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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임덕 - 나무위키

레임덕

最近 修正 時刻:
버락 오바마 의 마지막 나날들. [2]
NBC 에서 웃자고 만든 것을 白堊館 에서 眞짜로 올렸다. [3]

1. 槪要 [編輯]

레임덕 (Lame duck)은 經濟 用語이자 政治 用語로, 任期末 症候群, 權力漏水 現象이라고도 한다. [4] 直譯하자면 절름발이 오리 라는 意味.

2. 詳細 [編輯]

元來 政治用語가 아닌 經濟用語로, 債務 不履行 狀態의 證券 去來人을 가리키는 用語였다. 그런데 그것이 1860年代 에이브러햄 링컨 美國 大統領 의 任期 詩에 相對 黨의 任員들이 大統領에 反하는 行動을 하는 것에서 政治的 用語로 變貌하였다.

現代 에는 主로 任期가 얼마 남지 않은 公職者의 政策 遂行 能力에 問題가 생길 때 오리가 을 절며 걷는 것과 비슷하다고 붙은 政治 用語로 쓴다. 이보다 더 甚한 境遇는 業務 遂行이 '죽었다'는 意味로 데드德(Dead duck)이라고도 한다. 레임덕이 '權力 漏水'라면 데드德은 '權力 空白'人 셈. 反對末路는 마이티 德 (Mighty Duck·레임덕 없는 政治人)이 있으며 레임덕 없이 任期를 無事히 마쳤음을 뜻한다. [5]

普通 다음과 같은 境遇를 레임덕이라고 稱한다. 實權이 떨어진 權力自意 政策 修行을 周邊에서 걸고 넘어지려는 狀況들을 레임덕이라고 할 수 있다.
  • 各 나라의 最高 權力者, 卽 大統領 級의 公職者의 政策 遂行에 問題가 생길 때.
  • 또한 大統領이 나온 執權黨이 議會에서 多數席을 獲得하지 못해 大統領의 政策 遂行이 問題 發生할 때. 卽, 野黨 이 시시件件 자주 걸고 넘어져서 立法 및 國政 遂行에 深刻한 妨害가 되는 것.

事實 레임덕은 언제든 어떻게든 存在할 수 밖에 없다. 메멘토 모리 를 政治 權力에 適用한 것이 레임덕이기 때문이다. 사람 이라는 存在 自體가 恒常 100%의 힘을 다할 수는 없는데다, 좋든 싫든 언젠가는 쥐었던 權力 을 내려놓아야 하기에, 레임덕은 매우 當然한 現象이다. 實際로 이런 不動의 眞理를 無視하고 權力을 維持하려다 權力 中毒으로 悲慘한 最後를 맞이한 境遇도 많다.

3. 原因 [編輯]

레임덕의 辭典的 定義는 '任期 末의 現職 權力者에게 發生하는 權力 漏水' 現象이지만, 實際로는 意味가 擴張되어 '早期 레임덕'과 같은 用語도 使用된다. 레임덕의 根本的인 原因은 權力者의 權威 實權 이 失墜되었기 때문이다. 政策 遂行이라는 것은 單純히 指導者가 願한다고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民主主義 社會는 勿論, 獨裁國家에서도 側近 및 餘他 政治人들의 補助가 맞춰져야 제 役割을 하기 때문이다. 卽, 政治 指導者의 權力이 特定 要因으로 인해 弱化되어 國政運營을 위해 必要한 人力이 指導者의 政治的 決定 및 意志를 따르지 않는 狀況이 發生하면 곧 레임덕이 된다.

다음은 레임덕이 일어나기 쉬운 狀況들이다.
  • 任期 制限으로 인해 權座나 地位에 오르지 못하게 된 境遇
    大多數 國家元首들의 레임덕을 招來하는 原因 中 하나다.
  • 執權黨의 다음 候補가 自身의 勢力을 빠르게 集結했을 境遇
    系派가 비슷하거나 같아도 問題지만 系派조차 다르다면 相當히 進行된다. 다음 執權者로 같은 黨의 後任者가 有力하다고 해도 政策의 方向이 完全히 같을 수는 없고 內閣 이 통째로 물갈이 되는 것은 避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現職 國家元首는 政策基調가 維持될 것으로 보이는 方面에서는 長期的인 方向設定에 介入하긴 힘들다고 하더라도 體面은 세울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分野에서는 뒷房 늙은이 身世를 면할 수 없게 된다.
  • 該當 地位가 廢止되었으나 남은 任期 동안 그 職責을 繼續 維持하려고 하는 境遇.
    남은 任期 동안 任期 延長, 꼭두각시 政府 等을 包含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이 境遇는 獨裁 로 惡化되기 쉽다. 引受引繼를 故意로 遲延시키거나 妨害하는 等으로 次期 行政府에 레임덕을 떠넘기기도 한다. 도널드 트럼프 가 代表的인 例로, 再選 失敗에 不服해 陰謀論에 基盤한 온갖 疑惑 을 提起하고 甚至於는 支持者들을 煽動해 國會議事堂 暴動 을 일으키고 暴動 鎭壓을 故意로 遲延시키기까지 했으나, 結局 SNS 計定 永久 停止에 內亂煽動 嫌疑로 彈劾에 몰리는 等 權力中毒의 末路를 보여주었다.
  • 任期 煎이나 任期 中 犯罪를 저질렀거나 本人 및 親姻戚의 非理가 드러난 境遇
    刑事的 불訴追 特權 때문인데, 大統領 現行 中에는 刑事的 訴追가 不可能하나, 그 期間만큼 公訴時效가 延長 된다. [6] 特權이 있어도 國會에 依해 彈劾 된 境遇에는 特權 喪失로 亦是 處罰 可能하고, 內亂 및 外換에 對해서는 아예 適用되지 않는다. 大韓民國에서는 先進國이란 이미지가 無色하게 이런 일이 絶對多數를 차지했다.
  • 任期 滿了가 얼마 남지 않은 境遇
    當然하지만 어떤 國家元首도 이것은 避해갈 수 없다. 次期 國家元首에게 言論 報道 等의 視線이 集中되기 때문에 일어나기가 쉽다고 한다. 特히 次期 國家元首가 現職 國家元首와 다른 黨, 卽 野黨 出身일 境遇 이런 現象은 더더욱 심해진다. 美國 再選 末期의 레임덕이 代表的인 境遇로, 이런 境遇는 버락 오바마 처럼 아예 抛棄하고 다음 大統領을 위해 미리 權力 移讓作業에 들어가기도 한다.
  • 任期 中에 發生한 事件·事故가 收拾이 안 되는 境遇
    本來 事件·事故는 惡材이지만 리더십만 제대로 보이면 支持率 上昇 이벤트가 되는 境遇가 많다. 그런데 國家元首가 無能해 收拾에 失敗한다거나, 與野가 힘을 合하지 않으면 收拾할 수 없는 事故인데, 政治力 不足으로 統合에 失敗할 境遇에는 겉잡을 수 없이 떨어진다. 例를 들면 잇따른 事故로 '事故 共和國'이라는 汚名을 쓰다가 IMF라는 爆彈을 맞은 金永三 이나, 自身의 失手로 인해 일을 겉잡을 수 없이 키워버린 리즈 트러스 等이 있다.
  • 老患이나 持病 等 健康上의 問題로 業務를 제대로 보기 힘든 境遇
    國家元首의 일이라는 게 매우 고된 일이니만큼 任期 時間이 지날수록 集中力이나 體力이 떨어지거나 國家元首의 健康에 異常이 생긴 境遇 業務 效率 等이 急激하게 떨어질 憂慮가 크기에, 이런 境遇는 레임덕이 올 수 밖에 없다. 健康 이상설, 精神 異常說이 돌아다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레임덕을 앞당기기 위해 陰謀論 처럼 提起되는 것이다. 이런 說들을 國家元首가 어떻게든 否定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베 新潮 가 이 쪽에선 代表的인 例로, 潰瘍性 大腸炎 때문에 總理職 辭退를 2番이나 했다.
  • 彈劾訴追 에 넘어간 적이 있는 境遇
    彈劾訴追라는 것 自體가 該當 國家元首의 資格이 疑心되어 發生하는 일이므로 設令 彈劾訴追에서 無事히 棄却되어 復職되더라도 彈劾訴追에 넘어간 일 하나만으로도 資格이 없음을 認證하는 게 된다. 때문에 이 境遇, 나쁜 건 誇大包裝 되고 좋은 건 過小評價 되는데다가 뭘 하려고 해도 反對 勢力에서 끈질기게 彈劾訴追 일을 言及하며 毁謗을 놓게 되며, 甚한 境遇 支持 勢力들조차 反對 勢力으로 돌아서서 非難하기 바쁜 身世가 된다. 實質的으로 該當 地位가 廢止되었으나 남은 任期 동안 그 職責을 繼續 維持하려고 하는 境遇와 비슷하다. 結局 復職했다 하더라도 彈劾訴追에 넘어갔을 때 이미 國家元首로서의 實質的 生命力은 끝난 거나 다름없다. [7]

