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통찰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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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09.28. 오후 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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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밤을 가로질러
ㆍ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전대호 옮김
ㆍ해나무 | 352쪽 | 1만6000원



“잠은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수면 중인 뇌는 비록 ‘무의식’이지만

낮의 ‘의식’을 복기하며 낮이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 깨닫게 된다.

때문에 ‘밤의 시간’, 즉 수면이 없다면 깨달음의 기회는 없다”


밤은 고요하다. ‘욕망하는 나’에 대한 성찰은 낮보다 밤에 더욱 명징하다.

칸트는 밤하늘의 어둠을 바라보면서 “숭고한 감정에 압도된다”고 했다. 릴케는 “나의 기원인 너, 어둠이여”라고 노래했다. 러시아 출신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브코프도 “(인간의 삶이란) 두 개의 영원한 어둠 사이에 난 덧없는 틈새”라는 말을 남겼다. 인간은 밤에서 나와 밤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지난 8월 타계한 한국의 불문학자 황현산도 “밤이 선생이다”라고 언명했다.

이 책은 밤에 대한 예찬이다. 밤이야말로 인간적 삶의 본질을 품고 있다는 메시지를 시종일관 견지한다. 책은 “어둠은 모든 것의 출처이며, 따라서 모든 것을 품을뿐더러, 모든 것을 남몰래 간직한다”라는 말로 문을 연다.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통찰은 어둠 속에서 내딛는 첫걸음을 요구한다. 세상이 고요해야 비로소 소리가 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통찰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다. 어둠은 모든 개인의 실존을 불가피하고 무자비하게 에워싼다. 현존하는 세계와 거기에 사는 모든 인간들은 어둠에서 유래했다. 신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어둠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어둠은 그대로 남았고 심지어 더 굳건해져서 확실히 삶에 편입되었다.”

이 명상적인 문장을 접하는 순간, 저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아마도 철학자이거나 시인이지 않을까라는 상상을 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과학자다. 국내에 이미 10여권의 책이 번역돼 있는, 올해로 71세를 맞은 저명한 저술가이기도 하다. 저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는 독일 쾰른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고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에서 생물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지금은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과학사를 가르친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결합된 글쓰기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지 오래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별밤의 산책자들> <과학을 배반하는 과학> <아인슈타인> <막스 플랑크 평전> 등이 국내에도 나와 있다.

이번 책은 2015년 독일 쾰른에서 출간된 원서를 우리말로 옮겼다. 독일어 제목은 ‘Durch die Nacht’다. 한국어판의 제목인 ‘밤을 가로질러’는 충실한 직역이다. 피셔의 전작들이 그렇듯이 이번 책도 과학과 문학, 역사, 철학 등을 가로지르며 밤의 의미를 탐색한다. 일단, 과학적 설명에서 출발한다. ‘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지구의 그림자’라는 답변이 나온 것은 16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이어서 저자는 “밤의 색깔인 검은색”이 주는 매혹과 “우주의 시초를 지배한 어둠”에 대해 거론한다.

에곤 쉴레 ‘죽음과 처녀’(1915).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미술관 소장


그렇게 책의 초반에 등장하는 자연과학적 서술은 일종의 워밍업이다. 저자의 인문학적 박람강기는 ‘이중생활’이라는 제목을 지닌 두 번째 장에서부터 터져나온다. 그는 성직자이자 작가였던 필립 발타자르 지놀트(1657~1742)가 ‘나흐트레벤(Nachtleben, 밤의 삶)’이라는 단어를 고안했음에 착안, “(인간이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밤을 발견하고 생활 혹은 체험에 추가한 것은 바로크 시대부터”라고 추정한다. 그렇다면 밤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저자는 “모든 구경꾼과 통제로부터 풀려난 시간”이며,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라고 언급한다. 하지만 밤은 이중적이다. 포근하고 황홀하고 달콤한 동시에, 외롭고 은밀하며 방탕하다. 그래서 밤은 매혹이면서 두려움이다. 책에 수록한 에곤 실레의 회화 ‘죽음과 처녀’는 밤의 이중성을 표상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밤은 수면의 시간이다. 한데 이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다. ‘우리는 왜 잠을 자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독일의 신경과학자 페터 슈포르크의 말을 인용해 답한다. “우선 명확히 해둬야 할 것은 휴식을 위해 자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라면서 “에너지 절약과 기력 회복, 성장, 재생 같은 것들은 잠을 자는 이유 중에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을 알아채기 위해서”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수면 중에 뇌에서 일어나는 일은 비록 무의식이지만, 그 산물은 낮의 의식 덕분에 획득된 내용과 대등하게 맞서서 균형을 가능하게 한다. 그때 우리는 낮이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 깨달을 수 있다. 수면이 없다면 깨달음의 기회는 없다.”

밤과 꿈을 사랑한 이들은 낭만주의 예술가들이었다. 낭만의 포문을 열어젖힌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는 1800년경 ‘밤의 찬가’를 지어 “은밀한 밤을 포용”했다. 소설가이자 작곡가였던 E T A 호프만은 ‘밤 풍경들’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에서 “뉴턴의 우주는 세계 전체가 아니며 그 우주의 저변에 무언가 다른 것이 웅크리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물론 밤에 대한 예찬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면서 ‘찬란한 빛’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존 컨스터블의 회화에 등장하는 밝은 구름, 윌리엄 터너가 묘사한 눈부신 햇살은 “빛 찬양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저자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러시아의 미래파 화가 카시미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을 거론하면서 다시 한번 ‘밤’에 대한 애정을 피력한다. “‘검은 사각형’ 앞에 선 관람자는 어둠 속에 들어 있는 힘을 감지한다. 사람들은 이런 창조적인 밤을 믿는다. 사람들 자신도 밤에서 기원해 밤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삶은 밤을 통해 가치를 얻는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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