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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스토리

박인수

소리의 예술가, 음악의 자유인

[ 朴忍洙 ]

출생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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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사람들의 삶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서울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하고 줄리아드 음대에서 마리아 칼라스 장학생으로 공부, 영혼을 울리는 목소리로 남미와 유럽에서까지 주역 테너로서 놀라운 성공을 거둔 음악인 박인수. 20여 년간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며 3백 회가 넘는 오페라 공연에서 주역의 자리를 지켜온 그에게도 역경과 고난의 순간이 있었다. 위기를 기회로 극복하며 꿈을 향해 전진해온 테너 박인수의 음악 인생을 만나보자.

음악인 박인수 인터뷰 영상

저는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일본 중앙대 법대에서 유학을 하셨고, 서울시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셨어요. 공무원 생활 중 시청의 요직이란 요직은 두루 거치셨지요. 운수과장, 도시계획과장, 건설과장 등 소위 돈이 좀 생긴다는 자리였죠. 그런데도 저희 집안은 너무 가난했어요. 고등학교 학비조차 제대로 내지 못할 형편이었죠. 아버지께서 지나치게 청빈하셔서 남에게 베풀기는 좋아하셨는데, 도움은 일절 거절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정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 학비를 구하러 친척들을 찾아 다녀야 했어요. 그때는 어린 마음에 아버지를 굉장히 원망했습니다. 아버지는 노래를 좋아하셨고 노래를 한 번 시작하면 트로트에서부터 이태리 민요, 오페라 아리아, 가곡에 이르기까지 계속 부르셨어요. 어머니는 한국의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 매우 알뜰한 분이셨고, 음식 솜씨가 굉장히 좋으셨죠.

제가 네 살 되던 해에 미아리로 이사를 했는데, 그때는 미아리에 집이 몇 채 없었어요. 산과 들, 논과 밭만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었죠. 여름에는 붕어와 피라미를 잡으러 다니고 가을에는 메뚜기를 잡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독서를 많이 했어요. 책 읽는 걸 굉장히 좋아했거든요. 초등학교 때는 소년지로 나오는 것들은 죄다 읽었고, 중학교 땐 세계 명작 시리즈를 거의 다 읽었어요. 웬만한 명작 수준의 책들은 중학교 때 다 뗀 것 같아요.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인지 지금도 책을 많이 읽는 편이에요. 특히 역사 책에 관심이 많아요. 책을 많이 읽은 경험은 노래를 하는 데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무대에 올라 대중을 사로잡는 공연을 펼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박인수 선생은 어린 시절 상당히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성격을 극복해보고자 중학교 때부터는 각종 운동을 배웠고 친구들과 어울려 싸움질도 했던 그였지만 아직도 어린 시절의 내성적 성격이 조금 남아 있다고 한다.

네, 지금 제 모습으로는 상상이 가지 않겠지만 굉장히 내성적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콩나물하고 두부 좀 사오라고 돈을 주셨는데, 돈을 손에 쥐고 가게 앞에서 한 15분 동안 머뭇거릴 정도였어요. 외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제 돈을 내고 사는 건데도 내성적이라 말을 못 하는 거에요. 조금만 부끄러우면 얼굴이 새빨개졌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런 성격이 아직까지도 조금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를 못 하고 부탁을 잘 못하거든요. 충분히 해야 되고, 할 수 있는 것도 쉽게 말을 꺼내질 못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얼굴도 하얀데다 소심하기까지 해서 별명이 ‘계집애’였어요. 당시 ‘계집애’로 불리는 게 저에게는 최대의 모욕이자 콤플렉스였죠.

초등학교 5학년 가을 어느 날이었어요. 며칠 동안 비가 와서 날씨가 쌀쌀했는데,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모두 양지바른 처마 밑에 일렬로 서서 햇볕을 쪼이고 있었어요. 저도 그 중 한 명이었고요. 그런데, 한 녀석이 오더니 “야! 색시, 비켜.”하더라고요. “내 자린데!”했더니 다짜고짜 제 따귀를 때리는 거예요. 얼마나 화가 나고 분했겠어요. 그런데도 그 아이에게 덤비지 못했습니다. 그게 어린 마음에 한이 되었죠.

