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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대장금의 문정왕후와 여인천하의 문정왕후
대장금과 여인천하 두 드라마에서 문정왕후가 등장하지요??

지금 대장금의 문정왕후가 이미 종영한 여인천하의 문정왕후의 어느 시대쯤인지요..

오늘 세자책봉에 관하여 내용이 왔는데 그때쯤이면.. 여인천하에서 세자로 나왔던

권오민군을 말하는건가요? 아님 매직키드마수리에 나오는 복성군을 말하는 건가요?

이 외에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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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정보가 없는 사용자
작성일2003.11.17 조회수 77,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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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째 답변
oh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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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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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기이긴 한데..
난정이는 ..글쎼요..
아무래도 전인화씨가 연기했던
왕비는 나올듯 싶은데요.
난정이와 대장금은..
하는 일부터가 다르니까요.
그리고 여인천하에서
주 내용은 정치이니까.
왕의 주치의라는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썼을까요?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30301&docid=241312&w=1&s=0&e=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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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신점은 쪽지 주세요 답변해 드릴께요 답변 수정해 드리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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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째 답변
sim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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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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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금 드라마에 나오는 문정왕후는 온화하고 인자한 이미지로 묘사되는데

중종의 마누라역인걸보면 여인천하의 문정왕후와 동일인물입니다..

잘 매치가 안되는 이유가 두 드라마의 성격 차이 때문인것 같은데요..

실제 문정왕후의 성격은 여인천하쪽이 더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12대 왕위를 인종이 잇게되는데요...인종은 문정왕후 친아들이 아니지요..

권오민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ㅡㅡ;;

원래 세자가 왕위를 계승하게됩니다...

팁으로 대장금에서 명이 트집을 잡는 이유중 하나가 중종이 쿠테타로 왕위를

빼앗았기때문이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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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답변
가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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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금과 여인천하의 문정왕후는 같은 인물 입니다.
세자 책봉 때면 1520년(중종15년)에 이야기 입니다.
그때 1520년에 인종은(권오민군 대역) 여섯 살에 세자에 책봉되어 25년간
세자로 머물러 있다가1544년 중종이 죽자 즉위하였고 그후 8개월 보름 남짓
왕위에 머물러 있다가 원인 모를 병으로 드러누워 시름시름 앓더니 후사도
하나 남겨놓지 않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방영하는 대장금도 그시대를 이야기하나 "장금"이라는 이름은연출자가 "명의허준"이 방영될때 자료를 찾던중에 장금의 기록을 보고 기획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허준이 1546년에 나서 1615년에 돌아가셨고 중종이 1506년에 나서 1544년에 승하했습니다.문정왕후는 1501년에나서 1565년에 돌아 가셨습니다.
장금은 중종대의 어의이니 선조대의 어의인 허준의 선배가 되는셈 입니다.

"남존여비의 봉건적 체제하에서 무서운 집념과 의지로 궁중최고의 요리사가 되고,
우여곡절 끝에 조선 최고의 의녀가 되어 어의를 비롯한 수많은 내의원 남자 의원들을 물리치고 조선조 유일한 임금 주치의가 되었던 역사상 실존인물,
의녀“장금"!
조선조 중종(1506-1544)때 “대장금”(大長今)이라는 엄청난 칭호까지 받은 전설적인 인물인 장금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그 동안 역사에 뭍혀 있던 한 여성의 의미 있는 성공사례를 소개합니다" 이렇게 연출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출처백과사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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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째 답변
뭐야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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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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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드라마의 문정왕후는 같은 인물이고

