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타운> 영화 포스터

▲ <차이나타운> 영화 포스터 ⓒ 폴룩스픽처스,CGV아트하우스


* 이 기사엔 영화의 일부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지난 몇 년간 멜로, 공포가 아닌 장르에서 여성 배우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를 살펴보자. 2000년대 초반에 <고양이를 부탁해> <아프리카> <울랄라 씨스터즈> <피도 눈물도 없이> 등이 쏟아져 나온 후에 명맥을 이은 영화는 <형사> <조선미녀삼총사> <해적> 정도가 떠오른다. <마더>도 드문 경우였다.

한국 영화는 양적, 질적으로 성장을 거듭했으나, 여성 배우들의 입지는 답보 상태와 다름없었다. 전도연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10년 전보다 지금 여배우가 출연할만한 영화가 더 줄어든 거 같다"며 여성 배우가 느끼는 시나리오의 빈곤, 역할의 한계 등을 이야기한 바가 있다. 김혜수도 <차이나타운>의 제작보고회에서 "여성이 주체가 되는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여성에게 비중이 있어도 남성 배우를 보조해주는 역할이 많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차이나타운>은 김혜수와 김고은, 두 여성 배우가 중심에 선 영화다. 소재로 삼은 것은 남성 배우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범죄와 폭력이다. 앞서 범죄와 폭력에 접근했던 <피도 눈물도 없이>가 다양한 소재가 실험되던 2000년대 초반에 가능했던 '돈을 갖고 튀어라' 부류의 소동극이었다면, <차이나타운>은 근래 하나의 경향을 형성한 한국형 누아르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다. 두 영화의 장르적 태생은 한국 영화의 변화된 지형도를 나타낸다.

<차이나타운> 영화의 한 장면

▲ <차이나타운> 영화의 한 장면 ⓒ 폴룩스픽처스,CGV아트하우스


다양한 이방인들이 모여드는 공간 '차이나타운'에서 엄마(김혜수 분)는 밀입국하는 자들에게 위조신분증을 만들어주고, 사채를 빌려주는 사업을 하는 조직을 이끄는 지배자다. 지하철 10번 보관함에 버려졌던 일영(김고은 분)은 버려진 자신을 유일하게 받아준 엄마에게 쓸모 있는 자기 되기 위하여 어떤 짓도 망설이지 않는다. 그렇게 '가족'이란 울타리에 속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일영은 채무자 석현(박보검 분)이 베푸는 따뜻함과 친절함에 마음이 흔들리면서 위태롭던 공존은 깨진다.

연출을 맡은 한준희 감독은 "엄마와 일영은 서로의 과거이자 미래"라고 밝혔다. 엄마는 일영을 옆에 두는 이유를 "자라질 않아서"라고 말한다. 그녀는 과거 자신과 같은 길을 걸었던 일영이 다른 세상에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여기에 머물며 자신의 현재, 즉 미래의 후계자가 되길 원한다. 그러나 일영은 석현을 만나면서 새로운 미래를 그리기 시작한다. 영화 <신세계>를 빌려서 표현하자면 <차이나타운>은 다른 미래, 다른 신세계를 꿈꾸었던 자들의 파국이다.

<차이나타운>은 엄마와 일영 외에 여러 군상을 보여주며 차이나타운의 핏빛 욕망도를 수놓는다. 엄마의 오른팔 격인 우곤(엄태구 분)은 가족의 가치를 찾고자 노력한다. 우곤과 짝패를 형성하는 인물인 홍주(조현철 분)은 엄마가 하는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자다. 엄마의 속을 썩이지만, 결코 품을 벗어날 생각이 없는 쏭(이수경 분)은 일영과 반대편에 위치한다. 한때 엄마 새끼로 자랐던 치도(고경표 분)는 이제 엄마를 위협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섰으나, 오히려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커보인다. 치도는 우곤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홍주가 그들의 과거인 것처럼.

<차이나타운> 영화의 한 장면

▲ <차이나타운> 영화의 한 장면 ⓒ 폴룩스픽처스,CGV아트하우스


<차이나타운>이 주는 가장 큰 영화적 매력은 김혜수와 김고은이 이루는 연기의 앙상블이다. 여기에 추가해야 할 한 명은 어릴 적 일영으로 분한 아역배우 김수안이다. 어린 일영이 처음 엄마를 만나는 장면, 엄마를 거역한 일영과 일영의 꿈을 앗아간 엄마가 대립하는 장면, 어린 일영과 지금 일영이 환상 속에서 마주하는 장면은 배우의 눈과 표정, 호흡과 대사, 행동이 극대화되며 강렬한 감흥을 전해준다.

<차이나타운>은 마치 <신세계>의 여성판 같으면서, <달콤한 인생>의 다른 버전으로 다가온다. 또한, 박찬욱이 즐기는 폭력과 미장센도 서려 있고, 왕가위의 영향도 감지된다. 그만큼 외형은 근사하다. 문제는 이야기다.

엄마와 일영이 충돌하는 서사의 변곡점을 지나는 순간부터 영화는 기우뚱거리기 시작한다. 인물들의 갈등 요소는 두드러지나, 왜 그런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은 부족하다. 몇몇 캐릭터는 어떤 이유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떨어지는 서사의 동력을 잔혹함으로 채우면서 화면은 나뒹구는 시체들로 가득하다. 희생되는 인물엔 어떤 감정 이입에 어렵기에 시체들은 고깃덩어리처럼 느껴진다. 피로 얼룩진 <차이나타운>은 <폭력의 역사>를 묻고 싶었던 건가, <화이>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 그것이 궁금하다.

차이나타운 한준희 김혜수 김고은 엄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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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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