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일가스와 유통 혁명으로 사라진 인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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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장률 3.8%, 물가 1.3% 올라
시장 개방 따른 직구 열풍의 결과
대형화·효율화 등 아마존 효과로
선진국도 물가 상승 압력 낮아져
[시장을 보는 눈] 경기 회복과 저물가
지난달 우리나라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3%에 그쳐, 한국은행의 목표 수준(2.0%)을 크게 밑돌았다. 1년 전과 비교한 3분기 경제성장률이 3.8%에 이를 정도로 경기가 좋은 데 왜 물가가 오르지 않을까?

경제학자들 사이에 이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논쟁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가설은 해외요인의 영향력 확대인 것 같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 한국 경제는 현재에 비해 폐쇄적이었고, 물가 변동은 내부 요인에 의해 상당 부분 좌우됐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시장이 개방되고, 특히 주요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수입 제품의 영향력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런 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집값과 소비자물가의 관계다. 예전에는 집값이 오르면 임금도 오르고, 또 임대료도 상승해 경제 전체의 인플레를 자극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2015년 한 해 동안의 전국 주택가격 상승률은 3.4%를 기록했지만,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7%에 불과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내수시장이 개방되면 왜 물가가 오르지 않을까? 어차피 세계시장도 시장인 바에야, 경기가 좋아 공급에 비해 수요가 늘어나면 물가가 상승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이게 문제의 핵심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내수시장을 지닌 미국의 소비자물가는 2012년 이후 연 평균 1.4% 상승하는 데 그쳤으며, 특히 미국 연준(Fed)이 중시하는 개인소비지출 디플레이터는 1.3% 올랐을 뿐이다. 이렇게 글로벌 물가가 안정되니, 한국의 수입제품 가격도 급등할 이유가 없다. 특히 이른바 ‘직구’를 통해 실시간으로 가격을 비교해, 가장 저렴한 제품을 수입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미국의 물가 안정은 곧 한국의 물가 안정으로 이어진다.

미국 소비자물가 10년 동안 제자리
그럼 미국 물가는 왜 오르지 않는 걸까? 실업률이 사상 최저 수준(4.1%)까지 떨어지고, 3분기 경제성장률이 3%를 넘어가는 데 말이다.

가장 직관적인 이유는 미국의 셰일오일 혁명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시추공과 미국 원유생산량 흐름이다. 2014년 말 미국 전역의 셰일오일 시추공 수는 1840개에 달했지만, 채산성이 떨어지는 시추공이 차례대로 폐쇄되어 2016년 7월에는 단 463개로 줄어들었다. 즉 2년 반 만에 75%가 줄어든 셈이다. 그렇지만 하루 평균 생산량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2014년 말 미국 일 평균 원유 생산량은 946만 배럴에서 2016년 7월 868만 배럴로 불과 8.2% 줄어들었다. 셰일오일이 미국 원유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감안해 단순 계산해보면, 시추공당 원유 생산량이 같은 기간 364%나 늘어난 셈이다.

이 같은 강력한 생산성의 혁신은 유가의 하향 안정을 유발했다. 실제로 국제 유가는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기준으로 2014년 평균 93달러에서 2016년에는 43달러까지 하락했다. 그러나 이 요인만으로 최근의 물가 안정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2016년을 고비로 미국 셰일오일 생산에 브레이크가 걸렸기 때문이다. 2016년 6월 시추공당 원유 생산량은 2만 배럴을 기록했지만, 2017년 11월에는 불과 1만 배럴을 생산하는 데 그쳤다. 이런 현상은 남아도는 채굴 장비를 채산성 높은 시추공에 집중했던 전략이 한계에 부딪힌 데다, 경기 회복 속에 임금과 시추용 모래 등 각종 비용이 증가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특히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감산에 합의하며 공급과잉 위험을 낮추며 2017년 11월까지 연 평균 유가는 50달러까지 상승했다. 그런데도 왜 인플레 압력이 높아지지 않을까?

이 의문에 대해 미국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의 케빈 클라이센 이코노미스트는 ‘아마존 효과’에 주목한다. 클라이센은 아마존을 비롯한 경쟁 인터넷 상거래 기업들이 판매가격을 계속 인하함에 따라 인플레 압력이 낮아졌다고 주장했다. 아마존은 크게 두 가지 방법을 통해 판매가격을 낮추는데, 먼저 창고를 효율적으로 자동화하여 비용을 절감하는 한편 기존 소매업체를 경쟁의 도가니에 몰아 넣어 가격인하 경쟁을 유발했다는 것이다. 클라이센에 따르면 전자상거래 업체의 2008년 판매가격을 100으로 가정할 때 2017년 6월의 가격은 단 92에 그친다고 한다. 대형화와 효율화에 따른 유통마진의 감소, 그리고 경쟁 촉진의 환경이 지속된다면 앞으로도 선진국에서 인플레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미국 뉴저지의 아마존 물류센터에서 직원들이 배송할 물건을 분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물가 따른 기계적 금리 정책은 한계
그러나 그의 주장을 백퍼센트 수용하기 힘들다. 다른 연구를 살펴보니 전자상거래 업체의 판매 데이터를 수집해 신속하게 ‘물가지표’를 만들려는 시도는 이미 10년 전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알베르토 카발로 교수 등은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전자상거래 데이터를 활용해 기존에 발표되던 소비자물가지수와 전자상거래 물가지수를 비교했는데 둘 사이에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2008년을 100으로 가정하면, 2015년 말의 소비자물가지수는 109를 기록한 반면 전자상거래 물가지수는 110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누구의 주장이 맞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최근 미국 노동부가 발표한 미국 전자상거래 기업의 생산자물가 통계를 보면 2008년 말 이후 2017년 11월까지 단 1%도 물가가 상승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클라이센은 ‘소비자물가’를 측정한 것이니,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첫째, 한국 물가 안정은 국내 요인보다 해외 수입제품의 가격 하락에 힘입은 바 크다. 둘째, 해외로부터의 수입물가 안정은 셰일오일 혁명뿐만 아니라 아마존 등 거대 전자상거래 업체의 물류혁신과 경쟁 심화에 일부 원인이 있다.

이 대목에서, 세계에서 가장 먼저 물가안정 목표제를 채택한 뉴질랜드의 중앙은행의 그랜트 스펜서 총재가 최근 “국내 가격 책정 행태의 변화는 물가안정 목표제 방식이 더 유연해지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발언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가 수준에 따라 기계적으로 정책금리를 올리고 내리기보다, 물가뿐만 아니라 경제 여건과 자산시장 등 다양한 요인을 함께 고려해 통화정책을 시행하자는 스펜서 총재의 말은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홍춘욱
키움증권 투자전략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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