시대는 조선 중종때입니다

세자 책봉에 관한건은 원자아기씨(권오민) 를 세자

책봉할까 말까 그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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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번째 답변
am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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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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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정왕후 (文定王后 ; 1501~1565)
조선시대 중종의 계비(繼妃)로서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성은 윤(尹)이다. 윤지임(尹之任)의 딸이며, 명종의 어머니이다. 중종비 신씨가 즉위 직후 폐위되고,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가 세자 호(岵:뒤의 인종)를 낳은 뒤 죽자, 1517년(중종 12)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모후(母后)로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이때 남동생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쥐게 되자, 대윤(大尹)이라고 하는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즉,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정계에서 쫓겨난 문정왕후(文定王后)측의 세력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 형제는, 김안로가 실각한 뒤 다시 등용되어 점차 정권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정국은 윤여필(尹汝弼)의 딸인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와 윤지임(尹之任)의 딸인 제2계비 문정왕후의 외척간의 권력투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장경왕후에게 원자(元子) 호(岵)가, 문정왕후에게는 경원대군(慶源大君) 환(緝)이 각각 탄생하자, 김안로의 실각 이후 정계에 복귀하여 득세한 윤원로·윤원형 형제(小尹)는 경원대군으로 왕위를 계승하고자 하여, 세자의 외척인 윤임 일파(大尹)와의 사이에 대립과 알력을 빚게 되었다. 인종 즉위 뒤 정계는 대윤이 득세하였으나 소윤측은 대윤측에 의해 큰 정치적 박해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인종의 즉위와 함께 유관(柳灌)·이언적(李彦迪) 등 사림의 명사들이 인종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고,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에 의해 그 파의 사류(士類)가 많이 등용되어, 기묘사화 이후 은퇴한 사림들이 다시 정권에 참여하였다. 또한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일부 사림들은 소윤인 윤원형 일파에 가담함으로써, 사림들도 대윤·소윤의 양세력으로 갈라졌다. 이 동안 소윤의 공조참판 윤원형이 대윤의 대사헌 송인수(宋麟壽)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계자(階資)를 박탈당하고 윤원로 역시 파직된 사건이 생겨, 문정대비·소윤측의 대윤측에 대한 불만과 함께 문정대비의 인종에 대한 불만으로 발전되었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뒤를 이어 이복 동생인 어린 경원대군이 명종이 되자, 문정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이에 정국의 형세는 역전되어, 조정의 실권은 대윤으로부터 명종의 외척인 소윤으로 넘어갔다. 