왁자지껄 삼삼오오 모여 가는 여행도 좋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혼자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머릿속을 정리하거나 무언가로부터 에너지를 받고 싶을 때 떠나면 좋을 곳이 바로 창신동이다.
창신동은 화려한 동대문 패션타운을 등지고 골목으로 들어 서서부터다. 눈앞 산등성이까지 빼곡하게 들어선 집들이 장관이다. 누군가는 이 골목이 뭐 볼 게 있냐고 할 수도 있다. 새로운 것, 세련된 것은 없지만 잊고 지내던 것들이 예고 없이 곳곳에서 툭툭 출몰하는 동네다. 뉴타운으로 지정되어 아파트 공화국이 될 뻔한 이곳은 주민들의 반대와 자립으로 도시 재생 지역 1호로 지정된 마을이기 때문에 현대적인 것보다는 이곳만의 방식, 사람 냄새를 제대로 풍기고 있다.
북적북적한 진입로, 한두 사람 지나다닐 정도의 좁은 창신 시장통 골목은 내 몸 어딘가에 숨어 있던 추억의 세포를 깨운다. 어릴 적 향수, 훈훈한 인심, 으샤으샤 아저씨들의 호객 외침을 들으며 걷다 보면 기분 좋은 에너지가 수혈되는 느낌. 입맛 다시게 하는 떡 한 팩, 향긋한 귤 한 봉지 사서 오물거리며 걸어 보자. 여기서부터는 지
도를 보고 움직일 필요가 없다. 발 닿는 대로, 내가 가고 싶은 대로, 오래된 건물, 한 평 남짓한 가게, 촌스러운 간판, 정돈되지 않은 전선, 마구잡이로 세워 놓은 짐 더미들, 한 짐 가득 실은 날쌘 오토바이를 피해 가며 오르막 골목을 기웃거리며 걷는다.
걷다 보면 잔잔하게 들리기 시작하는 ‘차르르’ 소리. 그렇다, 창신동은 한 집 건너 한 집이 봉제업을 하는 곳으로, 우리나라 봉제 산업의 메카이자 패션 산업의 현장이다. 여느 가정집이나 사무실 같지만 문 앞에 붙어 있는 입간판은 자랑스러운 이름표 마냥 그들의 이름과 작업 분야를 표기하며 각자의 일을 알린다. 대부분 30년 이상 된 마스터들이 한자리에서 미싱을 돌리며 한 우물을 파며 오랜 시간 살아온 터전이다. 골목골목 이들의 작업물을 각지로 실어 나르느라 오토바이가 이리들 바빴구나. 걷기에도 가파른 언덕길을 차르르 차르르 미싱 소리에 맞춰 오토바이는 잘도 다닌다. 오가는 사람 드물고 움직이는 건 지저귀는 새들뿐인데도 뭔가 리드미컬한 삶의 힘이 느껴진다. 세상이 바뀌어도 이곳의 미싱은 돌 것이다.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노랫말처럼 말이다.
봉제 작업장 골목을 지나 오르면 집과 집 사이로 이어지는 계단이 등장한다. 요리조리 이어지는 미로 같은 계단 틈 사이를 지나면 만날 수 있는 컨테이너 박스형 건물. 건축가 승효상의 디자인과 건축사 정보영의 설계로 완성된 건물이다. 예술가와 교육 전문가가 함께, 봉제, 목공, 손 공작 등 창신동 주민들만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 데크에서 바라보는 창신동 뷰는 전망이 꽤 근사해 관광객들이 들르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을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도착한 사람들을 위해 아기자기한 찻집이나 친근한 숍을 구경하는 작은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
공작소 뒤는 절개지 전망대로 이어진다. 절개지, 또는 절벽 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거대한 돌산 주변으로 아찔하게 집들이 요리조리 채워져 있다. 쉽게 보기 힘든 장면이다. 이런 기이한 주택지가 된 배경엔 일제 강점기의 아픔이 있다. 1900년대 초반, 석조전과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본점)을 지을 때부터 질 좋은 돌을 확보하기 위해 창신동의 채석장은 바삐 돌아가기 시작했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거대한 공사가 시작되고 경성역, 경성부청 신청사를 짓는 등 화강석을 조달해야 하는 일이 늘어날수록 이곳의 돌산은 날카롭게 변해 갔다. 어쩌면 이곳 주민들의 희생과 고통으로 낙산의 돌들이 서울 곳곳에 뿌려져 매끈한 건물과 도로가 완성된 셈이다. 퍼즐처럼 맞춰진 집, 그 집을 오가기 위해 만들어진 수많은 계단, 오랫동안 동네를 지키는 창신동 사람들. 서울의 흘러간 시간을 보는 듯하다.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창신 소통 공작소 주소 서울 종로구 창신6가길 47 프로그램 신청 및 문의 종로문화재단 공식 홈페이지 참고
▶숨어 있는 박물관 여행
▷이음피움 봉제역사관
과거 봉제 산업에 관한 사료는 물론이고 이 시대 마스터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작업물을 소개하고 있어 골목 가득 울려 퍼지는 ‘차르르’ 소리의 위대함을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된 듯하다. 시대별 옷을 만들거나 봉제 기계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으며, 단계별로 옷을 만들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입구의 ‘단추 가게’ 숍에서는 봉제인들이 직접 생산한 봉제 제품, 오색 단추, 봉제 관련 도구와 기념품을 구매할 수 있다. 맘에 드는 단추를 고르면 4층 바느질 카페에서 직접 달아 볼 수 있다. 역사관 최상층에 위치한 바느질 카페는 셀프 카페로 직접 커피를 내려 마시는 공간이다. 휴식 공간 이상의 매력은 바로 창신동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라는 점인데, 한쪽 창으론 창신동 절개지를 한눈에 볼 수 있고 반대편으로 도심의 높은 빌딩 숲이 저 멀리 펼쳐진다. 올드 앤 뉴. 도심의 과거와 미래의 모습을 동시에 만나는 듯하다(절개지가 제법 가파르고 계단이 많아 직접 오르기보다는 이곳에서 감상하는 것도 좋다).
주소 서울 종로구 창신동 창신4가길 26
창신시장에 가면 꼭 먹어야 하는 음식. 바로 매운 족발이다. 식당을 몇 미터 앞에 두고 이미 맛깔스러운 향이 우리를 인도한다. 주문과 함께 매콤한 양념을 발라 족발을 바로 구워 내는데 칼칼한 불맛이 일품이다. 고무장갑을 끼고 버무린 뒤 등장하는 석쇠구이 족발은 2만8000원. 거기에 2000원짜리 계란찜과 주먹밥을 추가하면 두세 명이 배부르게 먹기 충분하다. 입안 가득 퍼지는 맛깔스러운 매콤함은 적당한 자극과 함께 배시시 웃음이 번지게 한다. 입안이 얼얼하고 후끈해질 때 한입 가득 넣는 부드러운 계란찜과 고소한 주먹밥으로 기분 좋은 한 끼를 마무리할 수 있다. 매운 것을 못 먹는다면 반반에 도전해 보는 것도 좋다. 위치 창신시장 내(서울 종로구 창신1동 종로 51길 23)
▶백남준 기념관-백남준을 기억하는 집
주소 서울 종로구 종로 53길 12-1
▶타임머신 타고 과거 여행
▷쪽방촌 벽화마을
위치 동대문역 6번 출구 KFC 길 안쪽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창신 문구 완구 거리
▷동묘 구제시장
위치 동묘역 3번 출구로 나와 서울 동묘공원 일대
[글과 사진 김현정(콘텐츠 기획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54호 (18.11.2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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