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내시경]‘장난감 천국’에 아이도 어른도 눈이 번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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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2.22. 오후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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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을 좋아하는 데는 국경도 남녀노소도 없어서 장난감 성지를 순례하는 외국인 가족도 흔히 볼 수 있다. 아이보다 더 열심히 액세서리를 고르는 엄마도 있고, 아이와 장난감 논쟁을 벌이는 아빠도 볼 수 있다.

대략 200여m의 좁은 길에 120여개의 문구 완구점이 들어서 있다.


이 골목은 아이들의 천국이다.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 근처 장난감골목, 공식 명칭은 창신 문구완구거리. 주변 상인들은 문구시장으로 부르는 곳이다. 이 골목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소리는 “아빠 엄마 고맙습니다”이다. 아이들은 행복하고 부모들은 흐뭇한 얼굴로 거리와 가게를 샅샅이 뒤진다. 간혹 타이르는 부모와 실망한 아이의 무거운 발걸음도 보인다. 욕망이 지나치면 실망도 크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배우는 곳이다. 200m를 살짝 넘긴 골목길에 120여곳의 문구·완구 상점들이 밀집해 있고, 대형 장난감 가게와 문구상가가 자리잡고 있으니 아이와 부모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

골목에서 일단 눈길을 끄는 것은 요즘 가장 유행이라는 토끼모자. 방송에서 아이돌 연예인들이 쓰고 나와 유명해진 긴 손잡이에 토끼 귀를 가진 모자는 소위 뜨는 상품이다. 그 모자를 온 가족이 한 번씩 써보고 귀를 쫑긋거리며 웃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어느 가족은 모두 토끼모자를 쓰고 골목길을 걷는다. “여기는 유행과 전쟁하는 곳이다. 뜰 만한 물건을 먼저 들여와 시장에 푸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누구보다 싸게 빨리 들여와야 한다”는 것이 업자의 이야기였다. 토끼모자만 해도 수입업자들이 늘어나면서 모양과 기능이 다양해졌다. 살아남기 위해 치열해진 경쟁의 산물이다. 한편 팔리지 않는다면 원가에도 못 미치는 헐값에 내놓거나 그마저 처분 못할 애물단지가 된다. 무게로 달아 땡처리 업자에게나 넘겨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장난감 하나라도 시류에 민감하고 뒤처지지 않게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아야 살아남는 곳이다.

문구에서 완구까지 동심과 어른들의 마음을 끄는 모든 물건들이 있다.


이곳에 자리한 가게들은 본디 도매로 문구와 완구를 취급하던 곳이었다. 언제부턴가 부모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소매로 물건을 팔고 있지만, 지금도 도매떼기를 하는 지방 상인들이 가장 큰 고객이다. 이곳에 문구도매점들이 들어선 것은 1960년대부터라고 한다. 한국전쟁 직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어린이들을 상대로 전국 초등학교 앞에는 문구점이 호황을 누렸다. 그 문구점에서 필요한 거의 모든 것들, 교구와 문구용품·체육용품을 공급하던 곳이 창신동 문구시장이다.

1960년대 도매상으로 시작



시장 변화에 대해 업자는 “70년대가 가장 호황이었다. 교과과정에 맞춰 전국에 같은 물건들을 한꺼번에 공급하던 것이 학급수도 줄고 교구 구입도 개인이 사던 것에서 학교별 대량구매로 정책이 바뀌면서 시장에 변화가 왔다. 지금 초등학교 앞에서 문 닫는 문구점들이 늘고 있다. 대형마트에서 문구도 팔고 있으니 설자리가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시대가 바뀌면서 문구골목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가족 나들이의 성지가 됐다. 장난감 앞에서 가족회의를 여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문구 위주였던 상권에 장난감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1980년대라고 한다. 이 거리에서 가장 큰 장난감 가게인 모 완구업체가 1980년에 문을 열고 동남아 등지에서 생산한 장난감을 대량으로 공급하면서 완구시장의 판세를 바꿨다. 줄어든 문구점 수요만큼 완구점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아이들에게는 성지가 생겼고 부모들은 아이를 위해 기꺼이 순례를 나서고 있다.

