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세계의 어머니 김혜자

5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세계의 어머니 김혜자

댓글 공유하기

“이 연극을 하지 않으면 배우로서 패배자가 될 것
같았어요. 공부하는 자세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배우 김혜자가 5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다. 2001년 큰 인기를 얻었던 연극 ‘셜리 발렌타인’ 이후에 선택한 연극은 지난 해 퓰리처상을 받은 작품 ‘다우트’. 한시도 대본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는 김혜자의 요즘 근황을 들어봤다. 그녀는 변함없이 ‘배우’와 ‘봉사활동’을 인생의 두 축으로 삼고 살고 있다.


퓰리처상 받은 작품으로 5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서다
5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세계의 어머니 김혜자

5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세계의 어머니 김혜자

가을 햇빛이 눈부신 토요일,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두툼한 대본 하나를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에 꼭 쥔 채 나타났다. 웃는 것도 부끄러운지 소리를 죽여가며 웃는 그녀. 말 한마디도 허투루 하지 않으려는 듯 나지막한 소리로 천천히 단어 하나하나를 뱉는다.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에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맑은 눈을 가지고 있고, 인생과 사랑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춘기 소녀 같다. 그녀는 41년생으로 이제는 선생님으로 불리지만, 여전히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있는 배우, 김혜자다.

MBC 드라마 ‘궁’에서 조금은 엉뚱한 황실의 어른 황태후로 출연해 또 한 번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드라마가 끝나자 봉사활동을 위해 아프리카로 조용히 떠났다가 얼마 전에 다시 돌아왔다. ‘연기와 봉사가 인생의 두 축’이라고 말할 정도로 아프리카와 보스니아, 소말리아 등 내전과 가난으로 고통받는 나라를 찾아가는 일은 그녀에게 이젠 일상이 됐다.

봉사의 일상을 잠시 접고 5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서며 인생의 한 축인 연기자로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Doubt’(12월 5~11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라는 제목의 희곡 대본이 그것을 말해준다.

“의혹에 관한 연극이에요. 한 달 반 전에 희곡을 받았는데, 처음 읽었을 때는 어렵게만 느껴져서 피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매력을 느끼게 됐죠. 다른 작품들도 제의가 많았는데, 이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이번 작품을 하지 않으면 배우로서 패배자가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 연극은 영화 ‘문스트럭’의 작가로 잘 알려진 존 페트릭 쉔리의 작품으로 2005년 퓰리처상과 토니상 작품상을 동시에 수상한 데 이어 뉴욕비평가상과 드라마데스크상을 휩쓸면서 평단과 언론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인간 내면에 잠재된 의심과 의혹, 불확신과 확신에 관한 진지한 통찰력이 빛나는 이 작품에서 김혜자는 끊임없이 플린 신부를 의심하는 앨로이셔스 수녀 역을 맡았다. 시종일관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수녀로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감정을 밀어붙여야 하며, 일반 연극과 다르게 결말이 없어 배우의 분석에 따라 작품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는 어려운 작품이다. 김혜자 역시 작품의 어려움을 알고 있기 때문에 대본을 받은 이후 한 번도 손에서 대본을 놓은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다.

“무대에 올라가면 감정을 죽여야 하지만, 작품 분석을 할 때는 감정 표현을 열심히 하려구요. 그래야 나중에 감정 조절이 쉬울 것 같거든요. 정신력이 많이 필요한 작품이에요. 수녀가 작품 속에서 딱 한번 웃는데, 남편 이야기를 할 때죠. 작품 속에서는 남편이 왜 죽었는지, 왜 수녀가 됐는지 자세하게 나오지 않아요. 단지 작품 분석을 하면서 ‘이랬을 것 같다’라는 예상을 하는 거죠. 처음에는 이상한 여자 같은데, 나중에 보면 우리와 같은 사람이에요.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인데, 작가의 서문을 읽고 이해했어요.”

