남준의 기억 속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전시 공간 외에도 지역 주민이 운영하는 백남준 카페가 한편에 마련되어 관련 도서 열람과 휴식이 가능하다.

주소 서울 종로구 종로 53길 12-1

▶타임머신 타고 과거 여행

▷쪽방촌 벽화마을

동대문역 6번 출구에서 근처 샛길로 이어지는 쪽방촌. 어둡고 으슥한 골목 중간중간이 스케치북이 됐다. 피식 웃음이 나는 어설픈 그림부터 오래 전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추억의 그림, 알록달록 색감이 예쁜 컬러풀한 그림, 멋들어진 시화까지 제각각이 자기 멋대로 담을 타고 펼쳐진다. 빨래를 말리고 무청을 말리는 누군가가 사는 집 담벼락이지만, 이방인인 나는 그 좁디 좁은 골목을 힐끔거리며 누비고 있다. 문득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간을 넘어 과거 어느 곳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흥미로운 좁은 골목 여행이다. 낡은 건물과 벽화들이 주는 오묘한 매력 때문에 사진 촬영을 나온 사람들이 자주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위치 동대문역 6번 출구 KFC 길 안쪽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창신 문구 완구 거리

아이들이 있는 부모와, 조카 사랑에 푹 빠진 고모와 이모라면 열광할 듯하다. 함박 웃으며 좋아할 아이들에게 사주고 싶은 장난감이 가득하지만 꽤 비싼 가격, 금세 싫증 내는 탓에 늘 구매가 망설여지기 십상. 이런 마음을 잘 다독여 주는 곳이 바로 창신동 문구 완구 거리다. 도매를 위주로 하는 곳이지만 소매도 가능하다. 한 개를 사도 눈치 주지 않는다. 더욱이 연령대별, 퀄리티별로 폭넓은 가격대와 제품을 구비해 놓아 선택의 폭이 넓다. 장난감뿐 아니라 문구류 전문 매장도 있어 학기가 시작될 때 들러 필요한 제품을 아이들과 직접 고르는 나들이도 좋다. 어린이만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오산! 키덜트족을 위한 피규어 제품 전문 숍, 화방 제품만 판매하는 곳 등 성인의 취미를 위한 제품들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 이곳은 단순히 물건을 사기 위해 들르는 곳이 아니다. 장난감을 직접 사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곳. 영화 ‘토이 스토리’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모두임을 증명하듯, 장난감 가게 거리는 많은 사람에게 인기다. 추억 속 장난감을 찾아보는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좋고,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 파티 준비를 위해 친구들과 방문해도 좋다. 창신 문구 완구 거리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에게 행복의 길이다. 위치 동대문역 4번 출구 독일약국 옆 골목

▷동묘 구제시장

‘과거로의 회귀’로 여행 코드를 잡았으니 동묘까지 가 보자. 동묘공원 근처에 형성된 플리마켓과 가게들은 오래된 물건, 사용했던 제품만 전문으로 판매한다. 패션 피플들 사이에서 빈티지 의상이나 과거 희귀 아이템을 구하려 쇼핑하는 곳으로 유명해지면서 재미 반 호기심 반으로 오는 젊은 층이 부쩍 늘었다. 가격도 1만 원짜리 지폐 한두 장이면 봉투에 몇 가지 두둑하게 담아 갈 수 있어 주머니 가벼운 멋쟁이들에게도 인기다. 또 낡은 옷더미에서 나만의 잇템을 발견하는 즐거움은 온라인 몰에서 클릭 몇 번으로 구매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옷 외에도 오래된 LP 판이나 중고 서적, 골동품을 파는 가게가 곳곳에 있어 꼼꼼히 둘러보면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날 정도로 재미있다. 코를 시큰하게 하는 나프탈렌 냄새, 먼지가 뽀얗게 올라앉은 오래된 물건들에 흥미를 느낀다면 시간 넉넉하게 잡고 움직이는 것이 좋겠다. 이런 곳이야말로 오래 보아야 예쁜 게 보이는 그런 곳이니까!

위치 동묘역 3번 출구로 나와 서울 동묘공원 일대

[글과 사진 김현정(콘텐츠 기획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54호 (18.11.2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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