當然히 좋지 않은 일이다. 제대로 쌩쌩 굴러가야 할 政策들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損害보는 일이다. 事實 이게 없으면 獨裁 가 되기 때문에 여러 牽制裝置가 存在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牽制에 자주 걸리는 것 自體가 現 政府가 잘못하고 있는 傍證이기도 하다.

設令 레임덕을 막으려고 하는 境遇가 있는데, 그러다가 權力 節制를 못하게 될 뿐더러 民心 離叛의 激化로 革命, 內亂, 民衆蜂起가 일어나는 境遇도 많다. 特히 任期 滿了가 코 앞인 境遇는 業務 人啓導 해 줘야 하기에 副作用이 더 甚하다. 게다가 레임덕 遮斷에 失敗하면 데드 德으로 이어질뿐더러 設令 레임덕 遮斷에 成功해도 그때쯤이면 自身들도 滿身瘡痍가 될 수 있으며 나라가 더 빨리 亡하게 된다. 卽 政權 再創出 및 業務 引繼를 順調롭게 行하며 自身의 政策을 次期 政府에게 承繼하는 形態로 레임덕의 水準을 낮출 수는 있어도, 完全히 막기란 不可能하다.

그 以外의 要素들을 살펴보는 境遇 非理나 낮은 支持率, 各種 政治的인 問題들은 勿論이고 甚至於 國家 首班이 問題가 없어도 側近 쪽을 털면 뭐든지 나올수 밖에 없다. 레임덕을 加速化시킬 要因들은 파면 팔수록 밑도 끝도 없이 나오니 안 일어날 수가 없다. 自身들도 썩은 걸 알면서도 물에 빠진 개(任期 末期의 大統領과 與黨)는 두들겨 패는 것(道德的 問題를 發掘하는 것)李 가장 좋은 方法임을 너무도 잘 아는 게 當代의 野黨 言論 들이다.

4. 類型 [編輯]

4.1. 大統領制 [編輯]

大統領制 國歌는 레임덕에 가장 脆弱 하다. 次期 大統領 選擧 에서 與黨 이 敗北해서 事實上 權力이 野黨 으로 넘어가면 말할 것도 없다. 設使 任期 終了 前에 選擧에서 與黨이 勝利해서 政權 再創出에 成功한다 해도 이 레임덕을 막기 힘들다. 與黨 立場에선 이미 任期가 끝나가는 大統領과 一定 距離를 두면서 새롭게 支持層을 擴大하려 하고, 이 過程에서 레임덕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렇지 않고 如前히 與黨과 大統領의 關係가 좋다고 해도, 次期 大統領이 될 人物과 그 周邊으로 政界와 言論의 포커스가 自然스럽게 맞춰진다. 이 現象은 現職 大統領에 對한 市民들의 支持率과는 無關하므로 現 大統領의 立地는 自然스럽게 더욱 좁아진다.

單任 大統領제인 境遇는 더욱 脆弱한데, 大韓民國 의 境遇 마(魔)라도 끼인 듯 제대로 끝을 본 大統領이 하나도 없었다. 大統領 重任制를 擇하고 있는 境遇에도 在任 任期 말에서는 얄짤없이 레임덕이 일어난다.

그런데 問題는 國政壟斷과 權力型 非理, 他人과의 不適切한 關係와 私生活 等 모든 大統領들의 非理가 아직도 파내면 끝없이 나온다는 것. 王政이 아닌 大統領의 任期가 存在하는 限, 레임덕은 避할 수 없다. 애初에 非理나 支持率 問題가 없더라도, 大統領 任期 末에 레임덕 現象이 일어나는 데에는 必然的인 原因이 存在하기 때문이다. 大統領을 따르던 사람들 立場에서 생각해보자. 大統領이 任期 끝나고 그만두면, 그들은 事實上 끈 떨어지는 갓 꼴이 되니까 다음 大統領이 有力한 사람에게 미리 잘 보이려고 以前까지 大統領에게 달라붙던 사람들이 次期 大權走者等에게 달라붙기 때문이다. 卽, 이는 權力이 移讓되어가는 過程에 생기는 權力 漏水 現象인 것이다. [8] 여기에, 非理나 任期末의 낮은 支持率 等의 問題는 이를 加速化시키는 要素라고 보면 된다.

任期 말이 아닌데도 不拘하고 이 事例대로 레임덕이 온 事例로 盧武鉉 朴槿惠 가 있다. 먼저 盧武鉉의 境遇, 彈劾政局 을 벗어나고 國民의 支持로 與黨인 열린우리당 總選 에서 過半席을 차지하게 됐지만, 彈돌이 들이 앞장서서 黨論을 분열시키면서 實狀은 野黨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狀況이 이어졌다. 게다가 彈돌이가 아니더래도 黨 內에선 노무현을 支持하는 勢力마저 없었는데, 鄭東泳 에게 노사모 가 吸收되고, 民평련 契는 系派의 丈人 김근태 가 少尉 階級章 떼고 붙어보자 할 程度로 노무현을 따르지 않았으며, 汎與圈으로 여겼을 민주노동당 은 노무현을 右클릭韓 背信者로 여기면서, 政策 反對를 위해 한나라黨 과 손을 잡기도 했다. 이렇게 레임덕이 오고 政府의 動力이 멈추자 노무현은 事實上 單獨 與黨의 狀況이 되어 政界 모두에게 따돌림 當하고 甚至於 國民의 支持도 멀어지게 됐다. 結局 2006年 치러진 第4回 全國同時地方選擧 에서 與黨이 歷代級으로 慘敗하며 레임덕이 심해졌고 1年 뒤인 2007年 第17代 大統領 選擧 에서 한나라당의 李明博 候補가 48.67%의 支持率로 當選되어 政權交替 가 일어나는 結果를 가져왔다. [9]

朴槿惠 또한 2016年 第20代 國會議員 選擧 때 與黨인 새누리黨 이 122席 確保에 그치는 大慘敗를 當하면서 [10] 任期가 아직 2年 가까이 남은 狀況에서 레임덕에 直面하게 되었다. 實際로 이 무렵부터 콘크리트 支持率 이었던 30%臺 支持率이 崩壞하기 始作했다. 그리고 總選 敗北 後 不過 半 年밖에 지나지 않은 時點에서 朴槿惠-최순실 게이트 라는 憲政 史上 初有의 國政壟斷 事件이 펼쳐지며 朴槿惠의 支持率은 땅 깊은 줄 모르고 푹푹 꺼지기 始作했고 김영삼이 IMF 當時 記錄했던 最低 支持率인 7%를 更新하며 無慮 4% 支持率까지 떨어져 레임덕度 아니고 데드德 狀況까지 왔다. 그리고 任期를 約 1年 앞둔 時點에서 罷免되어 任期도 못 마치고 쫓겨났다.

