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라 한다면 오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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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08.22. 오전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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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의 세계’ 생생하게 들려주는 책 두 권

국내 잔뼈굵은 번역가들이 낸

산문집 ‘번역가 모모씨의 일일’

실용인문서 ‘여백을 번역하라’

‘채식주의자’ 번역 논란 두고

“영어로 놓고봐도 짜임새 좋아

원작 가치 잘옮겨 문학적 성취”

“한국소설 세계 널리 읽히려면

훌륭한 관용어 사전 만들어야”


“번역은 텍스트에서 출발하지만 텍스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한다.”(노승영)



“번역은 다시쓰기(rewriting)이다. 여백을 번역해야 한다. 여백은 기호가 숨을 쉬어야 할 공간이며 번역가의 상상력이 살아나는 공간이다.”(조영학)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작인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대한 데버라 스미스의 번역을 둘러싸고 오역 논란과 함께 ‘좋은 번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현직 번역가들이 이에 답하는 책을 잇달아 출간했다. ‘나무의 노래’ ‘숲에서 우주를 보다’ 등 과학책 번역의 대표주자인 노승영 번역가와 ‘하우스 오브 카드’ ‘세계 대전 Z’ ‘퍼시픽 림’ 등 장르소설 번역 작업을 많이 해 온 박산호 번역가가 함께 산문집 ‘번역가 모모씨의 일일’(세종서적)을 출간한 데 이어 ‘나는 전설이다’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 등 장르물 80여 편을 번역해 ‘좀비 번역가’로 불리는 조영학 번역가는 일종의 번역 특강인 ‘여백을 번역하라’(메디치)를 내놨다.

‘번역가 모모씨의 일일’이 번역 분투기에 해당하는 산문집이라면 ‘여백을 번역하라’는 번역의 세계부터 지시어 처리 같은 번역의 난제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실용인문서다. 하지만 두 책은 모두 번역 작업에 대한 설명부터 그 작업 속에서 얻는 즐거움과 어려움, 또 좋은 번역을 위한 고민까지 번역과 번역가에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준다. 앞에서 인용한 말처럼 번역가가 텍스트 안에 갇히는 것에 반대하는 이들은 스미스의 ‘채식주의자’ 번역에 대해 공통적으로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노 번역가는 “스미스의 번역을 대략적으로 평가하면 내용을 크게 누락하지 않으면서도 종속되지 않은 점이 인상적”이라고 했다. “한국어의 문장 구조를 그대로 영어에 대입하면 흐름이 끊기고 리듬이 어긋나기 마련인데, 그녀의 문장은 영어로만 놓고 보아도 짜임새가 훌륭하다”는 것이다. 그는 문학 번역의 성패를 좌우하는 기준은 원작의 ‘가치’를 얼마나 번역했는가라며 이 점에서 ‘The Vegetarian’은 ‘채식주의자’가 한국어로 거둔 문학적 성취를 영어로 엇비슷하게 이뤘다고 볼 수 있다고 비유했다. 그는 스미스의 경우, 단순히 한국어를 영어로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영국 문학에 한국 문학을 성공적으로 이식했다고 평가했다.

조 번역가는 ‘채식주의자’의 경우 단순 오역보다는 번역에 대한 스미스의 태도에 주목했다.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우리말을 잘 이해해서가 아니라 영어가 모국어이기 때문이다. 한강의 문장을 모국어로 아름답게 바꾸어놓았기에 독자들과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라고 했다. 조 번역가는 스미스의 ‘채식주의자’가 외서의 한국어 번역에 교훈을 준다며 “애초에 저자가 어떤 대상, 어떤 상황을 기호로 전환했다면 우리도 해석을 통해 그 대상, 그 상황에 최대한 접근한 다음 우리말, 우리말 시스템에 맞게 다시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이들은 우리가 흔히 잘못됐다고 말하는 ‘번역투’에 대해서도 기존 생각을 뒤집는다. 노 번역가는 “사람들은 번역투가 우리말을 오염시킨다고 생각하지만 언어는 번역을 거쳐 다른 언어와 접촉하며 끊임없이 발전한다”며 “기존의 한국어 어법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문장을 만났을 때, 번역가는 한국어의 틀을 뛰어넘는 새로운 표현 방식을 모색한다. 그런 점에서 좋은 번역은 자국어의 지평을 넓힌다”고 했다.

그렇다면 좋은 번역이란 무엇일까. 이들은 아직 ‘정답은 없다’고 말한다. 다만 노 번역가는 “걸작이 번역서로서도 걸작이기 위해서는 국경을 넘는 호소력을 지닌 걸출한 번역가를 만나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반면 조 번역가는 “이제 우리 번역은 ‘기호=의미’라는 고전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밝힌다. “의미는 기호가 아니라 문맥이 결정하며 문맥은 기호에 기호를 둘러싼 상황을 더한 개념이다. 번역은 텍스트의 내용, 의미, 형식, 상황, 비유 등을 먼저 파악하고 그 결과를 우리말로 다시 쓰는 과정”이라는 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다.

한편 ‘번역가 모모씨의 일일’에서 저자들은 다시 ‘채식주의자’로 돌아가 한국 문학 번역을 위해 우리가 할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한국어를 배운 지 7년밖에 안 된 영국인이 영어와 전혀 다른 한국어라는 까다로운 언어를 어떻게 독해하고 풀어냈을까. 게다가 쓸 만한 한영사전과 한국어 관용어 사전이 없는 처지에서 원문의 뉘앙스를 살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쉽게 짐작된다. 그렇다면 한국 소설이 세계에 두각을 나타내도록 하는 데 필요한 일은 훌륭한 한영사전과 관용어 사전을 만드는 것, 그리고 한국 소설을 사랑하고 역량을 갖춘 번역가를 길러내는 것이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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