같은 반 친구한테 뺨을 맞고도 대들지 못했으니 얼마나 마음에 상처가 남았겠어요. 부모님께서도 저를 굉장히 답답해 하셨죠. 그래서 중학교에 입학을 하고 난 뒤에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격렬한 종목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해서 럭비부에 들어가고 기계체조도 배웠어요. 유도부터 수영에 이르기까지 안 배운 종목이 없었죠. 전국 대회에 나갈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체력은 물론 체구도 굉장히 커졌죠.

그랬더니 저를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거예요. 함부로 대하지도 못 하고요. 그러다 보니 싸움 꽤나 한다는 친구들과 어울리게 됐어요. 밤낮 어울려 다니며 싸움도 많이 했죠. 그러다 싸움패인 ‘미아리 오형제파’를 결성했어요. 소위 말하는 조폭이라든가 돈과 관련된 조직은 아니었고, 청소년기의 영웅 심리가 발동해 만들어진 조직이랄까요. 친구들이 저를 두목으로 추대했고, 저희는 삼국지의 도원결의를 흉내 내서 각자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막걸리에 섞어 마시면서 형제의 결의를 다졌어요.

지금도 손가락에 흉터가 남아 있어요. 그렇게 오형제파 두목으로 싸움질을 일삼고 다니면서 저는 마도로스가 되어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아마 어린 시절 소극적이고 놀림을 당하고 맞고 다니던 상처 때문이었나 봐요. 그 시절에는,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바로 부산에 내려가 배를 탈 작정이었죠.

마도로스를 꿈꾸던 소년 박인수에게 성악과의 인연은 운명처럼 찾아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회에서 노래를 부른 것을 계기로 목사님께서 성악가의 길을 추천해주신 것. 특별히 음악에 관심이 있지도,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지도 않던 박 선생이었지만, 그 뒤로 이상하게 노래하는 것이 좋고 음대에 진학해야겠다는 꿈을 품게 되었다.

공부는 안 하고 싸움만 하고 다니면서도 이상하게 교회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동네 교회엘 다니기 시작했는데, 노래 부르는 게 좋아서 성가대를 했거든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말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어요. 그때 저와 제 동생이 특송을 했죠. 특송이 끝난 뒤 목사님께서 저를 보자고 하시더니 “너는 성악을 해야겠다.”하시더라고요. 저는 “아닙니다. 저는 음악은 직업으로 안 합니다. 졸업하면 부산에 가서 배를 탈 거예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도 목사님은 계속 무조건 성악을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다음날도 저에게 독창을 시키셨어요.

노래 부르는 게 즐겁긴 했지만 특별히 제가 노래를 잘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오히려 동생이 저보다 노래를 잘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생각에 제가 목사님을 계속 피하자 목사님께서 하루는 제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시작하셨어요. 뭐라고 기도하시는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딱 한 문장만 귀에 들려 머릿속에 남았어요. “네가 성악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소리였습니다. 참 이상하죠. 그런데 그 기도 내용이 제 마음을 움직였는지, 그 뒤에 마도로스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슬그머니 진로를 바꾸었어요.

제가 성악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게 고등학교 2학년 말이었어요. 바로 음대에 진학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죠. 그래서 1년 정도 실력을 더 쌓기로 마음 먹고, 고등학교 졸업 후 구청에 임시직으로 들어갔습니다. 낮에는 구청에서 근무하며 돈을 벌었고, 또 역사에 관심이 많아 저녁에는 당시로서는 야간이었던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 다녔어요. 성악을 전공하기로 했지만 야간대학에는 성악과가 없었고 역사는 언제라도 꼭 배우고 싶었거든요.

그러면서 당시 이화예고에 계셨던 이우근 선생님께 정식으로 성악 레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의 3대 테너 가수 중 한 분이셨어요. 그런데 중요한 게 ‘레슨비’ 잖아요. 레슨비가 있을 리가 있나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저에게는 레슨비를 내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3개월 정도 정식 레슨을 받았고, 그러다 1960년 서울대 음대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 달걀 다섯 꾸러미를 들고 선생님을 찾아 뵈었죠. 달걀 다섯 꾸러미면 50개에요. 당시에는 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었어요. 제 소원이 매일 아침 날달걀을 하나씩 먹는 거였거든요. 달걀 살 돈이 없었으니 닭을 기르는 친구네 집에서 가끔씩 얻어먹는 게 전부였죠. 그만큼 달걀이 귀하던 시절이었어요.

