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동화'에서 남자의 심리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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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그림 동화 남자 심리 읽기


[CBS노컷뉴스 김영태 기자]

아무리 기다려도 헨젤이 살찌지 않는 것처럼 보이자 마녀는 그냥 두 아이를 잡아먹기로 결심한다. 위기의 순간에 다행히도 그레텔이 기지를 발휘해 마녀를 화덕에 밀어넣어 죽이고 헨젤을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마녀의 죽음’은 곧 소년이 ‘어머니’에 대한 중독 같은 집착에서 벗어나 자기 삶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마련되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마녀를 죽이는 사람이 왜 그레텔일까? 그레텔은 내내 오빠의 말을 따르는 착한 동생이었고 두려움에 울먹이며 마녀에게 착취당하는 아이였다. 신간 '그림 동화 남자 심리 읽기'의 저자 오이겐 드레버만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레텔이 마녀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특이한 점은, 이런 현재의 갈등을 해결하거나 그로부터 스스로를 구하는 사람은 그레텔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레텔과 마녀의 관계는 열심히 봉사하고 극단적으로 착취당하는 관계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관계를 모두 끝장내야 하고 이 관계에 연루된 인물을 죽여야 한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동화에서 어떤 적(거인, 마녀 등)이 살해되는 장면은, 이 모든 것이 아이의 환상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누군가의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불안을 주는 콤플렉스가 자취를 감추고, 그러한 콤플렉스가 더는 의식에 존재하지 않으며, 불안을 일으키는 사람이 이제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 [헨젤과 그레텔]·116~117쪽

'그림 동화 남자 심리 읽기'는 19세기 독일의 그림 형제가 옛이야기들을 수집해 엮은 ‘그림 동화(Grimms M?rchen)’ 중에서 드물게 남자의 내적 성장을 그린 동화 네 편을 다룬다. 저자는 비밀스런 마법과 신화적 모티프와 암호 같은 상징으로 가득한 그림 동화를 프로이트와 카를 융의 심층심리학, 그리고 상담실에서 얻은 수많은 실제 사례를 통해 인간 내면을 밝히는 생생한 현실의 이야기로 되살려낸다.

끈질긴 의존 욕구를 떨쳐내고 자유와 독립을 찾아가는 ‘헨젤과 그레텔’, 타인을 구원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하려는 '두 형제'의 젊은 사냥꾼, 마법에 걸린 공주를 사랑하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이해하게 되는 '수정 구슬'의 셋째 아들, 어머니와 연인 사이에서 헤매다가 마침내 사랑의 목소리를 따라 성숙한 남자로 거듭나는 ‘북 치는 소년’. 억압적인 아버지의 질서와 어머니의 뒤틀린 사랑에서 벗어나 추락의 두려움과 상실의 불안을 이겨내고 자기 실현에 이르는 내면의 모험을 만난다.

독일의 정신분석가이자 신학자인 드레버만은 그림 동화 20여 편을 분석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 시리즈를 통해 작가로서 널리 이름을 알렸다. 드레버만은 ‘그림 동화’에서 우리의 삶과 성격을 결정짓는 정신의 원형적 체험을 발견한다.

'그림 동화 남자 심리 읽기'는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조화롭고 독립된 인격으로 성장하기 위해 남자가 거쳐야 하는 정신의 모험을 그린 동화 네 편을 다룬다. 이 동화들은 대체로 ‘사악한 용’이나 ‘마법사’로 나타나는 ‘아버지’와 ‘못된 계모’나 ‘마녀’로 그려지는 ‘어머니’ 아래서 성장하는 소년이 겪는 불안을 들여다본다.

흔히 동화는 어린이나 여자들이 읽는 것이라 여겨져 왔다. “유약하고 울먹이는 자, 보호하면서도 보호받고자 하는 자, 몽상에 빠지고 빈둥거리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는 자”에게나 필요한 것이며 “남자에겐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드레버만은 남자들에게야말로 동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이 책에서 다루는 네 편의 남성 동화는 자기 삶을 깊이 들여다보려는 남자들과 이 시대의 보편적인 남성성에 의문을 품은 여성들에게 중요한 텍스트가 된다.

이 책에서 드레버만은 자신의 상담실을 찾아온 많은 남성들의 실제 사례를 통해, 수천 년 동안 가부장제 사회에서 바람직한 남성상으로 여겨져 온 것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끼치는 부정적 영향을 보여준다. ‘남자다운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따라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는 삶. 그것은 느껴지는 것을 느끼지 말아야 하고, 느끼는 것과 정반대로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삶을 뜻한다. 이런 남자는 타인과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내면이 분열된 채 자기 과시와 강요와 위협으로 사랑을 흉내 낸다. 여기 소개하는 네 편의 동화는 이런 파국의 길에서 벗어나는 내면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앞으로는 ‘영웅’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어떨까? ‘영웅’은 무언가를 죽이는 데 ‘용맹’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팎에서 자라나는 충만한 아름다움을 참을성 있게 아끼는 사람이라고. 필요하다면 말 그대로 시체를 밟고서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운 사람이 아니라, 살기 위해 보호받아야 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보살피는 사람이라고. 수천 년 동안 오로지 ‘군인’과 ‘전사’만이 ‘사나이답다’고 여겨졌다. 그들은 ‘옳은’ 일을 위해(‘하느님과 국왕과 조국’, ‘하느님과 교황과 교회’ 또는 그 밖의 어떤 세속적 삼위일체를 위해) ‘희생을 각오한 자’였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 그들은 대개 다른 생명들을 희생시킬 것까지 각오한 자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하는 시간이 된 것 같다. 그래야만 남성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두 형제'·231쪽

저자 드레버만은 ‘그림 동화’를 단순히 재미있는 상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심리적 현실, 특히 아이들이 성장 과정에서 부모와의 관계로 인해 겪는 내적 갈등이 투영된 텍스트로 본다. 매일 자고 일어나면 베개 밑에 금덩어리가 생긴다거나, 굶주린 아이들 앞에 과자 집이 나타난다거나, 말하는 동물과 길동무가 된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아이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생생한 현실인 것이다. 다만, 무의식적 불안과 충동, 강박, 콤플렉스가 다양한 문학적 상징과 비유로 표현되기 때문에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뿐이다.