지금 장난감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텔레비전과 인터넷이다. 만화영화와 유아프로그램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요즘 뜨는 전투로봇 장난감을 쌓아둔 완구점 계산대 뒤에는 장난감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을 계속 틀어놓고 있었다. 업자는 “특히 연령층이 낮아질수록 텔레비전에 나온 캐릭터 인형이나 장난감에 환호한다. 그러니 어떤 방송이 인기 있는지 시청률까지 체크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대형 완구업체의 정품 장난감을 잡지 못하면 비슷한 모양의 유사품이라도 구해서 시장을 따라간다고 한다. 중국 업체에서 거의 실시간으로 복제품을 만든다는 귀띔도 했다.

창신동 장난감골목은 아이들의 지상낙원이다.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커다란 장난감 보따리를 든 어린이에게 무엇을 샀냐고 물었다. “팽이요. 팽이전사 자이로카에 나오는 팽이를 샀어요.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애니메이션이에요”라고 했다. 이 애니메이션은 아예 완구업체에서 제작해서 케이블 어린이 채널을 통해 방송하고 있다. 새로운 시장을 만들기 위해 대형 완구업체가 방송 기획 단계부터 개입하거나 직접 제작하는 애니메이션이 늘고 있다. 업계에서는 광고보다 훨씬 효과가 좋다는 결론을 내린 지 오래라고 한다.

콩순이에서 변신 메카로봇까지 어린이의 혼을 빼놓을 만한 완구가 넘쳐나고, 한쪽에선 장난감 드론이 아빠들의 넋을 사로잡고 있었다. 동작 완구 시범을 보이던 업자는 “올 여름에는 너프건이 인기였고, 드론은 한풀 꺾였다. 너프건은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에 바람이 불었다. 지금은 방송에 나오는 완구 외에 크게 눈에 띄는 상품은 없지만 레고 같은 블록류가 꾸준히 팔린다”고 말한다. 그밖에 동작 완구들도 효자 상품이라고 밝혔다.

아이보다 부모가 더 구경 삼매경

역시 모든 어른이 철든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아이보다 부모가 더 구경 삼매경에 빠진 모습도 이 골목에서는 흔히 보는 풍경이다. 아이를 핑계로 자신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슬그머니 끼워놓는 부모도 있고 그를 따지는 아이도 있었다. 동작 완구 앞에서 넋을 잃고 구경하던 어느 아빠는 “이곳은 애들보다 내가 더 좋아한다. 예전에는 장난감 하나도 마음껏 사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옛날 생각도 나고 새로운 장난감을 보면 신기하기도 해서 애들 앞세워 가끔씩 찾아온다”고 고백한다.

토끼모자는 장난감골목을 점령한 가장 핫한 아이템이다.


장난감을 좋아하는 데는 국경도 남녀노소도 없어서 장난감 성지를 순례하는 외국인 가족도 흔히 볼 수 있다. 아이보다 더 열심히 액세서리를 고르는 엄마도 있고, 아이와 장난감 논쟁을 벌이는 아빠도 볼 수 있다. 장난감 앞에 국경은 무력했다.

자녀와 함께 꼼꼼히 가격을 비교하던 부모는 “어떤 물건은 인터넷이 더 싼 경우도 있다. 그래도 이곳을 찾는 것은 직접 만져보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트에서는 못 보던 물건을 찾는 즐거움도 있다. 견물생심이라고 처음 계획보다 항상 더 사게 된다”고 했다. 어쨌건 이 골목의 남녀노소는 모두 즐겁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유치원에서 필요한 교구를 사러 온 선생님은 “최고 매력은 가격이다. 말도 안 되게 싼 장난감도 많고, 문구는 박스 단위로 사면 시중가격의 절반에도 살 수 있다”고 했다. 창신동 문구완구거리에는 실내화부터 농구공, 노트며 연필까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필요한 문구는 뭐든지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주문서에 적힌 대로 문구를 찾아 포장상자에 넣던 업자는 “아무리 인터넷과 마트가 문구점을 위협해도 여기서 파는 가격은 따라잡을 수 없다. 시장을 많이 빼앗겼지만 그야 시대적인 추세이고 여기는 나름대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업자들은 주로 도매가로 대량구매를 해가고 있고, 일반 소비자는 다양한 물건을 한곳에서 찾을 수 있기에 이곳을 찾는다는 설명이다.