서울대 음대 재학 시절, 좋은 소리의 비결을 찾아내기 위해 매일 동물원을 찾아가 사자가 울기만을 기다렸다는 박인수 선생. 소리에 대한 그의 열정과 탐구욕은 그를 영혼을 울리는 성악가로 만들었다.

운 좋게도 우수한 실기 성적으로 입학을 했어요. 그런데 원하던 음대에 입학을 하고 보니, 남학생보다 여학생 수가 훨씬 많은 거예요. 성악과는 남녀 비율이 반반 정도였는데, 기악과는 여자가 대부분이더라고요. 남자들끼리 어울려 다니며 싸움을 하고 다니던 저였으니 여학생이 많고 섬세한 음대 분위기에 적응을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어요. 정이 안 가더라고요. 그래서 학교를 많이 빠졌습니다. 수업에 거의 안 들어갔다고 할 정도로요. 그런데 노래를 하는 건 좋아서 레슨 시간에는 꼭 맞춰서 들어갔어요.

당시 제 모든 관심은 소리에 있었습니다. 전차에서 기적이 울리면 ‘어떻게 저렇게 멀리 가는 소리가 날까?’가 궁금한 거에요. 어떤 원리로 그렇게 멀리 가는 소리가 나는지, 전차를 하루 종일 넋 놓고 바라보며 생각할 때도 있었어요. 또, 사자가 공명이 잘 되고 큰 소리가 난다고 해서 사자 울음소리를 들어보려고 매일 도시락을 들고 당시 동물원이던 창경원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한 3주 정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자 울음소리를 들으러 갔죠. 사자 우리 앞에서 사자가 울기만을 하루 종일 기다린 적도 많았습니다. 그 정도로 소리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죠.

그 시절 저는 집에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는데 반찬이라고는 콩나물과 김치가 전부였어요. 특별한 날이면 어묵을 싸주셨죠. 노래 연습을 하려고 연습실에 앉으면 기운이 없어서 소리를 내기가 힘들었어요. 그러다 한 번은 먼 친척 분의 결혼식을 갔는데, 식이 끝난 후에 중국집에서 피로연을 하는 거예요. 별별 요리가 다 나오더라고요. 그때 꾀를 부렸죠. 앞으로 결혼식 하객 행세를 하고 피로연장에 가서 고기를 먹어야겠다고요.

그래서 친구 한 명과 함께 주말이 되면 중국집에서 피로연을 하기로 되어 있는 결혼식장을 찾아갔어요. 가서 재킷에 꽃을 꽂고 하객인 양 행세했죠. 당시 서울대학 교복을 입고 갔는데, 저희가 하도 자주 출입한 나머지 중국집 웨이터가 저희를 알아본 겁니다. 그런데 눈감아 주었죠. 친구와 저는 봄, 가을 결혼식 기간을 ‘영양 보충 강조 기간’이라고 부르면서 열심히 찾아 다녔어요. 그렇게 먹었더니 밤 늦게까지 연습이 되더라고요. 그 시절엔 그렇게 고생하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1979년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를 공연하고 있는 박인수 선생. 모든 음악가에게는 필요 불가결한 허영심이 있다. 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아야만 하는 허영심이다. 오페라가 끝난 후에도 계속되는 박수갈채는 다음 무대를 향한 새 힘이 되기도 하지만, 과도하게 욕심을 부릴 때에는 작품 전체를 망칠 수도 있는 독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1967년 국립오페라단에서 <마탄의 사수>를 올리면서 주인공 ‘막스’ 역을 찾고 있었습니다. 당시 국립오페라단 주역 테너는 안형일 선생님과 이우근 선생님이셨어요. <마탄의 사수>는 굉장히 드라마틱한 오페라인데, 두 분 모두 리릭 테너여서 ‘막스’ 역을 거절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단장인 오현명 선생님께서 ‘막스’ 역을 맡을 새로운 테너를 물색하고 계셨죠.

그때 저는 오현명 선생님이 주관하시는 오페라 워크숍에 참가하고 있었어요. 워크숍이 진행되던 어느 날이었는데, 그날따라 여자 7명에 남자는 저 혼자 뿐인 거에요. 이중창을 하는데 여자 7명이 같이 하고 저는 혼자 소리를 냈죠. 워크숍이 끝난 후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박인수, <마탄의 사수> 공부해서 노래해봐.” 그러시더라고요. 그렇게 제가 ‘막스’ 역에 발탁된 겁니다.

