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色)이란 유형(有形)을 말하고, 공(空)이란 무형(無形)을 말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서로 통하고 있는가?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허공(虛空)이고 허공이 바위이다.

예를 들어 바위를 자꾸 나누어 가다보면 분자(分子)들이 모여서 생긴 것이고, 분자는 또 원자(原子)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원자도 소립자(素粒子)들이 모여서 생긴 것으로 결국 소립자 뭉치인 것이다. 그러면 소립자는 어떤 것인가 하면, 이것은 원자핵 속에 앉아서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말하고 있다. 스스로 충돌해서 입자(粒子)가 문득 나타났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있고, 바위도 무정물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인 소립자(素粒子)를 세분화하면 머리카락 굵기의 1조분의 1인 쿼크(Quark)인데 원자보다 십만배 이상 작은 원자핵 안에서 자동으로 스핀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주(宇宙)를 형성(形性)하는 근본(根本)은 에너지, 질량(質量), 그리고 광자(光子)이다. 상대성원리인 E=mc2의 공식은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뿐 아니라,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질량과 에너지는 하나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질량이란 유형의 물질로서 깊이 들어가면 물질인 소립자이고, 에너지는 무형인 운동하는 힘이다. 연기법(緣起法)과 공성(空性)의 세계서 본다면 모든 존재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상주법계(常住法界)는 무진연기(無盡緣起)가 있을 뿐이니 이것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다.

무진연기상의 일체 생명은 성상일여(性相一如)이며 물심불이(物心不二) 여서 유정무정의 구별이 없고 생명은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의 총칭(總稱)이다.

그러므로 무정설법을 들을 수 있어야만 생명의 참소식을 알게 되는 것이니, 개개생명 전체가 절대여서 생명거래가 없는 것이다.
 

계성변시장광설(溪聲便是長廣說) 산색개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 
 

“계곡서 흘러가는 냇물 소리가 부처님의 장광설이요, 산색 그대로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로구나. 밤새 쏟아내는 팔만사천 부처님의 감로 법문을, 뒷날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을까?” 이 시(詩)는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진리와 선의 세계가 아님이 없는 무처불시선(無處佛是禪)의 경계를 읊은 소동파의 오도시(悟道詩)이다. 

소동파가 옥천사라는 절에 승호 큰스님이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니, “대인(大人)은 누구십니까?”라고 묻자, “나의 성씨는 칭(秤)가요” 천하 스님들 무게를 달아보는 저울이라고 하였다. 이에 스님이 ‘악’하고 할을 하시며 “이 것이 몇근이나 됩니까?” 하고 반문하니 그 한마디에 소동파는 앞뒤가 꽉 막혀버렸다. 그래서 그 길로 상총 스님을 찾아가 ‘할’하는 도리를 묻자,

“어찌 무정설법은 듣지 못하고 유정설법만 들으려 하는고”하며 꾸짖으니, 말을 타고 계곡을 내려오다가 오로지 무정설법이라는 의정에 모든 생각, 분별이 사라지며 폭포수 소리에 개오한 것이다. 우주(宇宙)에 가득찬 그대로가 반야(般若)이고,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이며, ‘이 뭣고’ 이며 증감(增感)이 없는 전 우주인(宇宙人)이고, 본래완성이며 본래구족(本自具足)이다.

또한 ‘이 뭣고’는 한없이 온갖 법을 창출하고 섭수(攝受)하되, 일찍이 일체법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정화되어 있지 않은 빛이 4차원을 넘어선 공간에서는 영(靈) 혹은 영적(靈的) 에너지로 존재한다. 이 영적 에너지는 무형으로서 생명의 근본이며 창조의 원동력이 되는 불성이고 진여본심이며 ‘이뭣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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