文在寅 政府는 最低 支持率이 29%였으며 曺國 事態 와 같은 大型 惡材가 터졌어도 코로나 事態가 發生하면서 支持率을 다시 回復하였고, 以後 열린 21代 總選 에서 壓勝瑕疵 40%臺였던 支持率이 60%까지 크게 急騰하였다. 그러나, 總選에 이긴지 얼마 지나지 않아 釜山과 서울에서의 性醜聞과 잇단 論難과 口舌數, 事件事故로 다시 30%臺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콘크리트 支持層 德分에 40%臺 初盤 支持率을 維持했지만, 支持層을 除外한 나머지 國民들에게 審判당하여 레임덕이 크게 發生한 다른 大統領들과 같이 政權을 빼앗긴 狀況에 놓이고 말았다. # [11] 그래도 예시중에선 그나마 나아보인다...

尹錫悅 政府도 初期에는 50% 初盤臺의 괜찮은 支持率을 보였고, 政府 出帆 以後 있었던 第8回 全國同時地方選擧 에서 12:5 스코어로 壓勝을 거두게 되지만 地方選擧 以後 고작 2個月 만에 支持率 下落 事態가 일어났다. [12]

또한 第22代 總選에서도 執權與黨인 國民의힘이 慘敗하며, 尹錫悅 政府의 早期 레임덕이 確實視되는 狀況이다.

4.2. 議員內閣制 [編輯]

大統領制나 聯立政權에서는 ' 與小野大 '街 發生하기 쉽지만, 兩黨制 內閣에서는 이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레임덕에 빠지기 前에 總理職에서 물러나라고 慫慂하거나 內閣不信任決議 가 通過될 確率이 높기 때문. 特히 英國 을 보면 알겠지만, 事實上 兩黨制로 運營되는 境遇라면 레임덕이 잘 發生하지 않는다.

勿論 內閣制 도 與黨이 하라는 政治는 안하고 농땡이 부리면 어김없이 레임덕이 일어난다. 總選 으로 任期가 끝나는게 아닌, 辭任으로 任期 가 끝나게 되면 黨 代表 選擧 結果 發表 前까지 레임덕 期間이 생긴다. 마거릿 對處 , 토니 블레어 , 데이비드 캐머런 , 테레사 메이 가 이런 케이스다. 最近엔 總選 敗北로 總理職을 잃은 總理 [13] 보다 辭任으로 물러난 總理 [14] 들이 더 많다. 그리고 內閣制 같은 境遇에도 執權黨이 上院 選擧나 地方選擧 , 補闕選擧 에서 慘敗하면 餘地없이 레임덕이 올 수 있다.

4.3. 聯立政權 [編輯]

聯立政權 의 國家에서도 亦是 發生하기 쉽다. 大統領制 國家야 말할 것도 없지만, 聯立政權에서는 비록 政權을 잡기 爲해 聯合을 하긴 했어도 實質的으로 各 黨은 政治 路線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狀況에서 수틀리면 '우리 다른 當하고 聯合해서 政權 세울꺼니까 알아서 하슈~' 하며 政權에서 離脫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은 時節에는 다 같이 웃을 수 있어도 힘들어지기 始作하면 누가 더 많은 讓步를 해야하는지의 協商도 갈수록 어려워질 수 밖에 없어 정작 重要한 時點에 結束力을 發揮하는게 거의 不可能해지기 때문이다.

大韓民國에서는 1997年 第15代 大統領 選擧 를 앞두고 金大中 새정치국민회의 金鍾泌 自由民主聯合 聯合하여 김대중이 大統領에 當選되어 水平的 政權交替 및 聯立政權을 이룬 것이 代表的이다. 그러나 時間이 지날수록 內閣制 改憲과 햇볕政策 에서 異見을 보이게 되어 不安한 聯政이 이어지다 2000年 第16代 國會議員 選擧 에서 聯合公薦이 霧散되어 結局 자민련은 自身들의 텃밭이던 大田廣域市 忠淸南道 에서마저 한나라黨 새千年民主黨 에게 議席을 내줘 交涉團體 構成에 失敗했다. 이에 민주당은 自黨의 議員 3名을 자민련에 꿔주면서까지 자민련의 交涉團體 構成을 도와 DJP聯合을 復元하였으나 2001年 9月 임동원 統一部長官 解任 同意案에 자민련이 贊成하면서 結局 DJP聯合은 깨지고 말았고 김대중의 레임덕은 더욱 加速化되었다.

또한 2011年 민주노동당 , 國民參與當 等이 合當해 統合進步黨 이 만들어졌으나 統合進步黨 比例代表 候補 否定競選 事件 等의 惡材가 겹쳐 結局 空中分解되었다 . 같은 政黨도 親李系, 親朴系 式으로 나뉘고 政黨의 各 系派마다 各種 이슈에 對해 다른 意見을 내놓는 境遇도 많다. 韓國에서도 이러는데 聯立 政權의 國家라면 더 甚할 程度. '레인보우 內閣'을 實施한 國家가 大部分 失敗한 것도 이러한 理解關係 때문이다.

4.4. 獨裁政權 [編輯]

獨裁 政權에서도 發生할 可能性이 높다. 自身의 壽命이 곧 任期이나, 王政 처럼 權力 承繼의 正統性 같은게 있을리가 없으므로 權力 承繼 過程에서 레임덕은 避할 수 없다. 代表的인 例가 金日成 으로 末年에 金正日 에게 實權을 거의 빼앗긴 모습을 보여주었다. [15] 統一 때문에 南北頂上會談 을 앞두고 김정일이 金日成을 暗殺 했다는 陰謀論 이 힘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獨裁의 特性上 世襲過程에서만 이러한 傾向이 자주 일어난다는 게 欠. 그러나 이는 또한 權力 移讓 이 成功的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 利器 때문에 레임덕이라고는 하지만 當事者의 計劃대로일 수도 있다.

레임덕을 참다 못한 國民이 暴動 을 일으킨 事例도 있다. 무아마르 알 카다피 가 代表的인 境遇로 카다피는 無理하게 權座를 維持하려다 結局 獨裁者가 된 事例로도 꼽힌다.

짐바브웨 로버트 무가베 도 이와 같은 事例라고 할 수 있다. 90代 高齡으로 레임덕 狀態에 빠져 '令監탱이 살면 몇 年 더 산다고...'라는 軍部의 好意에만 依存하는 狀態였으나 주제把握을 못하고 40살 年下 婦人을 副統領으로 만들려다 레임덕이 爆發, 軍部의 쿠데타로 逐出당하고 얼마 안 가 死亡했다.

5. 나라別 [編輯]

5.1. 大韓民國 [編輯]

民主化 以後 6共 大統領들의 境遇任期 前/中 犯罪나 非理, 支持率 暴落이 레임덕의 原因이다.

韓國의 5年 單任制 特性上 必然的이다. 大選走者 1名을 頂點으로 굴러가는 系派가 實權을 잡는 制度지만 制度的으로 現 執權勢力의 權力 再創出이 不可能하고, 大統領 任期동안 刑事 불訴追되는 大統領의 權限保障 特性 때문에 政權의 過誤를 退任과 同時에 몰빵海 精算당하는 것이 退任하는 大統領의 宿命이고 甚至於 任期 마지막 5年次가 되면 與黨 內部 非主流 系派들은 大選 候補 選出과 黨權 掌握을 위해 더 酷毒한 攻擊을 퍼붓는 것이 日常이다.~ 이것 때문에 87年 體制 以後 35年間 執權 與黨의 次期 大選 候補는 모두 黨內 非主流, 非黨權派에서 나왔으며, 歷代 大統領 모두가 當選 以後 最小 1~2年 안에 全 政府의 非理搜査를 强度높게 進行해 前任 大統領 或은 그 家族, 政治的 側近들을 檢察 포토라인에 세우고 大部分 政治的 處罰 또는 刑事處罰까지 때렸다. 이는 前述한 刑事불訴追 特權으로 因해 5年値 모아둔 過誤를 한番에 精算받는 意味도 있고, 次期 政權에서 急할때 支持率 上昇에 써먹을 政治攻勢로 쓰기에도 充分한 行爲다.