학생 신분으로 큰 역을 맡아서 정말 기뻤어요.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제가 너무 욕심을 부렸어요. 연습하던 대로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잘하고 싶은 욕심에 발성을 바꾼 게 화근이 되어서 오페라 자체를 완전히 망쳐버린 겁니다. 당시는 오페라 공연이 귀해서 공연이 끝나면 다음날 일간지에 전부 평이 날 때였는데, 서울 시내 일간지들이 일제히 혹평을 했죠. 오페라 무대에 서자마자 매장이 된 셈이었어요.

오페라를 망쳤다고 소문이 나자 아무도 저를 찾아주지 않았어요. 어디서도 저를 써주지 않자 음악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죠. 대학 졸업하고 겨울은 다가오는데 돈은 없고……. 그때 친구를 찾아갔어요. 2만 원만 있으면 리어카를 한 대 사서 포장마차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 했죠. 그랬더니 “그럼 나랑 동업하자.”고 하더라고요. 돈을 그냥 주면 제 자존심이 상할까봐 동업을 하자고 한 것 같았어요. 염치가 없었지만 상황이 절박했기에 친구의 제의를 받아들였죠. 친구는 장사 밑천도 필요할 거라며 3만 원을 줬어요. 지금 돈으로 하면 3백만 원 정도가 될 거예요.

그렇게 장사 밑천을 마련하고 남대문 시장에서 안주 재료를 사다가 포장마차를 시작했습니다. 생전 처음 빈대떡도 부치고, 어묵 국물도 끓이고, 별의별 메뉴를 다 만들었어요. 처음에는 손님이 하루에 다섯 팀도 오지 않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하루에 2천 원 정도 벌 수 있을 정도로 수입이 좋아졌죠. 젊은 나이에 포장마차를 하는 제가 안쓰러웠는지 어떤 손님은 매일 밤마다 참새구이를 스무 마리씩 사 갔어요. 팔아주려고 그러신 거죠. 그런데 그것도 오래 못했어요. 다른 사업도 여러 가지 벌였는데 모두 성공하지 못했죠.

그러던 어느 날, 제가 포장마차를 할 수 있도록 밑천을 대준 친구를 만났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너는 장사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으니 음악을 계속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서울 시향과 음악회를 열도록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어요. 그 친구의 도움을 받아 서울 시향과 협연으로 아내와 함께 부부 음악회를 열었는데, 평이 아주 좋았습니다. <마탄의 사수>로 실패한 지 꼭 1년 만의 힘겨운 재기였죠. 이후 여기저기서 출연 요청이 들어왔고, 프리마 오페라단에서 올린 <사랑의 묘약>의 ‘레모리노’ 역을 맡아 재기에 성공했어요.

그런데 제 공연을 빼놓지 않고 본 친구가 오페라를 제작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더군요. 저에게 불쑥 통장과 도장을 내밀었어요. 통장에 든 돈이 그 친구의 전 재산이었죠. 친구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젊은 성악가들을 모아 ‘서울 오페라 아카데미’를 결성했고, <라 보엠>을 제작해 우리나라 최초로 원어로 불렀습니다. 그때가 1969년이었어요. 그때까지 오페라는 모두 번안하여 한국말로 불렀는데, 우리는 젊으니까 원어로 부르자는 취지였죠. 그렇게 무대에 올린 오페라가 성공하니 여기저기서 출연 요청이 쇄도했고, 작곡자들도 자기 작품을 노래해달라고 요청해 왔어요. 그때부터 제 노래가 FM 전파를 타고 방송됐죠.

좋은 일을 또 다른 좋은 일을 부른다더니, 서울대 선배 중에 버펄로 심포니오케스트라 바이올리니스트 한 분이 계셨어요. 그분이 제 노래를 들으시고는, 노래가 녹음된 테이프를 미국으로 가져간 거에요. 그리고 얼마 뒤, 버펄로의 한 오페라 교수로부터 초청장이 왔어요. 그해 여름 버펄로 심포니오케스트라의 오페라에 출연해달라는 것이었죠. 당시 제 형편으로 미국에 간다는 건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박 선생이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 그의 아내 안희복 선생은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 식당 웨이트리스, 문방구 계산원, 보육원의 베이비 시터 등 온갖 궂은일을 마다 않고 꿋꿋하게 감당해냈다. 1965년 박인수, 안희복 선생의 결혼식 사진.

