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릿한 한 방’ 야구사에 남은 홈런의 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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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9월 14일 시애틀이 애너하임 에인절스와 벌인 원정경기 1회초. 아버지 켄 그리피 시니어는 좌중간 2점 홈런을 쳤다. 그리고 다음 타석에 들어선 아들 켄 그리피 주니어는 아버지가 때린 바로 그 자리로,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은 ‘부전자전’ 연속타자 홈런을 쳤다.

뉴욕 양키스 데릭 지터가 2014년 7월 미국 미니애폴리스의 타깃필드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서 4회초에 교체돼 그라운드를 떠나면서 관중석의 환호에 손을 들어 답례하는 모습. / AP연합뉴스


메이저리그는 30개 구단의 전 구장에 ‘스탯캐스트’라는 야구공 추적장치를 달았다. 경기 중 야구공이 움직이는 위치와 속도는 물론 공이 회전하는 숫자까지 파악할 수 있는 장치다. 이 장치로 모은 데이터를 통해 ‘야구의 꽃’이라 불리는 홈런의 비밀이 조금 드러났다. 홈런이 될 가능성이 높은 타구는 타구 발사각도 22~28도 사이, 타구속도 시속 140㎞ 이상의 타구다. 적당히 높은 각도로 강한 타구를 때리면 홈런 가능성이 높아진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보다 높은 각도로 강하게 때리는 데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리그의 홈런 숫자가 크게 늘었다.

홈런의 비밀을 알게 된다고 해도 홈런의 멋까지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여전히 최고의 홈런은 속도와 비거리의 기록을 경신한 홈런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속에 깊이 남은 홈런이다. 155m짜리 대형 홈런보다 ‘문 샷(Moon shot)’이라 불리는, 달나라까지 날아갈 것 같은 홈런이 더욱 인상적이다.

야구 중계 역사를 바꾼 피스크의 홈런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 펜웨이파크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오래된 구장이다. 1911년 9월 25일 개장해 올해로 108년째를 맞는다. 구장 색은 온통 초록이다. 펜스와 그라운드, 의자와 통로, 벽이 모두 초록으로 칠해져 있다. 야구팬들에게 유명한, 외야 왼쪽에 우뚝 서 있는 크고 높은 담장은 이름이 그래서 ‘그린 몬스터’다. 그린 몬스터 옆 왼쪽 담장 파울 폴은 ‘피스크 폴’이라 불린다. 포수 칼튼 피스크의 이름을 땄다. 피스크는 1975년 신시내티와의 월드시리즈 6차전 연장 12회말 펜웨이파크 왼쪽 담장 파울 폴을 때리고 떨어지는 끝내기 홈런을 때렸다. 메이저리그는 물론 야구 중계의 역사를 바꾼 홈런이었다.

그 전까지의 중계는 날아가는 공을 연거푸 보여주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피스크의 끝내기 홈런 때 중계방송은 홈런 직후 리플레이 때 공 대신 홈플레이트에서 1루 쪽으로 옆걸음으로 펄쩍 뛰면서 두 손을 휘두르는 피스크의 모습을 내보냈다. 외야 카메라 위치에 갑자기 쥐가 나타나 카메라맨이 놀라는 바람에 우연히 잡힌 장면이라는 설도 있지만 이 홈런 이후 야구 중계가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바꿨다. 야구 중계의 가치와 효과가 바뀌었고 중계권료가 폭등하기 시작했다. 팬들은 공이 아니라 피스크의 꾸밈없는 환호의 표정에 깊이 공감했다.

펜웨이파크 오른쪽 외야 관중석, 42구역 37열 21번 좌석은 조금 특별하다. 팀 이름 ‘빨간 양말(레드삭스)’과 달리 온통 그린으로 물든 야구장에 딱 하나 빨간 의자가 놓여 있다. 특별한 홈런을 기리는 좌석이다. 보스턴 팀 사상 최고의 타자이자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는 1946년 6월 9일 경기에서 오른쪽 외야 담장을 훌쩍 넘어가는 대형 홈런을 때렸다. 홈런 공은 건축기술자였던 조셉 바우처의 모자에 맞고 떨어졌다. 펜웨이파크 역사상 가장 멀리 날아간 홈런이었다. 1984년 구단은 역사상 가장 큰 홈런을 기리기 위해 바우처가 앉아 있던 그 자리를 빨간 의자로 바꾸는 행사를 치렀다.