6共和國 大統領 中 任期 中 執權與黨을 脫黨하거나 黜黨되지 않았던 사람이 李明博 文在寅 單 두 名뿐이라는 事實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任期 末年의 大統領에게 脫黨을 要求하고 距離를 두려 애쓰는 일이 執權 與黨의 必須 코스일 程度이다. 그나마 李明博이 任期 末에 脫黨하지 않고 黨籍을 維持한 것은 박근혜가 脫黨 要求를 反對했기 때문이다. 當時 大勢論을 形成하며 保守 陣營의 大選候補로 자리잡은 朴槿惠는 公薦權과 黨權까지 모두 確保하고 非對委 體制에서 刷新을 主導하여, 大統領 任期 말이던 李明博의 存在感이 微微해졌다. 過去 金永三 , 李會昌 等 强力한 大選走者들은 大統領의 脫黨을 主張한 反面 朴槿惠는 每番 反復된 脫黨이 解決策인 적이 있냐며 오히려 黨內 脫黨 主張을 잠재웠다. 아이러니하게도 朴槿惠는 彈劾이 引用되면서 靑瓦臺를 떠나 自宅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않아 拘束되면서도 親朴 勢力의 反撥 때문에 오랫동안 黨籍을 維持하다가, 洪準杓 當時 自由韓國當 代表가 職權으로 黜黨시켰다.

文在寅 의 境遇 一旦 民主化 以後 最初의 레임덕 없는 大統領 이기는 했다. 40% 程度의 콘크리트 支持層을 確保했기에 任期 末에 與黨 에서 黜黨 或은 脫黨 要求를 할 수는 없었지만, 親文系이자 有力 大選候補였던 李洛淵 이 黨代表 時節 民主黨員들로부터 信任을 잃으면서 [16] 非文界였던 李在明 李 候補로 選出되었고, 이로써 1987年 直選制 改憲 以後 與黨의 次期 大統領 候補는 大統領 所屬 系派가 아닌 다른 系派에서 나온다는 法則은 如前히 지켜졌다. [17] 그리고 李在明 候補는 以前의 與黨 大選 候補들과 달리 政權 末 大統領 에 對한 批判을 最少化하고 本人만의 公約보다는 民主黨 政權의 連續性을 지켜달라는 方向의 遊說를 하는 것이 不可避하였다. 그러나 大選의 結果는 文在寅 政府와 對立角을 세우다 野黨 으로 들어가버린 文在寅 政府의 檢察 總長 尹錫悅 의 當選이었고, 文在寅은 最初로 政權交替 10年 週期說을 깨고 바로 野黨에 政權을 넘겨준 人物이라는 汚名을 쓰고 만다.

一般的으로 任期 末年에는 政權의 實情 等이 크게 浮刻되고 스포트라이트가 現 政府보다는 次期 大權走者들에게 쏠리기 때문에 政權交替論이 더 높게 나온다. # 그렇다고 政權交替論 支持率이 無條件 野黨 執權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데 2012年 大選을 그 一例로 들 수 있겠다. #

한便, 全?現職 大統領을 너무 攻擊하면서 이에 憤怒한 現職 大統領이 與黨의 政權 再創出을 妨害하면서 野黨으로의 政權交替 를 容認하다시피 하는 境遇도 있다. 李會昌 은 15代 大選 候補로 選出되기 위해 IMF 事態 로 政權末 民心을 完全히 잃은 YS 와 距離를 두었는데, 이게 單純 距離를 둔 게 아니라 YS와 差別化를 위해 김영삼 人形을 불태우고 상도동系 人士들의 政治的 影響力을 去勢시키는 水準이었다. 그 結果 現職 大統領이었던 YS는 與黨 候補 이회창에게 大選에서 支援射擊을 一切 안 해줬고, 이것이 李仁濟 의 獨自的 大選出馬+ DJP聯合 과 겹쳐 惡材로 作用하는 바람에 大選에서 落選했다는 假說이 있다.

또한, 就任한 大統領이 前職 大統領을 標的 搜査하면서 前職 大統領 의 支持層을 不俱戴天의 怨讐로 만드는 逆風을 自招하는 境遇도 있다. 바로 李明博 이 그러했다. 그는 執權 直後 檢察이 盧武鉉 前 大統領과 參與政府 關係者들을 먼지털이하듯 無理한 搜査를 하도록 事實上 支援했고 [18] 이러한 노무현을 同情하던 사람들의 多數가 이명박 政權에 恨을 품고 민주당系 正當 의 콘크리트가 되어 오늘날까지 큰 影響力을 行使하고 있다. 2010年代 줄곧 (그렇다고 選擧를 恒常 이긴 건 아니지만) 민주당系 政黨 支持者들 間의 團合力은 커져만 갔고, 2018~2020年에 그 絶頂을 맞았다.

5.1.1. 李承晩 政府 [編輯]

李承晩은 높은 認知度를 바탕으로 改憲을 통해 政權 延長을 여러 次例 試圖하였다. 總選 때는 自由黨이 過半을 차지하긴 하였다만 1956年 大選에서 副統領으로 場面이 當選되기도 하는 等 李承晩에 對한 絶對的인 信任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고, 무엇보다 3.15 不正選擧 로 인해 民心이 惡化되었고 4.19 革命 이 일어나면서 下野하였고, 自由黨 勢力은 沒落하였다.

5.1.2. 朴正熙 政府 [編輯]

朴正熙 또한 높은 支持度를 바탕으로 3選 改憲을 통한 政權 延長을 試圖하였으며, 끝내 維新 憲法을 宣布하여 無期限 執權하였다. 維新 體制에 對한 不滿이 在野 새力에서 나오자 1975年 朴正熙는 再信任 投票를 實施하여 反對가 나올 境遇 權座에서 물러날 것을 約束하였다. 結果는 投票率 79.8%, 贊成 73.1%가 나와 國民들이 朴正熙 政府를 다시 한 番 信任한 것으로 看做되었다. 다만 1978年 總選에서는 民主공화당이 新民黨을 相對로 敗北하였으며, 이듬해 經濟不況이 터지고 김영삼 議員을 除名하자 駙馬民主抗爭 이 터졌다. 그리고 心腹이었던 김재규 에게 암살당하여 生을 마감했다. 民主공화당은 後에 쿠데타로 執權한 新軍部에 依해 事實上 瓦解되었다.

5.1.3. 전두환 政府 [編輯]

쿠데타로 執權한 전두환은 執權 初부터 7年 單任만 할 것을 約束하였다. 勿論 退任 後 노태우를 내세우고 自身은 뒤로 물러나 上王政治를 하려고 하였으나 富川警察署 性拷問 事件 박종철 拷問致死 事件 으로 民心이 惡化되어 結局 6月 抗爭 이 일어나자 노태우로 하여금 6.29 宣言 을 하게 하였고 退任 後에는 노태우 政府와 斷絶당하였다.

5.1.4. 노태우 政府 [編輯]

始作부터 與小野大라 政局을 打開하기 위한 3黨 合黨 으로 誕生한 民主自由黨 은 自然스레 민정系 김영삼系 의 衝突이 發生했다. 그 結果 公薦에서 떨어진 人物들이 大擧 통일국민당 으로 離脫해 票를 分散시키며 第14代 國會議員 選擧 에서 約 50席이 깎여나간 149席의 成績表를 받아들게 된다. 이렇게 國會에서의 動力이 떨어진 狀況에서 次期 민정系 大選走者의 不在로 남은 黨의 主導權마저 金永三 으로 넘어가버렸고 여기에 一名 水西非理 事件 [19] 이 터지며 노태우 政府 支持率은 10%臺로 墜落, 그대로 레임덕에 빠진다. 退任할때까지 支持率은 12% 로 마무리됐다.