명종 즉위 직후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으로 재등용된 윤원로는, 윤임 일파의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그들이 경원대군을 해치려 하였다고 무고하였으나, 영의정 윤인경(尹仁鏡)과 좌의정 유관이, 망언을 하고 천친(天親)을 이간한다고 탄핵함으로써 오히려 파직, 해남(海南)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문정대비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소윤측의 뒤이은 음모는 끈질기게 진행되었다. 즉 예조참의로 재등용된 윤원형은 형인 윤원로의 책동이 실패하자, 이들 대윤 일파와 개인적인 감정이 있던 중추부지사 정순봉(鄭順朋), 병조판서 이기(李 ), 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 공조판서 허자(許磁) 등을 심복으로 하여,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중종의 8남 單)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한편 궁궐 밖으로는 인종이 승하할 당시 윤임이 경원대군의 추대를 원치 않아서 계림군(桂林君:瑠, 성종의 3남)을 옹립하려 하였는데, 유관·유인숙 등이 이에 동조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로써 윤임·유관·유인숙 등은 반역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死賜)되고, 계림군도 음모에 관련되었다는 경기감사 김명윤(金明胤)의 밀고로 주살되었다. 그 외 윤임의 사위인 이덕응(李德應)의 무고로 이휘(李煇)·나숙(羅淑)·나식(羅湜)·정희등(鄭希登)·박광우(朴光佑)·곽순(郭珣)·이중열(李中悅)·이문건(李文健) 등 10여 명이 화를 입어 사형 또는 유배되었으며, 무고한 이덕응도 사형되었다. 을사사화가 끝난 뒤에도 여파는 한동안 계속되어, 1547년 9월 문정대비의 수렴청정과 이기 등의 농권을 비방하는 뜻의 벽서가 발견되어, 봉성군 송인수 등이 사형, 이언적 등 20여 명이 유배당하는 정미사화와, 이듬해 홍문관박사 안명세(安明世)가 을사사화 전후의 시정기(時政記)에 윤임을 찬양하였다 하여 사형되는 등, 을사사화 이래 수년간 윤원형 일파의 음모로 화를 입은 반대파 명사들은 100여 명에 달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이후 약 50년간 관료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대옥사(大獄事)는 을사사화로서 마지막이 되었으나,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세력에 의해 붕당(朋黨)이 형성되었다. 한편, 중 보우(普雨)를 우대하여 숭유배불(崇儒排佛)을 무시하고 불교중흥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전기에 선종(禪宗)·교종(敎宗) 양종(兩宗)으로 강제 통합되어 세력이 줄어든 데 이어 그 양종의 존재마저 희미해진 당시에 1550년 봉은사에 선종을 두고 봉선사(奉先寺)에 교종을 두게 하여 선·교 양종을 부활시켰다. 한편 윤원형(尹元衡)·상진(尙震)과 더불어 300여 사찰을 국가공인 정찰(淨刹)로 하고, 도첩제(度牒制)에 따라 2년 동안 4,000여 명의 승려를 뽑는 한편, 승과시(僧科試)를 부활시켜 휴정(休靜)·유정(惟政) 등을 발탁했다. 보우가 주지(住持)로 있는 봉은사(奉恩寺) 근처로 중종의 능을 이장(移葬)시켰다. 1553년(명종 8) 명종에게 친정(親政)을 하도록 하였으나, 이것은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이고, 실제로는 윤원형과 협력하여 정사에 계속 관여하였다. 소생으로는 명종 이외에 의혜(懿惠) ·효순(孝順) ·경순(敬順) ·인순(仁順) 공주 등 1남 4녀를 두었다. 능은 서울 노원구 공릉동(孔陵洞)의 태릉(泰陵)이다.
★출처 : http://www.mtcha.com.ne.kr/koreaman/sosun/man58-munjungwonghu.htm

