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바람, 낙엽, 땅, 열매… 인생이 비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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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의 애정만세]


영화 ‘인생 후르츠’에는 노부부가 등장한다. 가정은 풍성함 그 자체. 함께 가꾼 정원부터 정성 들인 식탁까지 인생의 황혼기를 수놓는 지극한 사랑은 그 자체로 생기가 넘친다. 저물어가는 낙엽에 땅이 비옥해질 수 있다는 교훈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언스플래시닷컴

백전백패다. 과장하자면 그렇다. 요즘 내가 본 영화나 책이나 공연들은 다들 그저 그랬다. '아, 시시하다'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연말이면 종종 보았던 어느 영화를 보고서는… 침울해졌다. 중간중간 웃었고,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지만, 이제 연말이라고 해서 그 영화를 볼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애정했었는데, 애정의 유효기한이 다한 것이다. 쓸쓸해졌다.

이 영화도 시시할 줄 알았다. 귀농 이후의 삶? 자연 찬미? 부부 예찬? 이런 건 내 취향이 아닌데. 사과를 키워 사과잼을 만드는 이야기 같은 걸 스크린으로 보고 싶지는 않은 거다.

그럼에도 또 보러 가는 건 무슨 심리인가 싶지만… 그래도 뭐 하나는 건지고 싶은 마음이랄까. 몇 년 전 연말에 보았던 미하엘 하네케의 영화 '아무르' 같은 것, 그때의 파동 같은 것. 마음에 잠시나마 담을 수 있는 그런 것, 빛이어도 좋고 어둠이어도 좋고 뭐라도 좋으니 좀 마음에 들어와 줬으면 싶었다.

극장에 앉아 처음 나오는 목소리를 듣는데 가슴이 쿵 했다. 기키 기린. 그녀는 올해 여름에 죽었다. 나는 올여름에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에 나오는 기키 기린을 봤다. 영화에서 기키 기린은 죽고, 죽은 그녀는 가족이 사는 마당에 묻힌다(전문용어로는 '시체 유기'). 그 영화를 보고 하루인가 지나서 기키 기린이 실제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 계절이 지나 이미 죽은 기키 기린의 목소리가 나오는, 그러니까 죽기 전의 기키 기린이 목소리를 입혔을 영화를 보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90세 남편과 87세 아내가 나오는, 죽음과 가까운 이들이 주인공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머문다." 바로 이 문장이었다. 내 마음을 내려앉게 한 기키 기린의 첫 발성이. 그렇게 이 영화는 시작되었다. '인생 후르츠'다. 이상한 제목이다. 영어 제목은 'Life is Fruity'. '인생은 과일 맛' '인생은 열매' '인생은 감미로워'… 어떻게 옮겨도 살지 않는다. 슈이치와 히데코의 사시사철 풍성한 정원이, 그 정원의 만발한 생기가. 슈이치가 90세 남편, 히데코가 87세 아내다. 슈이치는 건축가고, 히데코는 주부다.

그들이 사는 집에는 사랑이 있다. 그것도 지극한 사랑. 나만의 독창적인 견해가 아니라 이 영화를 본 누구라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히데코에 따르면 슈이치는 '사랑한다'고 한 적이 없다. 말 대신 행동을 한다. 히데코와 슈이치의 얼굴을 함께 새긴 도장을 파서 여기저기에 찍는다. 그들이 가꾸는 정원의 푯말에, 슈이치가 매일 보내는 10통의 편지에. 그리고 히데코가 만든 떡에 자신이 만든 '히데코'라는 인장을 찍어준다. 히데코가 어떤 일을 할지 말지 물어오면 슈이치는 이렇게 말한단다. '당신이 하는 건 좋은 일일 테니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요.' 이런 말을 듣는다면 '좋은 일'이 아닌 걸 할 수 없게 된다.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책임을 져야 하니 말이다. 나의 행동에, 상대의 믿음에, 우리의 행복에. 그 말 하나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에 지엄한 무게가 생겨난다.