문구완구 골목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길 건너면 외국노동자 카페와 음식점

상가거리가 형성된 지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간 만큼 가게마다 다루는 상품들도 다양하다. 문구와 완구가 주춤하고 한때 레저 붐이 불던 때에 맞춰 스포츠용품을 파는 점포도 사이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등산용품을 파는 가게 주인은 “예전 동대문운동장 주변에 빼곡히 있던 운동구점이 옮겨온 곳도 있다. 운동장이 없어지고 상권이 변하면서 그곳 점포가 여기로 와 학교와 문구점에 납품을 계속했기 때문이다”라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최근 유행했던 캠핑도구를 쌓아놓고 파는 가게도 있고, 더불어 저렴한 가격의 중국산 잡화를 모아 파는 업체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봄가을엔 등산용품, 여름엔 캠핑도구, 겨울엔 난방용품과 눈놀이 기구로 주력상품이 바뀐다고 했다.

겉보기에 작아 보이는 잡화점에는 생활필수품부터 흔히 볼 수 없는 물건까지 그야말로 없는 게 없을 정도다. 잡화점 점원은 “가게마다 대략 1000개 이상 상품이 있다. 정확히 몇 종류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렇게나 있는 것 같아도 나름 원칙대로 분류가 돼 있어서 손님이 찾는 물건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누구나 오래 장사하다 보면 노하우가 있는 법이다”라고 했다. 구두약부터 효자손까지 물건들은 주로 지방 만물상이나 행상들이 도매로 떼어가지만 한두 개씩 사가는 손님에게도 비슷한 가격으로 팔고 있었다. 소매도 모이면 도매 못지않다는 것이다. 방한장갑 한 켤레에 2000원에서 3000원, 두툼한 방한모자는 5000원이면 살 수 있어 쇼핑봉투는 금세 한 보따리가 되기 일쑤다.

문구나 완구, 잡화까지 국산도 있었지만 가격경쟁력과 물량에서 중국산을 이길 수는 없어 보인다. 빠른 유행과 대량유통을 위해 문구완구거리 인근에는 해외 물류특송업체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중국 거래처에 주문을 하면 중국 선전에 있는 도매시장과 공장에서 빠르면 하루 만에도 물건이 배달된다고 했다. 샘플을 보내서 다시 받고, 대량발주를 한 후에 납품을 받기까지 보름이 걸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설명이다. 때문에 오늘 방송을 탄 토끼모자는 일주일 만에 가게마다 진열되고, 보름이 지나면 수십 종의 변종이 생길 수 있었다.

창신 문구완구거리 주변을 살펴보면 우리가 이미 세계화된 세상을 살고 있다는 실감이 난다. 중국과 태국에서 생산된 문구와 완구를 일본인 손님과 함께 고르고, 골목길을 나서면 연변 훠궈와 양고기꼬치 집을 줄줄이 볼 수 있다. 길을 건너가면 네팔 노동자들이 모이는 카페와 인도 음식점이 연달아 있다. 우리 사이에서 함께 살아가는 외국인과 외국상품과 문화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곳이 장난감골목 주변인 것이다.

차가 다닐 수 없어 인파를 비집고 택배상자를 날라야 하고, 몰려드는 아이들을 상대하느라 가게마다 친절하게 손님을 응대하지는 못한다. 어떤 장난감상점은 직접 바코드를 찍어 가격을 확인해야 했다. 희귀한 장난감은 가격표에 웃돈을 덧붙여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골목이 활기찬 이유는 욕망을 감추지도 기쁨을 숨기지도 않는 어린이들 때문이다. 갖고 놀다 이내 잊어버릴 작은 장난감 하나라도 보물로서 귀하게 대하고 기꺼이 행복해하며 감사해하는 웃음소리가 골목을 감싸고 있다. 모든 장소가 이곳 풍경 같기만 하다면 세상은 이미 지상천국일 것이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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