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노동자 희생 위에 쌓은 부…소명의식 옅은 ‘한국적 기업가정신’ [강진구의 고전으로 보는 노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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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광주형 일자리’ 반대 지난 6일 현대자동차 노조가 울산공장에서 ‘광주형 일자리’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광주형 일자리 프로젝트는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지역과 민간기업의 협력모델로 관심을 모았으나, 최근들어 간접고용과 저임금에 의존하는 대기업의 손쉬운 돈벌이에 이용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연합뉴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하나님을 위한 성스러운 노동이 자본의 쇠창살에 갇혀 ‘의미 빈곤’에 시달리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노동은 힘들고 괴롭지만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처럼 생각되고 있지만 노동이 언제나 소극적인 의미만을 부여받은 것은 아니다.

베버에 따르면 직업을 의미하는 독일어 ‘베루프(Beruf)’는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하나님이 수여한 과업’의 의미를 갖게 됐다. 마르틴 루터가 ‘너의 일에 머물러라’라는 성경구절(집회서 11장 20~21절)을 ‘너의 직업에 머물러라’로 번역하면서 일과 직업을 대하는 개신교도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세속의 일상적인 노동을 존중하는 태도는 중세시대에도 존재했지만 루터의 성경 번역은 직업적 의무를 최고의 도덕적 행위로 끌어올렸다. 루터는 각자가 직업을 가지고 성실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계명인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봤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우리가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도축업자·양조업자·제빵업자의 호의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추구 덕분”이라고 주장한 것과 정반대 입장에서 노동과 분업의 의미를 파악한 것이다.

하지만 스미스가 강조한 인간의 이기심 대신 이웃 사랑을 강조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자본주의 정신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독일엔 ‘축복’이 아니라 ‘장애물’이었다. 루터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자신에게 필요한 것 이상의 이윤추구에는 반대했다.

반면 17세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생겨난 청교도들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들에겐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노동을 조직해 이윤을 축적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허용됐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의 영혼에 해롭지 않은 방법으로 더 많은 이윤을 낼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는데도 그 길을 거부하고 더 적은 이윤을 내는 길을 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준 신성한 소명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영국의 청교도 지도자 리처드 벡스터)

구원예정론에 입각해 구원받을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 청교도들에게 부의 축적은 구원의 확실성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동시에 노동의욕이 없는 것은 구원을 받지 못한 증표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노동을 하지 않고 헛되이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가장 큰 죄였다.

막스 베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직업 활동은 ‘이웃사랑의 실천’ 의미 얻어

베버는 청교도 신앙에서 ‘시간은 돈’이라는 자본주의 뿌리 발견

독점·특권의 귀족과 대자본에 대항하면서 성장하는 기업가 그려


최근 경제침체를 최저임금 인상이나 노조의 발목잡기 탓으로 돌리며

저임금·고용유연성·규제완화에 기대 쉽게 돈 벌려는 한국 기업가들…

베버가 보기에 그들은 노동을 차가운 쇠창살에 가둔 자들이 아닐까


베버는 이 같은 청교도 신앙에서 ‘시간은 돈’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정신의 뿌리를 발견한다.

하지만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은 ‘돈욕심’과는 구분된다. 베버는 미국 기업가의 모범으로 통하는 벤저민 프랭클린과 유럽 최고의 갑부였던 야곱 푸거(1459~1525)를 비교하며 자본주의 정신을 설명한다. 프랭클린은 <젊은 상인에게 주는 충고>(1748)에서 “시간과 신용이 돈임을 명심하라”고 말한다. 5실링의 가치에 해당하는 시간을 쓸데없는 데 낭비한 사람은 5실링을 바다에 던져버린 것과 같다는 것이다. 푸거 역시 ‘다른 사람들이 돈을 벌 수 있게 은퇴하는 것이 어떠냐’는 권고를 들었을 때 “사업가가 은퇴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돈을 벌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해서 돈을 벌 것”이라고 답변했다. 언뜻 보면 두 사람 말은 비슷해 보이지만 베버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즉 푸거의 말은 대자본가로서 자부심을 나타낸 것이고, 윤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반면 독일 사람들이 ‘양키들의 신앙고백’이라 비판한 프랭클린의 인생철학에는 근검, 절약, 절제 등 직업인으로서 ‘에토스(윤리)’가 담겨 있다.

베버에 따르면 자본주의 정신에 충실한 기업가는 독점과 특권을 통해 이윤을 남긴 봉건귀족과 대자본에 대항하면서 성장했다. 이들은 도시로 몰려든 유랑민들을 노동자들로 받아들여 기업을 창설하고 벌어들인 이윤을 낭비하지 않고 재투자하면서 더 많은 노동자들을 기업에 결합시킴으로써 자본주의 발달의 주역이 됐다.

베버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경유착과 편법적인 상속, 다단계 하청, 계열사 간 일감 몰아주기 등을 통해 손쉽게 부를 쌓는 데만 열을 올리는 한국의 재벌기업들은 프랭클린보다 푸거형의 탐욕적 자본가에 가깝다. 한국의 10대 재벌들은 올 6월 말 기준, 매출은 최근 2년 사이 83조원이 늘었지만 고용은 4000여명이 감소했다.