2.'인종죽음' 뒤에는 계모 문정왕후가 있었다.
권력, 천운이 따라야
-문정왕후의 일생은 천운이 작용했다는 얘기가 많다. 자신이 왕비에 오른 것은 중종의 제1계비였던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출산하자마자 승하했기에 이뤄졌고, 아들 명종 역시 인종의 요절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성질이 독하고 질투가 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설에는 인종이 그녀가 건넨 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는 설도 있다. 인종은 조선의 역대 왕들 중 가장 짧은 치세를 남긴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8개월여 왕위에 머물며 지극한 효성과 너그러운 성품, 금욕적인 생활 등 전형적인 선비의 모습으로 당시 사람들은 성군이라 일컬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성품은 계모 문정왕후의 표독하고 사악한 성격을 방치하게 했고 자신의 생명을 단축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생모(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낳고 7일만에 죽자, 그는 문정왕후 손에서 자라게 된다. 인종은 계모이긴 했지만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 문정왕후에게 효도를 다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왕후는 항상 인종을 원수 대하듯 했고 문안 인사차 들른 인종에게 “우리 모자(그녀와 명종)를 언제쯤 죽일 것이냐”고 말하며 괴롭혔다. 그러나 인종은 자신의 효성이 부족함을 개탄하며 죄책감에 시달리며 지냈다. 그리고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명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자식을 두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정사에는 ‘인종이 도학사상에 깊이 매료돼, 철저한 금욕생활을 추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종, 독살설의 시초
-야사에 따르면 문정왕후 윤씨는 몇 번이나 인종을 죽이려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그와 세자빈이 잠들어 있는데 주위에서 뜨거운 열기가 번져 일어나 보니 동궁이 불에 타고 있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아내를 깨워 먼저 나가라고 하고 자신은 조용히 앉아 서 타 죽겠다고 했다고 한다. 누가 불을 지른 것인지 알았기 때문. 그 때 밖에서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은 중종의 목소리였다. 인종은 그 소리를 듣고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겐 효행이 되나 부왕에게는 불효이자 불충이라고 말하며 아내와 함께 불길을 헤쳐 나왔다. 이런 연유로 인종의 죽음에 문정왕후가 개입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정사인 ‘인종실록’에는 ‘인종이 부왕의 죽음을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야사에는 어김없이 문정왕후가 등장한다. 즉 그녀가 독살했다는 것. 매번 인종을 핍박했던 대비 윤씨가 하루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문안인사차 온 인종을 반겼다. 그리고는 떡을 대접했다.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반겨주는 것에 감격한 인종은 아무 의심 없인 그 떡을 먹었다. 그 후 인종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숨을 거두었다. 인종의 장례도 독살설에 설득력을 갖게 했다. 인종의 장례는‘갈장(임시로 빨리 장례를 지내는 것)’으로 집행됐다. 문정왕후를 따르던 세력들이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기 때문. 이로써 인종은 독살설의 시초 임금이 됐다.
불교 부흥시대 이뤄
-연산군을 쫓아내고 즉위한 중종의 첫 부인은 신씨였다. 신씨의 아버지는 연산군 시절 우의정인 신수근이었는데, 중종반정의 공신들은 그를 연산군의 처남이란 이유로 죽여 버린다. 후환이 두려운 공신들은 중조의 첫 부인 신씨를 내쫓고 새 왕비를 맞아들이도록 하는데, 그녀가 인종의 어머니인 장경왕후 윤씨다. 그러나 장경왕후는 중종 첫 아들(인종)을 낳고 7일만에 죽었고 중종은 2년 후인 1517년 새로운 여자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는다. 그녀가 바로 문정왕후 윤씨인 것이다. 그녀는 명종을 대신해 8년간 수렴청정을 했는데 왕권을 완전히 장악,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수렴청정을 끝내고도 윤씨는 명종의 정사 운영에 지나치게 간섭을 했다. 심지어 왕이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매질을 하거나 독설을 쏟아 붓기도 했다고. 이런 지난친 집권욕은 명종 시대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많은 선비의 피를 빼앗아간 을사사화가 일어났고 양주의 백정 임거정이 황해도와 경기도 일원에서 횡행했다. 또 밖으로는 삼포왜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명종은 문정왕후에 반기를 들며 을사사화 때 죽은 선비를 신원하고 신진세력을 등용하고 선정을 펴보려고 노력했으나 번번이 어머니의 벽에 막혀 실패하고 말았다. 문정왕후는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도 했는데,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키고 폐지됐던 승과와 도첩체를 실시하기도 했다. 또 승려 보우를 총애해 병조판서직에 재수하는 등 사대부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문정왕후와 승려 보우와의 관계를 의심하기도 했다. 문정왕후 사후 보우는 유배지에서 죽고 불교는 다시 배척당하게 된다.
★출처 : http://my.dreamwiz.com/dynasty4/history/know/왕관련/문정왕후.html