1970년 5월 그렇게 미국엘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보릿고개를 넘지 못한 가난한 나라에서 미국을 갔으니 얼마나 낯설었겠어요. 물론 버팔로에서의 공연은 성공적이었어요. 그러던 중 줄리아드 음대에서 마리아 칼라스의 마스터 클래스 오디션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1주일마다 공연을 하는 1년 유급 계약직이었어요. 소식을 듣고 단숨에 줄리아드로 달려갔는데, 뉴욕의 젊은 성악가들이 거의 모두 몰려와 경쟁률이 800대 1에 달했습니다. 그 와중에 동양인에게는 오페라의 주역을 절대 주지 않는다는 소문까지 돌았어요.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기회였죠.

힘겹게 오디션을 봤고, 단번에 합격했어요. 그때는 정말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이후 전액 장학금을 받고 좋은 스승들 밑에서 성악 교육을 받았어요. 생활비를 매달 주긴 했지만, 뉴욕의 집세를 감당하기엔 빠듯했습니다. 속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굶은 적도 많았고,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어요. 당시 곰탕을 판매하는 한국 음식점이 있었는데, 거기서 배달 일을 시작했습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74층에 대한항공 사무실이 입주해 있었는데, 거기 직원들이 매일같이 곰탕을 주문했거든요. 그럼 저는 곰탕과 깍두기가 가득 담긴 배달 가방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죠. 파와 김치 냄새 때문에 빈 엘리베이터가 올 때까지 기다렸는데,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더라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 사람들 표정이 일그러지는 거예요. 미안한 마음에 저는 벽을 향해 돌아서 있었어요. 그렇게 돈을 벌며 노래 연습에 최선을 다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미국 생활이 힘들기는 했지만, 정말 많이 배웠어요. 당시 미국의 음악회는 정말 프로페셔널했습니다. 오페라는 종합예술이기 때문에 무대, 조명, 의상, 하다못해 소도구까지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야 하죠. 그런데 한국은 그런 환경이 갖춰져 있질 않았어요. 그냥 대강대강 진행하는 거죠. 미국 오페라 무대의 프로페셔널한 모습들이 굉장히 놀라우면서도 몹시 부러웠습니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동료들끼리 진심을 다해 서로의 무대를 칭찬하고, 아쉬운 부분을 조언하는 문화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지금까지도 그런 문화가 없어요. 진심을 담은 칭찬이 없죠. 음악회가 끝나면 찾아와서 형식적인 인사만 하는 거예요. 어떤 부분이 좋았고, 어떤 부분이 아쉬웠는지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야기를 해주면 서로에게 정말 많은 도움이 될 텐데, 절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뒤에 가서 수근거리는 게 문제에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나아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죠. 남을 인정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이 필요해요. 이건 음악의 분야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열린 마음을 갖고 상대의 뛰어난 점을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해요. 그래야 발전이 있죠.

박인수 선생 데뷔 50주년 기념 독창회에 함께한 동료 성악가들. 사진 왼쪽부터 김성준 백석예술대 교수, 박현재 서울대 교수, 박인수 선생, 이상규 나사렛대 교수, 김성진 인제대 교수.

1976년부터 미국에서 본격적인 공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뉴 헤븐 오페라단(New Heaven Opera)과 버팔로 오페라단(Buffalo Opera)에서 <라 보엠>의 ‘로돌프’ 역을 했고, 캐나다 온타리오 더 쇼 페스티벌(Ontario the Show Festival)에서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의 ‘바쿠스’ 역으로 [토론토 스타(Toronto Star)]지(誌)의 격찬을 받았죠. 1년에 반 이상은 미국 전역과 남미, 캐나다 등으로 연주 여행을 다녔어요.

그해 콜롬비아 국립 오페라 극장이 주최한 오페라 페스티벌은 세계에서 42명의 솔리스트들이 모여 60일 동안 8개의 작품을 올렸어요. 동양인이라고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던 일본인 한 사람과 저 뿐이었죠. 당시 초청된 가수들은 모두 미국의 유명 극장과 이탈리아의 라 스칼라, 비엔나, 로마의 세계적인 극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쟁쟁한 가수들이었어요. 제 인지도가 가장 약했죠. 사실 제가 처음부터 초대된 게 아니라 뉴욕의 유명한 테너가 아파서 그의 대역으로 참가하게 된 거였습니다. 그가 하기로 했던 오페라 <라 보엠>, <사랑의 묘약>, <라 트라비아타>의 주역을 모두 제가 대신하게 됐죠. <라 보엠>의 ‘로돌프’ 역은 저와 로마 오페라단에서 온 테너가 더블캐스팅 됐는데 제가 개막 공연을 하게 됐어요.