드라마 ‘궁’의 성공으로 배우 김혜자의 건재함을 알린 뒤 많은 작품에서 섭외를 받았다. 하지만 결국 택한 것은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연극이다. 그녀에게 연극은 배우로서 ‘공부’하는 기회이자 시간이다. 이번 연극에 참여할 때 그녀가 요구했던 것은 단 하나였다. 바로 ‘연기력 있는 배우’를 캐스팅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도 다른 배우에게 배우고 싶거든요”라는 겸손한 생각에서다.

5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세계의 어머니 김혜자

5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세계의 어머니 김혜자

43년간 배우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작품을 했지만 연극은 10편이 채 안 된다. 하지만 ‘19 그리고 80’(1991), ‘셜리 발렌타인’(2001) 등 그녀가 출연한 작품은 큰 인기를 얻었고, 롱런했다. 하지만 김혜자는 자신의 인기와 작품의 인지도를 이용하지 않았다. 인기가 많아도 다시 똑같은 작품에 출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를 것 같다.
“작품 자체가 매력이 있어요. 그리고 무대에 올라가는 시간도 짧아요.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은 다시 한번 출연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만큼 이 작품이 좋아요.”


딸과 함께 계획했던 동유럽 여행 대신 택했던 아프리카 봉사활동
그녀가 처음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왔을 때 수많은 취재진에 둘러싸여 기자회견을 가졌을 정도로 화제가 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봉사활동이 큰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김혜자 = 봉사활동’이라는 생각이 상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의 봉사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할라치면, 마치 ‘당연한 것을 가지고 왜 호들갑이야!’라는 핀잔이 되돌아올 것만 같은 분위기다. 남들은 한 번 떠나기도 힘든 ‘고행길’을 늘 조용히 다녀오는 그녀의 한결같은 행동의 원천은 무엇일까?

“처음 봉사활동을 떠났을 때가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끝난 직후였어요.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왔을 때 수많은기자들이 몰려와 공동 기자회견을 가졌죠. 그때는 그만큼 이슈가 됐던 사건이었어요(웃음). 하지만 이제는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싶어요. 그냥 혼자 조용히 다녀오는 거죠.”

그녀가 아프리카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92년이다. 당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를 마친 후 대학을 졸업한 딸과 동유럽으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낯선 사람의 전화 한 통을 받은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바로 ‘월드비전’의 한국지부 회장의 전화였다. “이제는 우리나라가 받았던 도움을 다른 나라에 돌려줘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딸은 딸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서로의 여행(?)을 떠났다.

당시 그녀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는 가벼운 기분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드라마’와 같은 비참한 삶이었다. 먹지 못해서 배가 부풀어 오른, 마치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 같은 눈을 가진 아이들. 그녀에게 달라붙는 아이들의 몸부림은 ‘살려달라’는 무언의 ‘SOS’였다.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고, 큰 고통을 느꼈다. 지옥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풍경이 그녀의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진 것이다.

5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세계의 어머니 김혜자

5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세계의 어머니 김혜자

한국에 돌아왔을 때의 마음은 누가 등을 떠밀어도 다시는 그곳에 가기 싫었다. 하지만 그녀는 운명처럼 다시 소말리아로 떠나게 됐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뭔가에 이끌리듯이 떠난 두 번째 봉사활동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봉사는 이제 그녀의 운명이라는 것을.

“두 번째 봉사활동을 하면서 ‘내가 이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헐벗고 굶주린 곳에 가면 제가 달라져요. 한국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고민이 그런 곳에 가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요. 인생은 정말 ‘간단 명료’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됐죠. 일용할 양식이 있어야 하고, 아프지 않으면 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제가 했던 고민들이 그런 곳에 가면 허접스럽게 느껴져요.”


1백 명 이상의 아이와 결연 맺고 있어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오면 김혜자는 한동안 마음고생을 해야만 한다. 자신이 보고 왔던 아이들이 죽지는 않았는지 걱정돼서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미약했다. 4초 만에 한 명씩 죽어가는 아이들을 모두 돌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만 자신의 품에 안겼던 아이들만이라도 다시 그곳을 찾아갔을 때 살아 있었으면 하는 것이 큰 소망이 됐다.