최근 정부가 새로운 일자리 창출 모델로 공을 들이고 있는 ‘광주형 일자리’ 역시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과는 거리가 먼 발상이다. 135조원의 유보금을 갖고 있는 현대자동차가 고작 530억원을 투자해 연봉 3000만원짜리 노동자 1000여명을 고용하는 대가로 시 재정을 포함해 6000억원을 쏟아붓고 사원주택까지 제공하는 것은 또 다른 정경유착이다. 더구나 국내에서 연간 14만대 정도 팔리는 경차는 이미 공급물량이 포화상태에 와 있다. 2021년까지 경차를 연간 10만대 생산하는 공장을 짓겠다는 것이 합리적인 투자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프랑스 경제학자 프레데릭 로르동은 2014년 올랑드 정권이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기업의 사회보장부담금 300억유로를 삭감한 조치를 ‘스톡홀름 증후군’에 비유해 풍자한 바 있다. 기업들이 실업자를 인질로 잡고 돈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너무 쉽게 인질범 품에 뛰어들며 ‘당신을 신뢰한다’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그는 “기업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경기상황에 의해 결정된 일자리를 선택할 뿐”이라며 “고용을 늘리기 위해 기업에 관대한 정책을 펴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했다.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은 최근의 경기침체 원인을 급속한 최저임금 인상이나 노조의 발목잡기 탓으로 돌리는 한국적 ‘기업가 정신’에도 일침을 보낸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은 평화로운 방식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지 않았다”며 “기업가들이 혁명적인 변화를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은 고객들과 노동자들의 신뢰를 얻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모든 개신교 기업가들이 신의 소명을 수행하는 동반자로서 노동자들을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다. 베버는 “어떤 종교인들은 권위에 대한 공경이라는 미명 아래 노동자들의 파업을 ‘죄악’으로, 노동조합들을 ‘탐욕’을 선동하는 단체들로 규정하고 스스로 ‘비밀경찰’의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네덜란드 경제학자로 칼뱅주의자였던 피터르 드 카우르(1618~1685)는 “대중들은 오직 가난하기 때문에 일하고 오직 가난한 동안에만 일한다”며 임금을 내려서 노동자들이 일을 더 많이 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베버에 따르면 임금을 낮추는 것은 자본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수단이 아니었다. 그는 “임금이 제대로 건강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낮게 유지될 때에는 노동생산성이 줄어들고 ‘적자생존’이 아니라 ‘부적격자 생존’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또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노동자의 숙련과 상당한 정도의 책임의식이 필요한데 낮은 임금은 ‘어떻게 하면 최대한 힘들지 않게 일하면서 원하는 임금을 받을 수 있을까’만 생각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제조업을 지탱하는 뿌리산업까지 파견을 허용해달라며 임금과 고용 유연성 강화가 마치 시대적 정신처럼 얘기하는 친재벌 언론들의 주장은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과는 차이가 있는 셈이다.

베버의 관점에서 보면 현재 우리 경제의 문제는 최저임금 인상이나 주 52시간 노동상한제를 거론하기 앞서 낮은 임금, 고용 유연성, 규제완화에 기대 쉽게 돈을 벌려고만 하는 기업가들의 소명의식 부족에 있다.

이 점에서 지난 5일 문재인 대통령이 여야 5당 원내대표를 초청한 가운데 열린 첫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 회의에서 탄력근로제 확대에 합의한 것은 ‘스톡홀름 증후군’을 연상케 한다. 현재 노조 조직률이 10%대에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탄력근로제 확대는 노조가 없는 사업장 노동자들을 다시 장시간 노동의 위험으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탄력근로제를 도입하려면 근로자 대표의 동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이 얼마나 형식적으로 운영되는지도 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도 근로자대표제는 ‘러들로 학살’이라 불리는 미국 콜로라도 광산노동자의 격렬한 파업투쟁(1913~1914) 후 기업주들이 노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고안한 것이다.

베버에 따르면 청교도의 금욕주의 신앙이 지배하던 시절 직업은 하나님이 원하고 명령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기업활동은 물질적인 재화 축적 그 자체가 목적이 됐고 노동은 먹고살기 위해 별다른 의미가 없어도 해야 하는 메마른 활동이 됐다. 베버는 이 점에서 자본주의 미래를 우울하게 그리고 있다.

“직업을 최고의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가치들과 직접 연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제 노동은 경제적 강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미국처럼 영리추구에서 종교적인 의미가 완전히 사라진 지역에서는 기업활동은 경쟁욕과 결부된 스포츠나 다름없다. 미래에 누가 이 쇠창살 안에 살아가게 될 것인지,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발전이 끝나갈 무렵 새로운 예언자가 출현할 것인지, 자포자기 상태에서 기계적이고 화석화된 인류가 출현할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베버의 이 같은 비관적 전망은 역설적으로 기업활동과 노동에 새로운 의미 부여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1994년 새뮤얼 헌팅턴은 ‘문화적 가치와 인류발전 프로젝트’라는 심포지엄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인들의 독특한 성취욕구와 도전정신에 찬사를 보낸 바 있다. 그로부터 24년이 흐른 지금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은 고작 ‘정규직’이 꿈이 되었고 기업가들은 쉽게 돈 버는 방법에만 골몰하고 있다. 소득주도성장을 놓고 벌어지는 현재의 논쟁은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 것인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동과 기업활동의 ‘의미 빈곤’에 대해서는 누구도 고민을 하지 않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강진구 노동전문기자 kangj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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