콜롬비아 방송국에서 개막 공연을 생중계했어요. 공연장에 대통령부터 장관, 국회의원, 각국 대사들이 참석했는데, 제가 노래를 부르자 박수가 터져나오는 거예요. 전국에 생중계를 했던 탓에 다음날에는 택시 기사까지 저를 알아볼 정도였어요. 이후에도 많은 무대에 섰지만, 대학 시절 오페라 무대에 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욕심을 부리면 실패한다’는 거예요. 지휘자의 극찬, 관객들의 환호가 아무리 대단해도 무대에서 나를 돋보이게 하려고 욕심을 부리고 새로운 발성을 시도하면 그 무대는 꼭 망치더라고요. 너무 잘하려고 하는 것이 결국 장애가 되는 것이죠.

정지용의 시 ‘향수’를 읽고 유년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된 박인수 선생. 어머니의 품 같은 고향을 노래하고 싶어 그는 그 노래를 부르기로 결정했다. 박 선생에게 ‘향수’는 그저 시가 좋고 곡이 좋아 부른 노래였다. 하지만 박인수 선생은 ‘향수’를 불러 클래식 음악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국립오페라단에서 제명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럼에도 박 선생은 오히려 그를 격려하고 응원해준 대중들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저는 그 노래가 그렇게 사회적 파장을 물고 올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향수’를 부를 때 크로스오버를 시도해보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냥 정지용의 시와 거기에 붙인 작곡가 김희갑 씨의 곡이 좋았고, 제가 필요하다고 찾아온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을 뿐이죠.

저는 대중음악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이에요. 클래식 음악이 대중음악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요.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선입견이나 장르의 구분 없이,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자유로운 사람이죠.

그런데 ‘향수’가 국민 노래로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있을 즈음, 제가 클래식 음악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국립 오페라단에서 제명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저는 대중 가수와 함께 노래하는 게 고전음악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클래식을 클래식답게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는 것이 클래식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무리 바빠도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초청에 응하는 편이에요. 제가 가진 재능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이죠. 작은 교회의 초청이든, 자선 공연이든, 화려한 오페라 무대든 가리지 않아요.

클래식 음악은 특권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에요. 음악은 사람들의 삶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어야 하죠. 작곡자와 연주자의 사상이나 철학적 관념을 듣는 사람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는 거에요. 창작과 연주, 감상의 세 분야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상호 교감할 때 비로소 음악이 완성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향수’ 파문도 클래식 음악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향수’가 클래식 음악을 모독했다고 생각한 거겠죠. 그런데 음악은 듣는 사람이 들었을 때 행복하고 즐겁고 감흥이 일어나면 그게 좋은 음악이에요.

생각해보세요. 과거에는 클래식 음악이 곧 대중음악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노예 음악’이었죠.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등 유명한 음악가들이 모두 궁정 음악가였으니까요. 왕의 생일에 뱃놀이를 위해 작곡한 노래들이 현재 클래식에서는 명곡으로 평가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역사를 알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백 년 전의 역사만 제대로 알아도 그런 주장을 할 수 없죠.

결국 음악도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 클래식 음악은 순수하고, 대중음악은 저급하다고 생각하는 배타적인 선입견을 버려야 해요. 이 벽이 허물어지지 않고서는 클래식 음악은 결국 ‘일부 계층’을 위한 음악이 되고 말 거예요.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대중을 위해 곡을 만들었듯이, 오늘날의 성악가도 훌륭한 음악을 일반 대중에게 들려주는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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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소리의 예술이에요. 소리가 좋아지면 맛집에 손님이 몰리듯 청중이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수많은 무대에서 노래해본 경험에 비추어, 일반 대중들의 듣는 귀가 전문 성악가들보다 오히려 정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대중들은 성악가들과 달리 노래를 들을 때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순수하게 마음으로 듣기 때문이에요. 대중들이 들어서 좋은 감동을 받는 노래가 정확하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 돼요.