“얼마 전에 행복한 경험을 했어요. 제가 6년 전 케냐에서 만났던 한 유목민 아이를 잊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부모도 없고 동생 2명이랑 함께 유목 생활을 했던 ‘애꾸아무’라는 성을 가진 아이였어요. 정착하지 못하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다시 만나기 힘든 아이였어요. 집에 돌아와서도 너무 걱정이 돼서 잊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찾았어요. 2년 전에 나왔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는 책에 그 애 사진이 있어 케냐에 갔을 때 그 사진을 오려 만나는 사람들마다 찾아달라고 했죠. 일곱 살 때 만났던 아이가 열세 살이 됐는데, 저를 보자마자 기억하더라구요.”

‘애꾸아무’라는 성은 마치 우리나라의 ‘김’씨 성처럼 흔대 쉽게 찾지 못하다 책에서 오려간 사진 덕분에 6년 만에 만난 아이는 그녀를 보자마자 안겨서 울기 시작했다. 몸을 비틀면서 우는 아이의 모습은 마치 ‘왜 이제 왔어요?’라는 듯한 원망의 몸부림이었다. 그렇게 찾고 싶었던 아이였기에 그냥 돌아올 수 없었다. 월드비전에 그 아이와 ‘특별 결연’을 맺어달라고 요청했고 그녀 덕분에 세 명의 아이는 학교에 다닐 수 있고, 부족하나마 아프면 치료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녀는 봉사활동을 가면 그냥 돌아오질 못한다. 가지 말라고 애원하며 붙잡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면 가만히 있질 못해서 치료비에 쓰라고 즉석에서 돈을 기부하기도 하고, 개인적인 후원자로 성금을 내기도 한다. 한 번, 두 번 그러면서 그녀는 벌써 1백 명 이상의 아이들과 결연을 맺었다.

한 달에 2백만원 이상의 큰돈이 꼬박꼬박 아이들 후원금으로 나갈 정도다. 더욱이 그녀가 지난 수년간 월드비전을 통해 기부한 금액은 상상보다 큰 액수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사실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이런 행동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혜자의 진심어린 봉사활동은 이제 누구에게나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였을까? 얼마 전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린 ‘스타 옥션’에서 ‘김혜자와 함께 소말리아로 봉사활동 떠나기’가 4백60만원에 낙찰됐다. 유명 사진작가인 조세현씨의 사진 촬영 모델이 되는 것이 4백20만원, 정준호와 함께하는 사랑의 밥차 봉사활동과 야외 바비큐 파티가 2백11만원, 박세리와의 골프 라운딩이 2백2만원에 팔렸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왔을 때 그 소식을 들었는데, 액수가 너무 작은 것 같아요(웃음). 외국에서는 스타 옥션이 많이 열리니까 대중화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처음이라서 그랬을 거예요. 그리고 그 방송을 한 시간이 어른들이 볼 시간이 아니었어요. 다음에는 어른들이 보기에 좋은 시간대에 스타 옥션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북한, 인도, 베트남,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보스니아 등 많은 나라에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그중 보스니아의 한 허름한 식당에서 연주하던 예술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보스니아에서 내전이 터지기 전에는 유명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는데 전쟁이 터지면서 일할 곳이 없어져 식당에서 연주를 하면서 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반전주의자’가 됐다. 전쟁이 일어나면 힘없는 아이와 여성들 그리고 서민들만 고생한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느꼈기 때문이다.

김혜자는 이렇게 봉사활동을 다니면서 자신이 변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인간의 인권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됐고, 전쟁은 무조건 반대하게 됐다. 시민사회단체의 운동가는 아니지만, 사회 구석구석에서 고통받으며 신음하는 약자들에 대한 관심은 어느 사회운동가보다 더 크다.

