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를 미향(味鄕) 또는 ‘음식 1번지’라 한다. 유네스코 미식 도시(City of Gastronomy: 2012년 가입 승인)의 자부심이 실린 표현이다. 하지만 최근 들은 얘기는 그런 찬사와 사뭇 다르다. “유네스코 미식도시가 이런 거냐”는 실망의 소리가 크다.
10월 마지막 주 전주에서 하룻밤 묵고 오면서 그런 의견에 상당 부분 공감했다. 전주 도착 후 첫 점심 소감을 불만스럽다고 SNS에 썼더니 전주 맛집 소식에 밝은 전문가가 저녁에 만나기를 청했다. 호텔에서 저녁을 먹었지만, 밤에 둘이서 3곳을 돌아다니며 먹고 사고 마셨다. 다음날 새벽에 시식할 해장국 집도 추천해줘 혼자 찾아가 봤다.
지난달 20일 중년의 세 남자가 10시간 동안 5곳을 다니며 분석적으로 음식을 먹어봤다. 일반 손님으로 들어가 음식 주문해 조용히 사진 찍고 오로지 맛에 집중해 먹기만 하고 나왔다. 묵묵히 맛을 지킨 이 집들이 미식 도시 전주를 지키고 되살릴 버팀목이자 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장만 있는 순대국밥 - 덕천식당
국밥의 내장과 막창은 거북한 냄새가 없고 질감이 부드럽다. 씹히는 탄력이 경쾌하다. 솜씨 있게 삶았다는 느낌이 입안 가득 퍼졌다. 돼지 뼈 우린 국에 들깨와 매운 양념이 들어가 맛이 묵직하다. 칼칼한 국물은 밥을 말기 전후의 차이가 크다. 밥에서 전분이 우러나 섞이면 맛이 훨씬 부드럽고 구수해진다. 순대국밥(5500원)은 밥을 말아서 내오고, 막창국밥(6500원)은 밥이 따로 나온다. 국밥의 건지는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담쟁이 넝쿨이 전체를 감싼 2층 적벽돌 건물은 외관이 고풍스러워 음식점보다는 갤러리나 연구소를 연상시킨다. 보기만 그런 건 아니다. 1976년 9월 28일 양종숙(73) 여사가 개업해 42년을 넘겼다. 지금은 자녀들이 운영한다. 매일 오전 7시 30분 문을 연다.
오후 1시 문 닫는 국밥집 - 오거리콩나물해장국
아주머니가 밥을 담은 뚝배기에 찬물에 담가둔 삶은 콩나물을 건져 올려 부뚜막에 놓자, 아저씨는 국물이 끓는 솥 턱에 뚝배기를 비스듬히 걸치고 국자로 국물을 열 번쯤 퍼부었다. 국물은 밥과 콩나물을 데우고 솥으로 돌아갔다. 국밥을 만드는 오랜 방법인 토렴이다. 아주머니는 그사이 대파 하얀 대와 푸른 잎을 나란히 잡고 가늘게 썬다. 토렴을 끝낸 뚝배기에 잘게 썬 묵은지 한술 올리고 국물을 찰랑찰랑 채운 뒤 다진 파 한 줌 올리면 완성이다(6000원).
전설의 칼국숫집 - 베테랑분식
맛과 스타일에 대한 반응은 엇갈린다. 싫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전주에서는 이미 흔들리지 않는 아성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200명이 들어가는 본점에선 보통 하루 몇천 그릇이 나간다. 많이 팔리면 7000~8000그릇. 명절 다음날 1만1000그릇을 팔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아는 사람만 아는 이 집의 숨은 맛은 국수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 것이다. 취향에 따라 깍두기 국물을 두어 술 더 넣어도 색다른 맛이다. 밥은 팔지 않으니 원하면 준비해야 한다. 밥 반입을 막지는 않는다. 편의점에서 즉석밥을 사 전자레인지로 데워서 가지고 가면 될 듯하다.
공식 개업은 1977년. 현재는 아들이 운영하지만, 창업주인 어머니는 아직도 주방 현역이다. 경기전 건너편 성심여중 앞에 있다. 매일 오전 9시 문을 연다. 서울·수원에 직영 분점 4곳이 있다.
원조 전주비빔밥의 저력- 한국집
마을 원로들은 둘이서 육회 한 접시 시켜 반주하고, 남은 육회를 몇 가닥씩 밥에 얹어 식사하는 걸 추억의 외식으로 꼽는다. 메뉴판 음식은 아니지만 ‘전동 스타일’이라 한다. 그렇게 먹어봤다. 양념의 깊은 맛을 머금은 쇠고기가 입안에서 밥과 섞이면서 씹히는 맛이 절묘했다. 장·기름을 잘 쓰는 듯했다. 기본적으로는 밥이 좋았다. 경기전 뒤 본점은 매일 아침 9시 30분 문을 연다.
들어는 봤나? 현미수육 - 연지본관
모듬수육(4만원) 첫 점에 “그렇지, 이런 게 고기 맛이지”라고 쾌재를 불렀다. 접시에는 우설·머릿고기·알도가니·힘줄(스지)·꼬리·우족 토막 등이 수북이 담겼다. 초고추장 찍어 먹는 게 기본이다. 채 쳐 무친 무장아찌나 마늘장아찌를 올려 먹어도 맛있다. 때로 양념하지 않은 깻잎장아찌나 묵은김치도 나오는데, 수육에 곁들여 먹으면 또한 별미다.
수육에 따라 나온 설렁탕은 국물이 탁한 듯 진한 듯, 뚝배기 안에서 구름 같은 것이 뭉게뭉게 대류를 한다. 전문가 2명이 잡내 잡기 위해 메밀가루를 넣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여주인에게 물으니 아무것도 넣지 않은 뼈와 고기만의 국물이라고 했다. 1987년 4월 27일 개업해 지금은 창업주가 아들에게 10년째 가마솥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쉬는 날 없이 매일 오전 9시 문을 연다.
lee.tackhee@joins.com
전직 신문기자. 기자 시절 먹고 마시고 여행하기를 본업 다음으로 열심히 했다. 2018년 처음 무소속이 돼 자연으로 가는 자유인을 꿈꾸는 자칭 ‘자자처사(自自處士)’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