'그림 동화 남자 심리 읽기'는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을 바탕으로 하여 그림 동화에 들어 있는 여러 원형적 상징과 동화 속 인물들의 내면을 차근차근 풀어 보여준다.
한편으로 저자는 프로이트나 융의 상징 분석을 일반화하여 상투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경계한다. 동화 속 인물이나 사건을 무언가를 대표하는 ‘전형’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상황에 놓인 현실의 사람 혹은 사건으로 여겨야 한 편의 동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술 반지, 요술 안장, 요술 모자라는 동화 모티프는 자주 나타나지만, 심층심리학적으로 이런 모티프를 해석할 때는 판에 박힌 일반화를 경계해야 한다. 프로이트 학파는 이런 상징들에서 예외 없이 ‘성적’ 암시를 찾아낸다. 융 학파에서는 ‘모자’를 둥근 모양 때문에 만다라의 상징이자 ‘자기’의 비유로 풀이할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수정 구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이후에 나오는 수정 구슬을 앞에서 이미 모자가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체로는 올바르지만 지나치게 추상적인 개념과 관용구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 이런 것들은 온갖 해석 경향을 모두 허용하는 ‘요술 모자’에 불과하다.
- '수정 구슬'·431, 433쪽

드레버만은 그림 동화를 구성하는 여러 상징과 모티프들이 세계의 신화와 전설은 물론이고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과 케테 콜비츠의 판화, 바그너의 오페라, 카프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공간, 장르를 초월해 끊임없이 변주되어 왔음을 확인한다.

예를 들어, 케테 콜비츠의 판화 '빵을!'에서 배고픈 자식을 외면하는 어머니의 고통스런 뒷모습은 가난 때문에 아이들을 숲에 버리는 '헨젤과 그레텔'의 부모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준다. '두 형제'에서 주인공이 치르는 ‘용과의 싸움’은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가 레르나의 뱀 ‘히드라’를 물리치는 이야기와 게르만 신화 속 영웅 지구르트의 모험담에서 반복되고, '수정 구슬'의 세 형제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세 형제가 각각 상징하는 인간 유형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동화에는 ‘상으로 주어지는 처녀’라는 모티프가 자주 등장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말로는 딸을 시집보내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혹은 딸 자신)은 구혼자들에게 조건을 내건다. 그리고 구혼자들은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이 ‘상으로 주어지는 처녀’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여자를 사랑한 나머지 자신을 던져서 부모와의 애착 관계라는 마력의 그물을 찢을 수 있는 사람뿐이다. 그러려면 가령 '수정 구슬'에서처럼 씩씩거리는 괴물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이 필요하다. 아니면, 그리스 신화에서 펠롭스가 사랑하는 히포다메이아를 얻으려고 엘리스의 왕 오이노마오스와 전차 경주를 벌인 것처럼, 우선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와 목숨을 건 싸움을 이겨내야 한다.
- '북 치는 소년'·545, 546쪽

책 속으로


헨젤은 이제 자기에게 집이 없음을 또렷하게 알고 있다. 그럴수록 더욱 절실하게 아이는 집으로, 자기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집착한다. ‘버림받을 것’이라는 불안이 커질수록 아이는 최후의 ‘환상적’ 기대에 더욱 절박하게 매달리기 때문이다.
― [헨젤과 그레텔]·59쪽

심리 치료를 하다 보면 자주 놀라게 되는데, 많은 사람이 아무리 거부당하고 실망하고 심지어 질책까지 받더라도 끈질기게, 얼핏 보기에 막무가내일 정도로 도움과 이해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들이 바라는 것을 애당초 얻을 수 없는 곳에서 말이다. ‘헨젤과 그레텔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인 해법은 아이들이 부모를 떠나 자기 힘으로 삶을 헤쳐 나가는 것이리라. 하지만 아이들은 왜 그러지 않는가? 부모들도 왜 솔직하게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권하지 않는가? 이런 의문에 단순하고도 적절한 설명은,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정 때문에 그런 ‘해법’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부모와 자식 모두 완수할 수 없는 책임들로 이루어진 어떤 시스템의 희생자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이 시스템 안에 그대로 갇혀 있는 이유는 서로에게 느끼는 유대감을 그냥 무책임하게 끝장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 [헨젤과 그레텔]·62~63쪽

아이는 오직 착한 아이가 되고자 노력했고 자기가 받은 것을 남김없이 어머니에게 바치려고 애썼다. … 자기 포기는 이제 선한 어머니를 되찾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악한 어머니를 피해야 한다는 목적을 추구하는, 일종의 고착된 관념이자 집착으로 변질된다. 아이 쪽에도 바로 이러한 과도한 면이 있는 것이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다시 사랑받으려고 모든 일을 시도해본다. 하지만 자기가 먹을 음식을 땅에 뿌리기까지 했는데도 어머니에게 버림받는다면, 어머니로 자처하는 이 여자를 마녀 같은 존재라고 여기는 생각이 은밀히 싹트지 않겠는가!
― [헨젤과 그레텔]·88~89쪽

오이겐 드레버만 지음/ 김태희 옮김/교양인/712쪽/2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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