5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세계의 어머니 김혜자

5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세계의 어머니 김혜자

요즘 그녀가 바라는 것은 이런 봉사활동에 젊은 유명 연예인들이 참여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녀는 함께 드라마를 했거나 봉사 캠페인에 참여한 젊은 배우를 만나면 항상 참여를 권한다. 그러면 대부분이 ‘참여하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정작 월드비전 측에서 정식으로 참여를 요청하면 약속했던 연예인과는 통화도 못한 채 기획사의 거절 의사를 통보받곤 해 가슴이 아프다.

“기획사도 생각을 바꿔야 돼요. 젊은이들이 그런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오면 사람이 많이 바뀌어요. 좀더 겸손해지거든요. 그리고 제가 하는 것보다 젊은 후배들이 봉사활동에 참여하면 파급효과가 더 커요. 후배들은 돈을 기부하지 않고 참여만 해도 그게 바로 기부하는 일이에요. 서로에게 좋은 일인데 왜 그것을 기획사나 매니저가 막는지 모르겠어요. 참 아쉬운 일이에요.”


젊은 배우들과 함께 작업한 ‘궁’은 재미있는 경험
장수 드라마 ‘전원일기’를 통해 김혜자는 ‘한국의 어머니’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시어머니와 아들, 며느리, 그리고 손자까지 4대가 함께 사는 집안에서 현명한 어머니로 묵묵히 가족들만을 위해 살아온 연기를 실감나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이 드라마에서 할 일이 적어졌다. 흰머리 가발을 쓰고 방에서 바느질이나 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역할이 고통이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작가에게 “이제는 저를 죽여주세요”라는 말을 했을까.

진통을 겪으면서 ‘전원일기’는 막을 내렸지만, ‘한국의 어머니’라는 단어는 여전히 그녀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수식어가 됐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런 칭찬이 부끄럽고 즐거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식어가 별로 기분 좋게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배우로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녀는 배우 김혜자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작품에 참여하게 된다. ‘주연이 아니면 안 하겠다’고 공언했던 그녀가 ‘조연’임에도 불구하고 참여했던 드라마 ‘궁’(2006)이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엉뚱하고 귀엽기까지(?) 한 황태후 역할을 맡아 색다른 매력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조연으임에도 ‘궁’에 출연한 것은 황인뢰 PD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김혜자는 여전히 배우로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궁’에서 젊은 배우들과 재미있게 연기했어요. 비록 저한테 인사도 안 하고 피해다니는 후배도 있었지만, 저는 그런 것 상관 안 해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리고 후배들에게 뭔가를 이야기한다는 게 귀찮아요(웃음). 그런 면에서 저도 무척 이기적이에요. 그리고 ‘궁’이 재미있는 드라마지만, 처음부터 ‘궁 2’에는 출연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했어요.”

배우 생활을 한지 40여 년이 지났으니 김혜자가 ‘주인공’으로 참여할 작품은 줄어들 것이다. 그녀 역시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고, 배우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영화 ‘선 셋 대로’에 나온 노년의 여배우를 보면서 많은 것을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서두르지 않는다. 배우로 살아온 세월에 비해 참여 작품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김혜자는 “저는 지금까지 무엇을 계획하고 실행한 적이 별로 없어요. 하지만 공백의 차이는 있지만, 제가 힘들거나 배우로 활동하고 싶을 때는 항상 작품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죠. 봉사활동을 하기 전에는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어떻게 하면 배우로서 끝맺음을 잘할까?’라는 생각으로 변했어요.”

말과 행동은 조용하지만 깊은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 김혜자. 그녀는 5년 만의 연극 도전을 무척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연극이 끝나면 스타옥션에서 낙찰받은 사람과 또다시 소말리아로 봉사활동을 떠날 예정이다. 배우이자 봉사활동가 김혜자의 삶은 이렇게 타인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이주석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Ladies' Exclusive

      Ladies' Exclusive

      오늘의 포토 정보

      TOP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