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버클리는 논지 개진에 효과적인 대화 기법을 사용해, 우리가 지각하는 감각적 성질의 담지자로서 ‘물질’이라 불리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유물론자들의 주장을 뿌리째 뒤흔든다. 정신 속에 있는 관념이야말로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유일하고 참된 실재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결론을 위한 논변과, 모든 감각적 사물의 궁극적 기초를 위한 논변을 담고 있는 초기 근대 철학의 백미다.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는 오리지널 고전에 대한 통찰의 책읽기입니다. 전문가가 원전에서 핵심 내용만 뽑아내는 발췌 방식입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 제목이 말하고 있듯이 하일라스와 필로누스가 사흘 동안 나눈 대화의 기록이다. 여기서 ‘하일라스’란 ‘물질’ 또는 ‘질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hyle’를 줄기 삼아 만든 이름이고, ‘필로누스’는 ‘누스(지성)를 사랑한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philo-nous’를 음역해 만든 이름이다. ‘하일라스’는 ‘유물론자’의 대명사이고, ‘필로누스’는 버클리를 대변하는 ‘비(非)유물론자’의 은유인 셈이다.
하일라스는 유형(有形)의 세계의 진리성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한편, 유형의 세계에 대한 최근의 과학적 이론과 철학적 이론을 거칠게나마 알고 있을 만큼 충분히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주장하는 견해는 지각의 직접적 대상은 주관적 관념이라는 것이다. 주관적 관념이란 무엇인가? 유형적인, 감각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독립적인ㆍ예외적으로 신에게는 의존적인ㆍ실재들의 인상 또는 심상이 바로 주관적 관념이다. 신에 대한 믿음과 그리스도교적 계시에 대한 믿음은 하일라스와 필로누스가 공유하는 부분이다.
필로누스가 내세우는 견해는 버클리 자신의 견해다. 감관에 직접적으로 지각되는 세계는 유일하게 존재하는 유형의 세계이며, 그것의 전체적 존재 양식은 의식의 대상으로서 임시적으로는 우리의 대상이 되지만, 항구적으로는 신의 의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첫 번째 대화>에서는 비유물론의 논변이 시작된다. 그에 따르면, 정신과 유리된, 감각의 대상이나 그 비슷한 것은 없다. 유형의 사물은 관념이다. 물질적 실체에 대한 믿음은 감각적 사물의 실재성에 대한 부정을 함축한다. <두 번째 대화>에서는 우리의 관념의 유래가 논의된다. 그에 따르면, 신이 관념의 유일한 원인이다. 물질 또는 물질적 실체는 관념에 대해 불필요하거니와, 그 존재는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이로써 비유물론을 위한 논변이 매듭지어진다. <세 번째 대화>에서는 각양각색의 반론이 논박된다. 앞서의 대화에서와는 달리, 하일라스가 질문자가 되어 반론을 제기하고 필로누스가 그것을 논박하는 식으로 대화가 진행된다. 비유물론을 위한 핵심적인 논변은 <첫 번째 대화>와 <두 번째 대화>에 전개되어 있어 마지막 <세 번째 대화>는 보론(補論)의 성격을 띤다. 그래서 비유물론의 이해를 위해서는 앞의 두 대화만 읽더라도 충분하다. 마지막 대화를 생략하고 앞의 두 대화만 번역한 이유다.
버클리는 물질 또는 유형의,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인 실체 같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상정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그것은 적어도 형이상학의 난문들 대부분에 대한 대답의 기초로 쓰이고, 당시 주류 철학자들 사이에 퍼져 있던 회의론과 무신론의 유혹을 물리치고, 상식이나 그리스도교의 계시들이 주장하는 모든 것을 아마도 더 세련된 형식으로 보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버클리의 통찰은 처음에 기상천외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버클리는 ‘유물론’을 근대적 용어법에서 벗어나 물질과 같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한편, 그것에서 모든 오류의 원인, 그러니까 회의론과 무신론의 주된 원인을 발견한다.
버클리가 유물론에 가하는 반론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로, 유물론은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감각적 ‘관념’뿐이요, 우리가 ‘사물’이라 칭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지각된 관념들의 다발에 불과하며, 관념은 정신 속에만 존재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버클리의 원리에 의하면,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사물들의 존재(esse)는 그것들의 지각됨(percipi)에 있다. 다시 말해서 감각적 사물들은 지각하는 정신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를 갖지 않는다.
둘째로, 유물론은 그 자체로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쪽 진영의 사람들은 ‘물질’이라는 말로 누구에 의해서도 표상되지 않는 어떤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표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전제에 따르면 누구에 의해서도 표상되지 않는 것이 저들에 의해 표상되는 셈이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명백한 모순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것이다.
셋째로, 유물론은 검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무모순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의 참됨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물질 또는 물질적 실체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유물론 진영의 사람들조차도 유형의 실체가 하나도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감각적 관념을 가질 수 있음을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