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尹愭, 1741~1826)는 18세기에 활동한 문인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경부(敬夫), 호는 무명자(無名子)이다. 근기남인 출신으로 20세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제자가 되어 경학과 문장을 배웠다. 33세에 증광 생원시에 합격하여 근 20년을 성균관 유생으로 지냈다. 이때 220수에 걸쳐 성균관의 모습을 읊은 <반중잡영>을 지었다.
윤기의 시는 개성적인 시각과 참신한 표현이 돋보이며, 짧고 쉬운 문장 속에 깊은 철학적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작품도 적지 않다. 날카로운 필력으로 현실의 여러 모순을 예리하게 찌르는가 하면 해학과 관조로 익살스런 웃음과 달관의 자세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남다른 감수성과 직관력을 보여주는 윤기의 시세계는 많은 독자들을 매료시킬 것이다.
윤기는 문란해진 제도 속에 한미한 출신으로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했고, 52세의 늙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뒤에도 미관말직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과거제도에 깊은 관심을 가져 「과설(科說)」, 「논과거(論科擧)」, 「과폐(科弊)」, 「과유잡요(科儒雜?)」 등 다수의 시문에서 문란상과 부조리를 신랄하게 고발하였다. 또한 몰락한 양반으로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유난히 선비다운 조행을 강조하였으며, 「가훈」과 「집안의 금계」 등 다수의 글을 남겨 자손들을 엄히 훈계하였는데, 여기에는 당시 양반들의 비행과 타락상이 천태만상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글들은 당시 양반 사회의 이면을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 리포트이자 향후 19세기 관료 사회의 모순을 미리 내다보는 창이라 하겠다.
이 책은의 저본은 필사년 미상의 원고로, 후손 윤병희(尹炳曦) 가(家) 소장본이다. 1977년에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한 바 있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국문집총간 256집으로 간행하였다. 본 연구소에서는 저본을 다시 선명하게 디지털 사진으로 찍어 기존의 오류를 일일이 바로잡고 원문을 꼼꼼히 교감표점하여 관련 학계의 이용자들에게 신뢰도 높은 연구 정보를 제공하려고 노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