5.1.5. 文民政府 [編輯]

文民政府 로 國民들의 期待를 받았고 하나회 肅淸, 金融實名制 推進 等의 積弊淸算 과 政治改革으로 執權 初盤에는 83% 라는 매우 높은 支持率을 記錄하며 人氣를 얻었다. 그러나 聖水大橋 崩壞, 대구지하철 工事場 가스爆發 事故, 삼풍백화점 慘事 等 大型慘事로 輿論이 惡化되면서 레임덕에 들어서는 듯 했다. 하지만 以後 전두환과 노태우를 拘束하고 歷史바로세우기의 一環으로 朝鮮總督府를 撤去하였으며 민정系와 공화系를 탈락시키는 改革公薦을 하면서 어느程度 支持率이 回復되었다. 그러나 1996年 12月 勞動法改正波紋이 일어나 輿論이 惡化되기 始作하였고 1997年 5月 閑步 事態 로 次男이자 政權 實勢였던 김현철 이 拘束되며 本格的으로 레임덕 局面에 進入했고 11月에는 決定打로 1997年 外換 危機 까지 터지며 支持率이 6% 까지 暴落해 政權이 끝장났고 김영삼의 民主啓導 沒落하였다.

5.1.6. 國民의 政府 [編輯]

1997年 外換 危機 克服, 2000 南北頂上會談 과 같은 好材로 支持率을 끌어 올려 國民들의 많은 支持를 받았던 김대중 政府도 結局 親戚 非理를 避하지 못했는데, 一名 홍三 트리오, 김대중의 아들 3名 [20] 이 모조리 賂物 嫌疑로 搜査를 받게 되고 以後에는 及其也 不法 對北送金 事件 이 터지면서 極甚한 레임덕 狀態로 빠지게 된다. 結局 김대중은 2002年 5月 6日 當時 與黨이던 새千年民主黨 을 脫黨하게 된다. 以後 24% 의 支持率로 退任했다.

5.1.7. 參與政府 [編輯]

노무현은 元來부터 所屬된 政黨 에서의 基盤이 매우 脆弱했기에 始作부터 레임덕이라는 말이 나왔을 程度로 極甚한 黨政葛藤을 겪었고 新黨 創黨 以後 彈劾訴追까지 겪으며 彈劾 危機 에까지 몰리게 된다. 그러나 彈劾 逆風으로 第17代 國會議員 選擧 에서 與黨인 열린우리당이 過半 議席을 차지하며 政權이 安定化되는듯 했으나 參與政府의 痼疾病이었던 不動産 政策 失敗 問題로 인해 支持率이 墜落, 2年 뒤 第4回 全國同時地方選擧 에서 慘敗하고 만다. 雪上加霜으로 地方選擧 以後에 7.3 改閣 以後의 金秉準 敎育部總理 中途 落馬, 전효숙 當時 憲法裁判官의 憲法裁判所長 候補 指名 以後 落馬, 靑瓦臺 記者室 閉鎖 論難과 브리핑室 統廢合 論難, 參與政府 評價포럼 論難 等의 各種 惡材, NLL 對話錄 論難 等의 安保 關聯 論難, 바다이야기 , 제이유그룹 詐欺 事件, 전군표 國稅廳長 拘束 事件 , 신정아 게이트 等 노무현의 側近들이 連累된 大型 非理事件들과 一心會 事件 等 公安事件까지 터지면서 노무현 政權의 레임덕이 確實해졌고 支持率은 繼續 墜落하여 10%臺 初盤까지 내려갔다. 이 때 流行하던 말이 이게 다 盧武鉉 때문이다 일 程度.

結局 이를 契機로 各 系派가 離合集散으로 해쳤다 뭉쳤다를 反復하며 열린우리당의 內紛이 심해졌고, 前任 大統領 김대중처럼 2007年 2月 22日 自意半 他意半으로 當時 與黨이었던 열린우리당을 脫黨하게 된다. 다만 盧武鉉이 열린우리당을 떠난 以後, 南北頂上會談 等을 치르며 退任 直前 支持率이 오히려 上昇했고 文在寅 退任 前까지 가장 높은 支持率인 27% 로 退任한 大統領이었다.

5.1.8. 李明博 政府 [編輯]

壓倒的인 得票率 差異로 政權을 잡았고 第18代 國會議員 選擧 에서 壓勝을 했지만 親朴系가 大擧 當選되면서 親李系가 마냥 國會를 主導하였고 보기는 어려웠고 무엇보다 始作부터 狂牛病 촛불 示威 로 인해 支持率이 暴落하였다. 또한 盧武鉉 前 大統領 逝去로 인해 民主黨 支持層들이 結集하였으나 以後 刷新用 改閣으로 어느 程度 支持率을 反轉시켰고 UAE 原電 誘致를 비롯한 治績들을 나름 일궈내면서 40%臺의 安定的인 支持率을 維持했다. 그러나 不動産 政策에 對한 問題가 불거짐과 同時에 後半期에 들어서 김옥희, 추부길, 崔瑩 等의 側近들이 非理 嫌疑로 搜査를 받으며 支持率이 다시 크게 흔들리기 始作했다. 여기에 吳世勳 서울市長 辭退 , 選菅委 디도스 攻擊 , 박희태 國會議長 돈封套 論難, 파이시티 認許可 關聯 非理, 親兄 이상득 前 議員 拘束 等으로 親李系는 沒落하였고 李明博의 라이벌이었던 朴槿惠 가 非對委院長을 맡게 된다. 박근혜가 黨權을 잡으며 黨名이 한나라黨 에서 새누리黨 으로 바뀌고 黨의 主流가 親李 契에서 親朴 系로 改編되었는데, 그 結果 總選에서 親李系가 無慘히 虐殺당하며 黨內에서의 存在感이 사라지기에 이른다. 以後 任期 末까지 韓國갤럽 基準 10%臺 後半에서 20%臺의 支持率을 維持하다가 마지막 支持率 24% 로 退任했다.

5.1.9. 朴槿惠 政府 [編輯]

朴槿惠 政府는 執權 初인 2013年에 50 ~ 60%臺의 높은 支持率을 維持했었고 청해진해운 歲月號 沈沒 事故 와 여러 事件事故가 터진 2014年에도 40%臺의 支持率을 維持해 왔다. 2014年 末에 정윤회 文件 疑惑으로 支持率이 漸漸 下落하더니 2015年 1月 稅制改編, 增稅 論難으로 支持率 29%를 記錄해 30%線이 最初로 무너졌고, 以後 메르스 事態 로 인해 다시 29%를 찍으며 危機에 빠지기도 했지만 때마침 2015年 여름에 터진 北韓의 挑發로 인해 支持率이 뛰어 40%臺를 維持하게 된다.

2015年 내내 劉承旼 院內代表 와 靑瓦臺가 衝突하면서 本格的으로 非朴 親朴 系派 葛藤 이 水面 위로 떠올랐고, 2016年 第20代 國會議員 選擧 政局 동안 玉璽런 , 眞朴 鑑別師 論難 等 系派葛藤이 極에 達했다. 그러나 이런 葛藤에도 새누리黨 의 支持率이 相對的으로 安定的이었던지라 當時 輿論은 새누리당의 壓勝을 豫想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본 結果 새누리黨은 院內 第1黨 자리를 더불어民主黨 에게 뺏기게 되는 衝擊的인 結果를 받았으며 이때부터 朴槿惠 政府는 크게 흔들리기 始作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支持率 30% 初盤臺를 維持했으며 一部 言論에서는 이 數値를 安定的인 콘크리트 支持率 이라고 表現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6年 末 朴槿惠-최순실 게이트 가 世上에 알려지면서 제6공화국 政府 中 最惡의 레임덕에 빠졌고 支持率이 憲政 史上 最低値인 4% 를 記錄하면서 레임덕을 뛰어 넘은 데드德 狀況까지 이르게 되었다. 結局 朴槿惠 大統領 彈劾 이라는 結果로 이어져 親朴系度 消滅하고 불명예스럽게 退陣한다.

5.1.10. 文在寅 政府 [編輯]

한국갤럽 정부 분기별 평가 2...