‘세계에 울려퍼진 한 방’이라는 별명을 가진 홈런도 있다. LA 다저스의 전신 브루클린 다저스는 1951년 시즌, 뉴욕 자이언츠에 10경기 이상 앞선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다저스의 우승이 눈앞에 보였다. 그런데 자이언츠가 시즌 막판 47경기에서 39승을 거두며 공동 1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결국 월드시리즈 진출을 놓고 3전2선승제의 플레이오프를 치렀고 마지막 경기에서 2-4로 뒤진 9회말 자이언츠의 바비 톰슨이 끝내기 3점 홈런으로 다저스 팬을 울렸다. 그 홈런의 별명이 ‘세계에 울려퍼진 한 방(Shot Heard Round the World)’이다. 원래 이는 에머슨의 시에 나오는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을 뜻하지만, 그만큼 ‘역사적인 홈런’이라는 뜻을 담았다.

물론 다저스 팬을 기쁘게 만든 홈런도 있다. 1988년 오클랜드와의 월드시리즈 1차전 3-4로 뒤진 9회말, 토미 라소다 감독은 부상에 장염이 겹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타자 커크 깁슨을 대타로 내세웠다. 깁슨은 절룩이며 타석에 들어섰고, 리그 최고 마무리 데니스 에커슬리를 상대로 풀카운트에서 바깥쪽 백도어 슬라이더를 걷어 올렸다. 깁슨은 홈런을 때린 뒤 다리를 절룩이며 베이스를 돌았다. 손으로는 연신 어퍼컷 세리머니를 하고 있었다. 그 홈런에는 ‘깁슨의 홈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차전 승리와 함께 4승1패로 우승했는데, 다저스로서는 아직 다시 맛보지 못한 월드시리즈 우승이었다.

양키스의 ‘미스터 악토버’ ‘미스터 노벰버’

홈런인 듯 아닌 듯 홈런 같은 ‘역사적인 홈런’도 있다. 1996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는 뉴욕 양키스와 볼티모어가 맞붙었다. 1차전 뉴욕 양키스는 8회말까지 3-4로 뒤져 있었다. 양키스 신인 타자의 타구가 양키 스타디움 오른쪽 담장 앞을 향했다. 볼티모어 우익수 토니 타라스코가 이 공을 잡기 직전, 관중석에 있던 12세 소년 제프리 메이어가 이를 먼저 잡았다. 비디오 판독이 없던 시절, 팬의 수비 방해가 아닌 홈런이 선언됐고, 양키스는 연장 끝에 1차전을 잡았다. 양키스는 기세를 몰아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따냈다. 1978년 이후 18년 만에 따낸 양키스의 우승이었다. 12세 소년 메이어는 양키스 우승을 만든 영웅이 됐다. 그 홈런을 때린 신인 타자는 ‘미스터 캡틴’, ‘양키스의 심장’이라 불리는 데릭 지터였다.

지터는 ‘미스터 노벰버’라는 별명도 얻었다. 원래 가을의 사나이는 ‘미스터 악토버’다. 포스트시즌이 10월에 열리기 때문이다. ‘미스터 악토버’는 지터의 양키스 선배이자 전설인 레지 잭슨의 별명이다. 잭슨은 1977년 다저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5차전 마지막 타석 홈런에 이어 6차전 첫 3타석에서 모두 홈런을 때려 월드시리즈 4연타석 홈런을 기록했다.

‘미스터 노벰버’는 2001년 월드시리즈에서 얻은 별명이다. 그해 9·11 테러 때문에 야구 일정이 늦춰졌고, 현지시간 10월 31일 시작한 월드시리즈 4차전이 연장에 돌입하면서 자정을 넘겨 메이저리그 첫 11월 경기가 만들어졌다. 3-3으로 맞선 연장 10회말 지터가 타석에 들어섰고, 초구를 밀어 때려 오른쪽 담장을 넘기는 끝내기 홈런을 만들었다. 지터는 오른손을 쭉 뻗으며 환호에 답했다. 양키스타디움 전광판에 ‘미스터 악토버’에 빗댄 ‘미스터 노벰버’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그 홈런을 맞고 씁쓸한 표정으로 마운드를 내려온 투수는 애리조나의 마무리 김병현이었다.

메이저리그 사상 가장 진기하고 극적인 홈런은 1990년 9월 14일 나왔다. 시애틀이 애너하임 에인절스와 벌인 원정경기 1회초. 아버지 켄 그리피 시니어는 좌중간 2점 홈런을 때리고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그리고 다음 타석에 들어선 아들 켄 그리피 주니어는 볼카운트 0-3에서 아버지가 때린 바로 그 자리로,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은 ‘부전자전’ 연속타자 홈런을 때려 넘겼다. 아버지는 홈플레이트를 밟고 들어오는 아들에게 말했다. “잘했어, 홈런은 바로 그렇게 치는 거야.”

홈런은 숫자가 아니라 가슴에 남는다. 휘영청 솟아오른 커다란 보름달을 향한 ‘문샷’이 23도 각도에 147㎞ 시속으로 날아가 128m자리에 떨어진 홈런보다 더 낭만적이다. 지금, 가슴에 남는 홈런이 적은 것은 어쩌면 홈런이 너무 많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용균 스포츠경향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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