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복싱, 맨주먹으로 싸워야 직성이 풀리나

입력
수정2016.04.03. 오후 6:08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주먹이 운다’ ‘법보다 주먹’이라는 말이 있듯이 권투, 즉 복싱은 ‘욱’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스포츠이다. 고대 그리스의 투사들은 밧줄에 매인채 마주보는 돌에 앉아 어느 한 편이 녹다운 될 때까지 주먹으로 쳤다. 쓰러질 때까지 휘두르는 무식한 주먹다짐이었던 것이다. 로마시대 들어 더욱 잔인해졌다. 전사들은 주먹보호를 위해 감싼 가죽끈에 쇠징을 박았다. 가죽끈은 훗날 ‘사지 찌르기’라는 의미의 흉기인 미르멕스로 변질됐다. 전사가 죽어나갈 때까지 진행되던 야만의 이벤트는 기원전 393년 무렵 공식폐지됐다.
1889년 7월8일 벌어진 설리번과 킬베인의 혈투.
이후 상금을 걸고 벌이는 비공식 대결의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던 권투가 전면에 재등장한 곳은 17세기 영국이었다. 너무 야만적이라는 비판 때문에 몇가지 ‘문명적인 룰’을 속속 만들었다. 다운 뒤 30초 중단, 글로브 사용 의무화, 1회 3분 후 1분 휴식 룰 등이었다. 1889년 7월8일 미국 미시시피주 리치버그에서 벌어진 존 설리반과 제이크 킬레인의 대결은 인류 최후의 맨주먹 싸움이었다. 설리반은 킬레인의 강공에 크게 고전하다 44라운드들어 토하기까지 했다. 킬레인의 승리가 예감됐지만 반전이 벌어졌다. 설리반은 75회까지 버텼고, 견디다못한 킬레인 매니저가 수건을 던졌다. 둘 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혈투였다. 맨주먹 챔피언의 타이틀을 지킨 설리반은 3년 뒤(1892년) 신식룰인 글로브 대결에서는 무너진다. 상대인 짐 코벳의 아웃복싱에 농락당해 21회 KO패 한 것이다.

‘신사의 룰’로 무장한 복싱은 이후 100년 가까이 인간의 결투본능을 대리충족시키는 히트 스포츠로 발전했다. 하지만 고정된 룰에 얽매인 복서들은 사각의 링 안에서 안주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세기의 졸전’으로 끝난 파퀴아오
존 설리번. 담배광고에 실린 얼굴이다.
와 메이웨더의 대결은 추락한 복싱의 현주소를 웅변했다. 글로브를 낀채 클린치에 몰두하는 모습에 식상한 팬들은 더 강한 자극을 찾아 종합격투기 등으로 시선을 돌린다. 국내 사정은 더 암담하다. 이미 1980년대부터 가짜복서가 등장하고, 편파판정 시비로 해외까지 망신살이 뻗치는 등 지금까지 악재만 쌓였다. 여기에 힘든 복서생활을 기피하는 풍조까지…. ‘매에 장사없다’는 예전 해설자의 단골멘트가 떠오른다. 국내복싱은 프로·아마 할 것 없이 그로기에 빠졌다. 최근엔 아마대표선수들까지 오는 8월 리우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예선전에서 전원 탈락했다. 1948년 런던올림픽 이후 68년 만에 올림픽 출전이 좌절되는가. 그래도 마지막 실낱같은 관문이 남아있다니 마지막까지 희망을 걸어보겠지만…. 그나저나 복싱의 인기를 회복할 길은 없을까. 그렇다고 야만의 시절로 돌아가 글로브를 벗고, 죽을 때까지 맞대매 할 수도 없고….

<이기환 논설위원>

▶ 인기만화, 웹툰 전권 무료만화 보기

모바일 경향 [경향 뉴스진 | 경향신문 앱 | 모바일웹] | 공식 SNS 계정 [경향 트위터] [페이스북] [세상과 경향의 소통 커뮤니티]
- ⓒ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향신문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생활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