朴槿惠 前 大統領 彈劾 政局에서 當選된 大統領인 만큼 80%臺의 壓倒的인 支持率로 任期를 始作했으며 1周年 支持率이 無慮 83% 였다. 曺國 事態 와 같은 各種 惡材들에도 不拘하고 平均 40%臺의 높은 콘크리트 支持率을 維持하였고, [21] 任期 3年次에 치른 21代 總選 에서 與黨인 더불어民主黨 이 180席을 가져가는 壓勝 [22] 을 거두면서 立法權力과 地方權力을 掌握하는 快擧를 이루었다. 總選 勝利 1個月 後利子 任期 3周年인 2020年 5月에는 任期 初에 나오기도 쉽지 않은 71% 라는 支持率을 찍기도 하면서, 憲政 史上 最初의 레임덕 없는 大統領이 될 可能性이 엿보였다. #

하지만 任期 4周年이 가까워지던 時期 치뤄진 2021年 再補闕選擧 [23] 直前에 LH 事態 가 發生하면서 支持率이 30%臺로 떨어졌고, 이로 인해 再補闕選擧에서도 큰 隔差로 與黨 이 慘敗하게 되면서, 韓國갤럽 基準 國政 遂行 肯定率이 29%까지 下落했다. 이에 影響을 받아 與黨 黨代表로 選出된 非文界 宋永吉 이 選出되고 文在寅 政府 의 基調인 脫原電 과 對照되는 發言을 하기도 하는 等 政府와 距離를 두는 傾向이 보이면서 레임덕을 맞이할 可能性도 생겼다. #

그러나 結果는 直選制 改憲 以後 最初로 레임덕 없는 大統領, 마이티 德 大統領 으로 남게 되었다. 再補闕選擧 慘敗 以後 韓美頂上會談 韓美 미사일 射距離 指針 廢止 等의 大統領의 外交的 行步 等이 이어지며 다시 40% 前後까지 回復勢를 보였고 再補闕選擧 3個月이 지난 7月 3週가 되자 45% 까지 올라왔다. 正確한 支持率은 文在寅/支持率 文書 參照. 이렇게 레임덕이 없는 大統領이 될 것이 確實視되자 旣存 大選 政局에선 與黨이 政權과 距離를 두고 大統領이 脫黨을 하던 慣行과는 달리 더불어民主黨 第20代 大統領 候補 競選 에서는 모든 與黨 候補들이 文在寅 의 繼承者를 自處하는 戰略을 펼쳤다. #

非文界 李在明 候補가 競選에서 選出되기는 했지만, 李在明 候補 亦是 콘크리트 勢力을 意識해 選擧 運動 내내 文在寅 政府에 對한 批判을 自制했고 더불어민주당 選對委에서는 李在明 으로의 政權 再創出을 呼訴하며 文在寅 政府로부터 政權繼承을 어필하였다. #

2022年 2月 第20代 大統領 選擧 가 한 달 남은 時點에도 文在寅 大統領의 支持率은 적게는 37%, 많으면 47%의 堅固한 支持率을 維持하고 있다. 20代 大統領 兩黨 候補인 李在明 尹錫悅 에 對한 國民의 非好感이 相當한 點, 180石과 地自體 大部分을 席卷한 與黨의 狀況으로 野黨이 文在寅 政府를 壓迫할 手段이 딱히 없는 點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任期 末期에 이르기까지 本人과 一家에 關聯해서 큰 事件이 없던 것도 큰 理由 로 꼽히는데, 文在寅 政府와 달리 歷代 民主化 以後 大統領을 보면 노태우와 李明博은 本人의 非理와 自身들의 側近들의 非理, 김영삼과 김대중은 아들의 非理, 노무현은 親兄의 非理로 困辱을 치루었고, 朴槿惠는 國政壟斷 問題로 任期를 다 마치지도 못했다.

英國 主要 時事週刊誌인 이코노미스트 의 서울支部에서는 이러한 文在寅 政府의 마이티 德 의 背景으로 防疫 政策의 成果 및 在任 期間 동안 韓國의 소프트파워 成長, 民主主義 强化 및 勞動 文化 改善 等이 主要한 原因이 되었다고 評價했다. #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文在寅은 歷代 大統領 中 唯一하게 40% 內外의 콘크리트 支持率을 維持했음에도 不拘하고, 20代 大選 에서 野黨인 國民의힘 尹錫悅 候補가 1%p 未滿의 僅少한 隔差로 勝利하고 與黨인 더불어民主黨 李在明 候補가 落選함에 따라 文在寅 政府는 1987年 直選制 改憲 以後 이어져 오던 政權交替 10年 주기說이 깨지고 마는 不名譽를 안으며 政權 연장에는 失敗한다. # 더욱이 尹錫悅 은 文在寅 政府의 檢察總長 時節 政府와 葛藤을 빚다가 辭退하고 野黨 大選候補가 된 存在였던만큼, 反文 이 아닐래야 아닐 수 없는 人物 李 大統領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尹錫悅로의 政權 交替가 決定된 以後에도 文在寅의 支持率은 딱히 흔들리지 않았고, 退任 支持率도 45% 로 마무리되었다. # # 輿論 調査機關 리얼미터는 1987年 直選制 以後 처음으로 大選에서 얻은 得票率보다 國政 評價 全體 肯定率이 높고, 마지막 任期 年次에도 40%臺를 記錄하였으며, 所屬 政黨 支持率보다 業務遂行 肯定 評價가 높은 첫 大統領이라고 評價했다. [24]

어떤 候補도 任期末 大統領보다 支持率 낮다…참 異常한 大選
任期末 40%臺 支持率 속 政權 交替…文在寅 政府 5年
幕 내리는 文在寅 政府…高空 支持率 속 政權交替의 아이러니

5.1.11. 尹錫悅 政府 [編輯]

2022年 5月 出帆하여 그로부터 3週 後인 같은 해 6月 8回 地方選擧 을 壓勝하여 새 政府에 對한 期待感이 있었지만 執權한지 不過 3個月 만에 20%臺 를 記錄하는 支持率 急落 事態 를 겪었다. 이는 第6共和國 出帆 以後 就任 以後 가장 빨리 [25] 支持率의 데드크로스 [26] 가 일어난 타이틀을 갖게 된 것이다.

絶頂은 2023年 10月 서울 講書區廳長 再補闕選擧 에서 赦免 復權되어 再出馬한 國民의힘 김태우 候補가 大敗하여 다음 總選에서 院內 過半數 獲得 展望이 不透明해졌다. 以後로 尹錫悅 政府의 初代 法務部長官을 지낸 한동훈 을 非對委院長으로 投入했지만 2024年 4月 22代 總選 에서 改憲沮止線만 겨우 지켜낸 108席을 얻는 辨明의 餘地없이 大慘敗하여 尹錫悅 政府는 歷史上 最初로 5年 내내 與小野大 政局을 보내게 되었다. 이는 保守政黨 連이은 總選 3連霸이자 歷史上 最初로 執權與黨이 最惡의 黑歷史가 된 總選으로 불명예스러운 結果였다.

特히 尹核關 呼訴人 으로 불리는 忠南 公州·扶餘·靑陽 에 6線 挑戰한 鄭鎭奭 議員은 僅少한 差異로 結局엔 落選하였고 前 靑年最高委員이었던 장예찬 亦是 過去 막말 論難 으로 公薦에서 取消당하자 不服하여 無所屬으로 釜山 水營 에 出馬하여 9.18%라는 悽慘한 得票를 얻어 第2의 姜容碩 이라고 할 程度로 選擧費用을 한 푼도 保全받지 못했다. [27]

무엇보다 本人이 그토록 牽制하던 李俊錫 [28] , 羅卿瑗 [29] , 安哲秀 [30] , 金起炫 [31] 이 모두 살아돌아왔고 過去에 自身이 檢察總長 時節 政治的으로 對立하였던 曺國 [32] , 秋美愛 [33] , 李成尹 [34] 도 全部 國會로 入城한데다가 朝中東 같은 保守言論들과 汎保守陣營 人士들조차 尹錫悅 政府와 斷絶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始作해 레임덕을 넘어 데드德을 맞이 한 것이 아니냐는 觀測이 나오고 있다.