3.명종 [明宗 1534~1567] : 조선 제13대 왕(재위 1545∼1567).
자 대양(對陽). 이름 환(緝 ). 시호 공헌(恭憲). 중종·문정왕후(文定王后)의 둘째아들이며, 인종의 아우이다. 비(妃)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綱)의 딸 인순왕후(仁順王后). 처음에 경원군(慶源君)으로 봉해졌다가, 1545년(인종 1) 경원대군이 되었다. 인종이 죽자 12세로 왕위에 올랐으며, 처음에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문정왕후의 남동생 윤원형(尹元衡) 등 소윤(小尹)일파가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 등의 대윤(大尹) 일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1547년 양재역(良才驛)의 벽서(壁書)사건, 1548년 사관(史官) 안명세(安命世)의 《시정기(時政記)》 필화(筆禍)사건, 1549년 이홍윤(李洪胤)의 옥사(獄事) 등으로 인하여 을사사화 이후 100여 명의 선비들이 참화를 당하였다. 한편 불교를 독신(篤信)하는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普雨)를 중용하여 높은 벼슬을 주었고 불교를 중흥시켰다. 1553년 친정(親政)이 시작되나,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간섭이 여전하였다.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1563년 비(妃)의 외숙 이량(李樑)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이량도 당파를 조성하여 선비들을 숙청하려 하므로, 기대항(奇大恒)에게 밀계(密啓)를 내려 이들을 추방하였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 일당을 숙청하고, 보우를 장살(杖殺)한 뒤 불교를 탄압하였다. 1552년 황해도 일대에서 소란을 피운 임꺽정(林巨正)을 포살(捕殺)하였다.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 남해안 일대가 소란하였으며, 여진족의 빈번한 침입으로 북쪽지방도 불안하였다. 그러나 수차(水車)를 제조하여 농사일의 편의를 도모하였고, 전함을 건조하여 외침에 대비하였다. 1554년 비변사(備邊司)를 다시 설치하였고, 수륙병(水陸兵)을 관찰사의 지휘 아래 두어 공동출전하게 하는 등 국방대책을 수립하였다. 또 여러 가지 간행(刊行)사업을 전개하여 1548년 《속무정보감(續武定寶鑑)》, 1555년 경국대전의 원전(原典)·속전(續典) 등을 간행하였다. 1551년에는 권문세가들이 불법으로 겸병(兼倂)한 토지를 몰수하여, 이를 공정하게 재분배하는 등 치안·국방·문화창달·경제개혁 등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능은 양주(楊州)의 강릉(康陵)이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4.400년전 임신부-태아 미라…문정왕후 종손녀로 밝혀져
조선 전기의 세도가 윤원형(尹元衡)의 종손녀가 출산 중 자궁 파열로 숨져 태아와 함께 반(半)미라 상태로 보존돼 있다 발굴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발굴을 맡았던 고려대측은 6일 “436년 전에 숨진 임신부와 태아의 시신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고 밝혔다. 부인의 미라는 9월 경기 파주시 교하읍 파평 윤씨 정정공(貞靖公)파 묘역에서 발견됐으며 고려대팀의 조사 결과 20대 초중반의 나이에 아기를 낳다 자궁 파열로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발굴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각종 유류품으로 미뤄 부인은 윤원형의 형 원량(元亮)의 아들 소(紹)의 딸로 보인다”고 밝혔다. 윤원량(1495∼1569)은 정3품 당상관 관직인 돈녕부(敦寧府) 도정(敦寧都正)을 지냈다. 돈녕부는 조선시대 왕실 외척을 관리하던 부서이다. 윤소는 군수를 지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파평 윤씨 가문은 왕의 외척으로 권세를 누렸다. 윤원량의 누이는 중종의 비인 문정왕후였고 윤소의 누이 역시 인종의 후궁인 숙빈이었다. 파평 윤씨 족보에 따르면 윤소는 정실로부터 아들 하나를 두었고 후실로부터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둔 것으로 돼 있어 미라의 주인은 후실 소생의 외동딸로 추정된다. 고려대 팀의 조사결과 부인은 키 155㎝에 아담한 체격이었으며 자궁에 2∼3㎝ 길이로 찢어진 상처가 있었다. 태아는 머리가 모체의 자궁을 벗어나 질 쪽으로 끼어 있었으며 바깥에서 육안으로 태아의 머리카락을 볼 수 있는 상태였다. 고려대팀이 X레이와 자기공명영상촬영(MRI) 등의 검사와 부인의 복부를 직접 절개해 확인한 결과 태아는 모체의 오른쪽 배 위쪽으로 다리를 두고 있었다. 태아의 몸에는 혈흔이 묻어 있었고 태아는 고환을 통해 남자인 것도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모자의 시신이 완벽히 반미라 상태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숨질 당시의 계절적 이유와 관의 형태 때문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관에서 ‘병인 윤시월’이라는 한글 묵서(墨書)가 발견돼 숨진 시기는 1566년 윤시월(양력 12월)로 추정됐다. 또 시신은 목관 바깥에 다시 나무로 곽을 만든 뒤 여기에 회를 두른 묘에 묻혀 있었다. 회가 시멘트처럼 굳어지면서 묘가 외부와 차단돼 거의 진공 상태에서 보존됐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부인이 친정에서 결혼해 아기를 낳다 숨지는 바람에 시가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문중 묘역에 묻힌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국립민속박물관 김영재 학예사는 “이는 결혼한 뒤 아기를 낳을 때까지 남편과 함께 친정에 머물다 시가로 가는 ‘우귀(于歸·해묵이)’의 풍습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미라 묘역에서는 한글 편지 한 통과 초서 편지 두 장도 함께 발굴돼 이에 대한 연구도 진행 중이다.
(동아일보)이성주기자
★출처 : http://news.nate.com/Service/natenews/ShellView.asp?LinkID=4&ArticleID=2002110618474303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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