그렇다면 히데코는 어떻게 슈이치의 사랑에 응답하느냐? 웬만해서는 찡그리지 않고, 슈이치를 잘 입히고, 잘 먹이려고 한다. 그러려고 한다고 히데코가 말했다. 내가 본 스크린 속의 히데코는 이러하였다. 본인은 아침에 토스트에 잼을 발라 먹으면서 남편 몫으로는 밥을 지었다. 구운 생선에 갈은 무, 스다치를 곁들여서. 감자를 먹지 않으면서 감자를 좋아하는 슈이치를 위해 니쿠자가(고기 감자 조림)를 하거나 감자 고로케를 만들었다. 질냄비에 스트로가노프를 끓였다. 보글보글. 우메보시를 만들고 전갱이를 말렸다. 무쇠 팬에 팬케이크를 폭신하게 구워 스트로베리쇼트케이크를 뚝딱 만들어냈다. 식탁에는 꼭 식탁보를 깔고(그것도 다림질한!), (PVC가 아닌) 리넨 매트를 깔고, 식탁보와 식탁 매트를 자주 바꿨다. 맛과 미감과 정성이 다 있는, 내가 받고 싶은 식탁이다. 내게도 이런 아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정상적인 신체의 경계가 이완되어 어떤 것을 섭취할 때, 공감적이고 친밀한 관계가 꽃을 피운다. (…) 사랑을 담아 음식을 준비하고, 시각적으로 아름답게 차리고, 먹으면서 감각을 느끼고, 여유 있고 사랑스러운 분위기에서 그런 음식을 매일 공유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낭만적인 남녀가 함께 사랑을 나누는 방법이고, 한쪽 또는 양쪽이 그들의 소중한 세계의 한 부분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로버트 노직의 책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에 나오는 문장이다. 히데코와 슈이치가 쌓아온 특별한 관계, 60년이 넘는 관계를 잘 설명하는 말일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인용했다. 로버트 노직만큼이나 '먹는다는 일'로부터 의미를 느끼는 나로서는 히데코의 사랑법에 눈이 환해졌다.

또 이런 문장들은 어떠한가. "무신경하게 대충 식사하거나 미적으로 냉담하게 식사하지 않고 주의 깊게 식사할 때, 식사는 어떤 성격을 띠는가? (…) 우리는 입이라는 대기실에서 음식을 만나고 그곳에서 인사를 나눈다. 우리는 음식을 더듬어 조사하고, 그것을 에워싸고, 그것을 촉촉하게 만들고, 치아 바로 안쪽의 단단한 입천장에 음식을 혀로 누르고, 압력을 가하면서 빨고, 이리저리 돌린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열어 음식의 구체적 성격, 그 맛과 질감을 받아들이고, 그래서 그 물질의 내적 성질을 받아들인다. 사과의 순수함과 품위, 딸기의 폭발적인 기쁨과 성성(sexuality)을 예로 들고 싶다."

나는 정말이지 이런 글을 쓰는 철학자가 좋다. 사과에서 순수함과 품위를, 딸기에서 성적 환희를 발견하기도 하는 이런 철학자는 잘 없기 때문이다. 이 책,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의 서문을 읽는 것만으로 작가의 명민함과 통찰력, 감성과 인간적 매력이 마음을 들뜨게 한다.

희소한 것은 귀중하다. 슈이치와 히데코의 인생처럼. 로버트 노직의 이런 철학서처럼. 내가 길게도 인용했던 이 챕터의 제목은 '일상의 신성함'이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일상의 신선함'인 줄 알았다. 슈이치와 히데코는 일상을 신선하게 유지함으로써 신성을 일깨우는 성자들이었다.

속인인 나는 그저 내일도 아침으로 사과 한 알을 먹을 것이다. 사과의 순수함과 품위도 함께 곁들여서.

[한은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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