22代 總選에서 比例代表 國會議員으로 當選된 曺國은 아예 尹錫悅의 早期 退陣을 闡明한 바 있고, 實際로 彈劾 當할 可能性도 無視하지 못한다는 意見도 없지 않다. 特히 尹錫悅 大統領 彈劾論 第22代 國會 에서 院內 野黨이 될 더불어民主黨 , 曺國革新黨 , 改革新黨 , 進步黨 , 새로운未來 5個 政黨 모두 어느 程度 共感帶를 形成해 가고 있는 狀況이고, 彈劾의 根據로 가장 有力하게 점쳐지고 있는 채상병 特檢法은 勿論 與黨에서도 4線 安哲秀 나 6線 조경태 等의 肥潤 界 人物 中心으로 叛亂票 宣言이 수두룩하게 나오고 있어 이래저래 龍山 立場에서 絶望的인 狀況이다.

總選 以後로 나타난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韓國리서치가 지난 2024年 4月 15∼17日 全國 滿 18歲 以上 男女 1千4名을 對象으로 進行한 全國地表調査(NBS)에 따르면 尹 大統領의 國政 運營에 對해 '잘하고 있다'는 27% , '잘못하고 있다'는 64% 였다. 2週 前 調査보다 肯定 評價는 11%p 내렸고, 不定 評價는 9%p 올랐다. # #

서울은 肯定 30%·否定 59%, 仁川/競技는 肯定 24%·否定 69%, 大戰/世宗/忠淸은 肯定 23%·否定 65%, 光州/全羅 肯定 15%·否定 78%, 釜山/蔚山/慶南 肯定 38%·否定 54%, 江原/濟州 肯定 12%·否定 76%로 나타났다. 特히 大邱/慶北에서조차 肯定 41%·否定 55%로 不正이 優勢했다.

年齡別로는 18~29世는 肯定 17%·否定 64%, 30代 肯定 17%·否定 72%, 40代 肯定 15%·否定 78%, 50代 肯定 24%·否定 74%, 60代 肯定 40%·否定 55%로 集計됐다. 다만, 70代 以上에서만 唯一하게 肯定 54%·否定 38%로 肯定이 높았다. 甚至於 保守層에서도 肯定 57%로 否定(37%)과 差異가 크지 않았다. 또, 中道層에서는 肯定 18%·否定 73%, 進步層에서는 肯定 5%·否定 90%로 不正이 壓倒的으로 높았다.

한便 2024年 4月 19日 發表된 韓國갤럽 輿論調査 [35] 上으로는 大統領 職務 遂行 肯定評價 比率이 아예 23% 로, 20%臺 初盤이라는 記錄的인 暴落을 보였다. 直前 調査 對比 下落幅은 NBS 調査와 마찬가지로 11%p였다. 또 不正評價 比率도 68% 로 直前 조사의 58% 對備 10%p나 뛰었다. 또 政黨 支持率에 있어서도 같은 期間 제1야당인 더불어民主黨의 支持率 上昇 幅은 2%p에 그친 反面, 與黨인 國民의힘의 支持率은 7%p 急落하면서 第22代 國會議員 選擧 를 契機로 政黨別 喜悲가 크게 엇갈리는 모습이 繼續되었다.

5.2. 美國 [編輯]

美國 과 같이 大統領 4年 重任制를 擇하고 있는 境遇에도 在任 任期 말에서는 얄짤없이 레임덕이 일어난다. 美國은 任期末에 일어나는 레임덕을 줄이기 爲해 [36] 修正憲法 第20條 1項에 따라 1933年부터 [37] 次期 大統領의 任期 始作을 3月 4日에서 1月 20일으로 앞당겼지만, 레임덕은 어김없이 일어났다. [38] 레이건 만 봐도 이미 任期 終了 1年 前부터 레임덕을 겪은 바 있다.

再選을 앞둔 時期에 支持率이 脆弱해 再選의 可能性이 없는 境遇도 發生한다. 實際로 린든 존슨 의 境遇 1964年 大選에서 壓倒的으로 이겼고 1968年 大選에도 나올 수 있었지만, 베트남 戰爭의 長期化로 인한 輿論 惡化, 健康 問題로 現役 大統領임에도 1968年 大選候補 競選 初盤부터 不振한 成績이 나오자 바로 競選 候補에서 辭退했다.

1990年 以後부터는 繼續 與黨이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아버지 부시 (共和黨, 4年) → 빌 클린턴 (民主黨, 8年) → 아들 부시 (共和黨, 8年) → 버락 오바마 (民主黨, 8年) → 도널드 트럼프 (共和黨, 4年) → 조 바이든 (民主黨) 順序대로 大統領이 就任했다.

