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man in Biz] 오래된 것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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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년은 족히 넘었을 오래된 주판을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165를 계속 더해가며 손가락 연습을 했던 지난 세월의 흔적이 이끼처럼 사이사이에 스며 있는 이 물건은 아직도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 0번부터 10번까지 동그란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돌리면 차르르 제자리로 돌아가는 소리가 좋아 이 번호, 저 번호를 돌렸다가 '여보세요' 하는 수화기 목소리에 황급히 전화기를 내려놓던 기억도 선명하다.

한 해에 휴대전화 1200만대가 중고로 버려지는 시대에 오래된 물건, 오래된 노래, 오래된 사람은 세상의 모든 진부함을 더해도 모자랄 존재가 돼 버리고 말았다. 필기체 알파벳 써오기 숙제를 펜촉에 잉크를 묻혀가며 써내려 가던 그 느릿느릿했던 필기의 추억은 전광석화보다 빠르게 두 손으로 휴대폰 자판기를 두드리는 일에 의해 화석이 돼 버렸다. 질리면 버리고, 신제품이 나오면 바꾸는 현대의 새것 중심주의에 반기를 들고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이라는 캠페인을 만든 테드 데이브(Ted Dave)는 'Keep calm and Don't shop'을 외치며 그의 좌우명 '충분한 만큼 충분하다'를 실천하고 있다.

의미 있는 사물들의 가치를 알고 오래 사용하는 것을 기업의 사명으로 삼고 디자인과 재활용을 융합한 사업을 하고 있는 'D&Department'는 2002년부터 '60비전'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과 부흥이 일단락되고 튼튼하고 오래가는 디자인의 물건을 만들자는 운동이 세계적으로 일어났던 1960년대 물건을 재조명해 오래된 좋은 물건의 가치를 부각시킨 이 프로젝트는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대구에서 골동품 가게를 40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는 박수남 씨는 이렇게 말한다. "세월은 금방 바뀌는 것 같지만 아주 조금씩 바뀌는 거야. 오래된 물건은 그 나름의 시련과 혼을 가지고 있어."

인생의 어느 순간을 떠올리며 잊지 못할 장소를 하나쯤 갖고 있고 그곳이 아직도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그 포근한 위안이 두드리는 토닥임에 안도하게 될 것이다. 자고 나면 생겨나고 또 사라지는 창·폐업의 시대에 청주에서 약쌀로 불리는 홍미로 면을 만들어 3000원의 가격으로 44년째 자장면을 내놓는 대동관에서 사람들이 먹는 것은 맛을 뛰어넘는 위안일 것이다.

44년 전인 1975년 발표된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가 온종일 세상에 울려 퍼지는 2018년, 크리스마스 캐럴은 여전히 편곡만 손질한 옛날 것들이고 여전히 누군가의 생일날엔 100년도 넘은 '해피버스데이 투 유'를 부른다. 54년 전 발표된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는 현재까지 3000명이 넘는 사람에 의해 리메이크됐다. 1936년 독일에서 출간된 '음악가의 필적'이라는 책에는 베토벤이 직접 연필로 적은 9번 교향곡 합창의 악보가 실려 있다. 이미 청력을 잃은 그의 귀에는 악보에 연필이 긁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겠지만 그의 연필은 우리에게 벅찬 환희의 송가를 전해줬다. 작은 칼을 꺼내 연필을 깎고 연필심을 정성스레 다듬는 일은 진부한 유물이 돼 버렸지만 헤르만 헤세는 마흔에 수채화를 시작해 여든다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림 3000여 점의 밑그림을 소설을 쓸 때 늘 애용하던 연필로 그렸다.

사람이 떠난 다음 그가 쓰던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오래된 물건 하나가 남지 않는 인생은 얼마나 가벼운가. 유럽에서 마지막 남은 귀갑 장인 타블르티에인 크리스티앙 보네. 그는 150년을 살다가 200㎏의 등껍질을 남기고 죽는 바다거북이 등껍질을 재단해 2㎏의 판 하나를 만들고 자신의 손으로만 다듬고 가공해 세상에 하나뿐인 안경테를 만든다.

크리스티앙 보네는 말한다. "나는 손님들의 인생에 참여하는 것이 기쁘다. 내 안경을 쓰고 스페인에 간 손님이 전화를 해서 '난 당신이 만든 안경으로 지금 눈부신 광경을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더군."

고집 있는 사람이 침묵 속에 만든 한 곡의 음악, 한 그릇의 음식, 한 개의 물건이 소중한 인생을 오래 잊지 못할 무엇으로 만드는 세상을 꿈꾸며 50년 된 낡은 턴테이블 바늘을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에 얹어 본다.

[이두헌 경희대 포스트모던 음악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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