그리고 음악을 하려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음악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랜 세월 강의를 하다 보면 안타까운 학생들도 더러 만나게 되죠. 정말 음악이 하고 싶어서 음대에 왔다기보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손에 이끌려 시작했으니 어쩔 수 없이 음악을 계속하는 학생들도 만났고요. 그런데 음악을 하려면 성악이면 성악, 피아노면 피아노를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고 아껴야 해요. 부모의 강권에 의해 음악을 한다거나 약간의 허영, 혹은 입시 점수에 맞춰 음악을 전공하려고 하면 스스로를 망치게 되어 있어요.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의 본질을 생각하며, 끊임없이 좋은 소리를 위해 연구해야 하는 게 음악가가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2008년, 수원의 한 교회에서 열린 연주회에 참석한 박인수 선생. 앞줄 맨 왼쪽이 박인수 선생이다. 그는 크고 웅장한 무대든, 작고 소박한 무대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아무리 바빠도 초청에 응하기로 유명하다.

자신이 결정한 것에 대해 배수의 진을 치고 매진했으면 좋겠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포기가 너무 빨라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고 이내 포기해버리고 마는 거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고비를 넘기고 매진하면 반드시 기회가 찾아오고, 반드시 쓰임새가 있다고 보거든요. 사회 구조나 국가, 정부 기관의 핑계를 대고 책임을 돌리는 건 잘못된 거예요. 어느 때나 힘든 시기는 있는 법이에요. 저 역시 6ㆍ25 전쟁을 거치며 혼란한 사회를 경험했던 세대로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또 육체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은 피하려고 하는 생각을 바꿨으면 좋겠어요. 그 일이 자신의 최종 목표가 아닐지라도, 어려운 일도 경험하고 그 경험을 통해 다음 기회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도 용기죠. 젊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용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노래를 마음으로 하는 사람. ‘박인수 저 사람은 노래를 마음으로 한다.’ 그런 사람으로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제 소원은 딱 한 가지예요. 100퍼센트 제 마음이 담긴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세상을 떠나는 것. 그래서 지금도 마음이 담긴 소리를 위해 연구를 하죠. 그렇게 기억해주길 바랍니다.


인터뷰이 소개

박인수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미아리 5형제파’를 결성해 두목을 맡았을 정도로 질풍노도의 청년기를 보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마도로스가 되어 배를 타고 대양을 누비겠다고 꿈꿨지만, 배재고 교목 선생님의 권유로 성악에 눈을 떴다. 서울대 음대 진학 후 실력을 인정받아 1962년 로베르트 슈만의 ‘시인의 사랑’ 전곡으로 독창회를 열며 성악가로 데뷔했다. 1967년 국립오페라단 <마탄의 사수>에서 주인공 ‘막스’ 역을 맡았지만, 성악가 박인수 인생 최악의 공연이 되었고 7개 일간지의 혹평을 받으며 힘든 시기를 보냈다. 이후 친구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 미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 그는 1989년 ‘향수’ 파문으로 또다시 성악계의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한국 성악계의 권위주의를 지적하며 오히려 클래식 음악의 진정한 의미를 전하는 활동에 전념했다. 2003년 서울대 정년퇴임 후 백석대 석좌교수, 음악대학원장을 맡아 지금도 학생을 가르치고 있고, 매년 50회에 가까운 국내외 공연을 소화하고 있는 열정의 음악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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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4. 01.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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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이 소개 박인수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미아리 5형제파’를 결성해 두목을 맡았을 정도로 질풍노도의 청년기를 보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마도로스가 되어 배를 타고 대양을 누비겠다고 꿈꿨지만, 배재고 교목 선생님의 권유로 성악에 눈을 떴다. 서울대 음대 진학 후 실력을 인정받아 1962년 로베르트 슈만의 ‘시인의 사랑’ 전곡으로 독창회를 열며 성악가로 데뷔했다. 1967년 국립오페라단 <마탄의 사수>에서 주인공 ‘막스’ 역을 맡았지만, 성악가 박인수 인생 최악의 공연이 되었고 7개 일간지의 혹평을 받으며 힘든 시기를 보냈다. 이후 친구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 미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 그는 1989년 ‘향수’ 파문으로 또다시 성악계의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한국 성악계의 권위주의를 지적하며 오히려 클래식 음악의 진정한 의미를 전하는 활동에 전념했다. 2003년 서울대 정년퇴임 후 백석대 석좌교수, 음악대학원장을 맡아 지금도 학생을 가르치고 있고, 매년 50회에 가까운 국내외 공연을 소화하고 있는 열정의 음악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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