5.3. 蘇聯 [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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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聯 共産黨 의 마지막 書記長 미하일 고르바초프 는 執權 末期 蘇聯 의 國力 下降과 맞물려 分明 權力은 下降하고 있는 狀態였는데 以後의 權力 變化는 現代에는 매우 보기 드문 形態로 일어나게 되었다. 고르바초프가 退陣하고 이를 前後로 蘇聯 憲法 을 民主主義에 맞는 形態로 國家 두마 에서 새로 만들어 國民投票 를 거치는 것이 當時 생각할 수 있는 常識的인 權力 承繼 節次였고 고르바초프도 이 程度의 選擇肢를 받아들일 準備는 되어있는 것으로 보였다. 고르바초프의 레임덕은 적어도 初期에는 고르바초프 自身이 만든 時間表에 따라 計劃的이고 精巧하게 進行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8月 쿠데타 는 고르바초프의 이러한 빅 픽처 에 致命打를 加하게 되었다. 쿠데타는 鎭壓되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저물어가던 고르바초프의 權力은 統制 不可能한 速度로 墜落하기 始作했고 그에 比例해서 쿠데타 鎭壓의 英雄으로 떠오른 러시아 共和國 大統領 보리스 옐친 은 고르바초프의 權力을 빠르게 蠶食해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새롭게 實權者가 된 보리스 옐친 은 民主主義 導入에는 고르바초프와 딱히 異見이 없었고 冷戰 을 벗어나 팍스 아메리카나 의 時代로 進入하는 美國 의 눈 밖에 나는 짓을 敢히 할 수 있는 狀況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옐친은 蘇聯이 繼續되는 것 에는 고르바초프와 意見을 달리했고 結局 蘇聯은 國家가 하루아침에 모조리 空中分解 되어버리고 所屬 共和國들이 全部 獨立解 제 갈길을 가게 되어버리며 蜃氣樓처럼 사라져버렸다. 外敵의 侵入도, 內亂 도, 쿠데타 도, 民衆 蜂起도 아닌 自國 政治人들의 署名 한 番 에 나라 自體가 사라져버린 보기 드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고르바초프 의 레임덕은 그저 執權者 個人의 레임덕이나 蘇聯 共産黨 이라는 執權黨의 레임덕이 아니라 蘇聯 이라는 國家 自體의 레임덕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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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할 일이 너무 없어서 綠地 造成을 한답시고 잔디를 깎고, 힐러리 클린턴 은 直接 챙겨준 點心을 生까고 車 타고 가고, 그러다가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고 戰爭 狀況室 에서 休 셀튼 合參議長 배틀十 을 하고, 元來는 俳優가 되고 싶었다면서 오스카賞 트로피를 들고 演說 練習을 하다가 眞짜로 受賞한 케빈 스페이시 가 가져가버린다. [2] 조 바이든 副統領 執務室에 가서 執務室 소파에 누워 썬글라스를 닦는 副統領과 얘기하고 運轉免許證을 따거나 스포츠 코치를 해보라는 바이든의 助言에 大統領 執務室에서 NBA 팀인 워싱턴 위저즈 한테 求職 電話했더니 딸 팀 코치 經歷이 있다고 얘기를 해보지만 까이고 退任을 앞두고 自身이 運轉을 다시 해야 할 것 같아서 運轉免許證 을 更新하러 갔더니 그 놈의 出生證明書 를 가져오라고 하고(과거 提起된 出生疑惑을 패러디한 것), 아내의 스마트폰으로 自身의 醫療保險 에 加入하라고 勸誘하는 動映像을 스냅챗 으로 보냈는데 何必이면 렙틸리언 처럼 보이는 필터가 걸려있어서 아내가 辱을 얻어먹는다. 結局 業務도 내팽개치고 존 베이너 前 下院議長이랑 신나게 映畫나 보고 골프나 每日 치러 가지만 아무도 神經쓰지 않는다. [3] 마지막에 'Breaking News'(速報)로 '오바마 前 大統領이 골프를 347 라운드 째 도는 中'이라는 字幕이 나오는데, 實際 Breaking News에는 저런 게 나올 理 없을 뿐만 아니라, 2017年 初까지 現職이었던 오바마를 '前 大統領'이라 대놓고 얘기했다. [4] 主로 80~90年代까지는 이 用語를 더 많이 썼다. [5] 普通 大選 때 받은 得票率을 任期 末까지 그대로 維持하는 境遇이면 마이티德이라 할 만하다. [6] 正確히는 公訴時效 停止 다. 불訴追 特權은 公訴時效 停止의 代表的인 事由다. 停止 事由가 사라지면 그때부터 公訴時效가 適用된다. [7] 다만 例外도 存在하는데, 盧武鉉 大統領 彈劾 訴追 처럼 政敵들의 政治的 目的 下에 이루어진 彈劾 訴追의 境遇나, 도널드 트럼프 처럼 이미 執權黨이 議會를 掌握하고 있고, 執權黨을 支持하는 勢力이 該當 大統領을 盲目的으로 따르는 極端的 勢力일 境遇 深刻한 레임덕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트럼프는 2020年 1月 彈劾訴追에 넘어갔지만 上院에서 否決된 뒤에도 上院의 힘으로 大統領 業務를 遂行하고 있고(트럼프의 境遇 레임덕이 맞지만 株 原因은 코로나 때문으로 코로나로 因해 레임덕이 온 國家元首가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을 勘案하면 異常하眞 않다) 盧武鉉의 境遇 彈劾 訴追로 오히려 彈劾派가 逆風을 맞았고 與黨이 總選에서 勝利했다. 當時 이게 다 盧武鉉 때문이다 現象 亦是 參與政府 末期 政府의 實情 等으로 인해서 나타난 것이지 彈劾 訴追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8] 普通 大統領 任期 末期에 任命되는 사람은 任期 初期의 人士보다 政策에 對한 理解度가 낮고 危險負擔은 크기 때문에 任期 末期의 人事는 純長調라 불릴 程度로 待接이 좋지 않으며 大選은 勿論 支線에서 野黨 候補의 勝利가 豫測되는 境遇 核心 人士들이 스스로 辭表를 쓰는 形態로 물러나기도 한다. [9] 無所屬으로 나왔던 保守 性向의 李會昌 候補의 票까지 세면 50%를 훌쩍 넘긴다. 反面 鄭東泳 候補는 得票率 26%로 大幅亡하여 大選 最低 得票數를 記錄,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10] 더불어民主黨 123席, 새누리黨 122席, 國民의黨 38席, 正義黨 6席을 記錄했다. [11] 甚至於 6共 樹立 以後 10年 週期로 保守-民主 政權交替가 이뤄지던 것(盧泰愚(保守)-金永三(保守)-김대중(民主)-盧武鉉(民主)-李明博(保守)-朴槿惠(保守))李 最初로 깨졌다. 10年 週期를 따르면 朴槿惠는 保守, 文在寅은 民主이므로 다음 大統領도 민주당系 政黨에서 이뤄져야 하는데 다음 大統領은 保守 系列 政黨人 尹錫悅이다. [12] 이것도 異例的인데 朴槿惠 政府는 就任 22個月만에 文在寅 政府는 29個月만에 支持率 40%臺가 무너졌다. 거의 任期의 半 或은 1/3 程度는 一定 程度의 支持率은 維持한 것. 그런데 尹錫悅 政府는 고작 2個月만에 무너졌으니 事實上 出帆하자마자 支持率이 暴落한 것이다. [13] 保守黨 존 메이저 (1997), 勞動黨 고든 브라운 (2010) [14] 保守黨 마거릿 對處 (1990), 데이비드 캐머런 (2015), 테레사 메이 (2019), 보리스 존슨 (2022), 리즈 트러스 (2022), 勞動黨 토니 블레어 (2007) [15] 김일성이 김정일을 讚揚하는 詩를 쓰는가 하면 김일성이 김영삼政府와 南北頂上會談을 積極 試圖하고 있을때 김정일이 老妄이 나서 統一을 主張한다 라고 한 것이 代表的인 例示다. [16] 黨憲 改正을 强行하여 민주당 候補를 無理하게 내세웠지만 2021年 再補闕選擧 에서 慘敗했던 것과, 朴槿惠 前 大統領 赦免發議를 恣行한 것이 컸다. [17] 政權 再創出에 成功한 境遇만 보더라도 盧泰愚 ( 민정系 )- 金永三 ( 상도동系 ), 金大中 ( 동교동系 )- 盧武鉉 ( 親盧 ), 李明博 ( 親李 )- 朴槿惠 ( 親朴 )으로 系派가 全部 다르다. [18] 參與政府의 任期末 支持率은 10%臺 水準으로 低調했음에도, 李明博 政府 初期 履行된 盧武鉉 前 大統領 當時 搜査에 對한 輿論은 '政治報復이다'는 輿論이 60%臺로 나왔다. 박연차 게이트 文書 參考. [19] 한보그룹 鄭泰守 會長이 노태우에게 直接 150億원을 건내며 水西, 對峙 宅地 開發 豫定 地球를 特定組合에 分讓 特惠를 준 非理 事件이다. [20] 金弘一 , 金弘業 , 金弘傑 . [21] 曺國 事態 때 39%로 잠깐 떨어진 게 처음으로 40% 以下로 떨어진 瞬間이었다. [22] 코로나19 時局 初期 政府의 對處가 好評을 받으며 安定的인 코로나 克服을 바라는 中道層들이 민주당에 大擧 票를 던졌다. [23] 朴元淳 서울市長 의 死亡, 吳巨敦 釜山市長 의 辭退로 規模가 큰 再補闕選擧였다. [24] 事實 20代 大選 은 文書를 보면 알겠지만 尹錫悅 李在明 間의 非好感 選擧 라는 別稱이 붙었을 程度로 黨籍이 아닌 候補 個個人의 이미지와 力量에 큰 關心이 쏠렸던 選擧이다. 卽 文在寅 本人의 支持率과는 영 다른 結果가 나온 것이 아주 異常한 일은 아니라는 것. [25] 就任 後 60日 만이다. [26] 大統領 支持率의 不正이 肯定을 逆轉하는 現象 [27] 다만 姜容碩 은 2012年 19代 總選 當時 現役 議員으로 出馬했음에도 不拘하고 4.29% 라는 得票率을 받으며 慘敗했다. [28] 京畿 華城市 을 (初選) [29] 서울 銅雀區 을 (5線) [30] 京畿 성남시 분당구 甲 (4線) [31] 蔚山 南區 을 (5線) [32] 22代 比例代表 議員 (初選) [33] 京畿 河南市 甲 (6線) [34] 全北 全州市 乙 (初選) [35] 尹 支持率 23%, '날리면' 論難 때보다 더 떨어졌다… 就任 後 最低値 , 갤럽度 尹 支持率 11%p 急降下..肯定評價 23% '歷代 最低値' [36] 美國 大統領 選擧일은 11月 첫째 月曜日이 있는 注意 火曜日인데 大槪 11月 첫째週이다. 大統領이 落選하거나 再選任期末이라면 旣存의 憲法아래서는 3月까지 4個月 程度를 레임덕 狀態로 보내야 하는데 1月로 당길 수 있다면 레임덕 期間이 거의 折半이 된다. [37] 批准은 이 해에 됐지만 適用은 1937年 2期 任期 始作부터 適用됐다. 그래서 루스벨트의 1期 大統領 任期는 滿 4年이 안된다. [38] 任期 始作일을 바꾼 本人은 獨逸이 降伏하기 한 달 前에 腦溢血로 死亡해서 따로 레임덕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뒤를 이어 트루먼, 아이젠하워, 暗殺된 케네디, 린든 존슨 까지 任期末에 人氣를 누리며 退任했으나 그를 이은 리처드 닉슨은 傳說의 워터게이트 事件으로 제대로 레임덕을 겪고 美國大統領 最初로 辭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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