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end Interview] 50년간 황무지 개간해 만든 `생각하는 정원` 성범영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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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1.11. 오후 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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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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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과 흙 손수 날라 꾸민 제주도 정원, 장쩌민·후진타오도 첫눈에 반했죠…
"IMF때 경매 넘어갔지만…직원으로 7년 일해 재인수했죠"


평생을 나무와 함께 살아온 성범영 원장이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 `생각하는 정원`에서 분재가위로 가지를 다듬고 있다. [이충우 기자]
봄날, 나무가 꽃봉오리를 여는 순간은 짧다. 그러나 그 순간을 기다려온 나무들과 정성은 오래 묵은 것이다. 세계 최고의 정원을 가꾸겠다는 일념으로 50년의 시간을 바쳐온 이가 있다.

'나무를 사랑하는 시골농부.' 제주도 '생각하는 정원' 성범영 원장(81)은 스스로를 그렇게 부른다.

1968년부터 가시덤불을 잘라내고 황무지를 개간해 돌담을 쌓기 시작했다. 남자 노임이 500원, 여자 노임이 400원 하던 때였다. 다섯 평 남짓 벽돌집을 짓고 수도 전기도 없이 8년간 호롱불을 켜고 지냈다. 여건은 열악했지만 대신 이곳을 제주도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겠다는 신념이 있었다. 노점을 하고 셔츠회사도 운영하며 모은 돈으로 땅을 사고 정원을 일궜다. 그는 약 4만㎡(약 1만2000평) 규모에 달하는 분재정원과 건축물을 설계도면 없이 혼자 구상하고 만들었다. 정원은 1992년 7월 문을 열었다.

성 원장은 "외국인 관광객들로부터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곳을 찾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마음이 아팠다"면서 "감탄하고 둘러볼 수 있는 곳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나무를 가꿨다"고 억척스럽게 살아온 인생을 회고했다.

"때로는 나무를 가꾸고 돌을 져 나르다가 너무 힘들어 나무를 자주 올려다봤어요. 그때마다 나무들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살라고 속삭이더군요." 그가 반백년 공들여 만든 정원은 제주도 서쪽,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 1525―3에 위치해 있다.

―나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

▷어린 시절이었다. 고향에는 봄이 오면 뒷동산에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만발했다. 이웃의 한 노선비가 100평쯤 되는 정원에서 아름다운 꽃나무를 키우고 있었는데 온갖 아름다움과 신비가 그곳에 다 있는 것 같았다. 꽃 피는 계절이면 나는 홀린 듯 그 정원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런데 노선비는 아이들을 정원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할 수 없이 먼발치에서 목단, 철쭉, 개나리 등 아름다운 꽃이 불타는 정원을 훔쳐보곤 했다.

―왜 제주도를 택했나.

▷군 제대 후 제주에 처음 온 날짜를 기억한다. 1963년 11월 30일. 목포에서 연락선에 몸을 싣고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이곳에 왔다. 낡은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따라 여행하면서 따뜻한 기후와 바다, 들판에 피어 있는 노란 배추꽃과 밀감에 매료됐다.

―시작하기까지 과정을 설명해 달라.

▷제주시에서 약 4시간을 달려야 올 수 있는 당시에는 가장 낙후된 이곳에 내 꿈을 펼치겠다고 마음먹었다. 1968년 서부 중산간에 돌과 가시덤불로 덮여 있던 지금의 땅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돌담을 쌓았다. 돌밭과 가시덤불에 묘목을 심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이곳은 수도와 전기도 없어 빗물을 받아 밥을 지어먹어야 했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두루외(미친놈이라는 뜻의 제주 방언)'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야 했다.

―작업이 쉽지 않았을 텐데.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돌을 쇠망치로 다듬고 담을 쌓으며 돌과 흙을 운반한 양을 따져보니 지금까지 15만t 정도가 되더라. 공사를 진행하던 중 10여 차례 부상을 입고 몇 차례 수술도 받으면서 현재의 생각하는 정원에 이르렀다. 육지 곳곳을 찾아 제주에 없는 정원수들을 구입해서 이를 배에 실어서 옮겨왔다. 심는 작업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생 끝에 옮겨 심은 나무가 죽어갈 때는 많은 재정적 손실은 물론 허탈감에 빠져들기도 했다.

―기후가 따뜻한 제주에서 나무가 잘 자랄 것 같은데.

▷봄에 새순이 나올 때 길게 키워야 가지가 굵어지는데 제주는 돌도 많고 바람도 많아서 사나운 바람이 불면 새순이 다 부러진다. 아차 하는 순간에 다 망쳐 버리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바람을 이기기 위해 대나무를 세워 가지를 하나하나 다 묶어 주어야 하니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거센 바람으로부터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쌓아올린 돌담은 커다란 성채가 됐다.

―조경 기술을 배운 적이 있나.

▷나는 고등학교 중퇴자다. 건축이나 식물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 밀감나무와 정원수가 자라기 시작하자 책을 보고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분재기술을 습득했다. 하루 3~4시간을 자면서 작업을 강행했다. 매일 15t 트럭과 포클레인을 동원해 3년에 걸쳐 공사를 진행했다.

―묘목은 어떻게 구했나.

▷땅에서 돌을 캐내는 작업을 하는 한편 틈틈이 전국을 다니며 묘목과 큰 정원수들을 제주와 육지에서 구입해 이곳저곳에 심어 나갔다. 키운 나무를 다시 뿌리를 정리해 땅에 심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온실을 지어 소철과 관엽식물들을 대량으로 키웠고 이를 판매한 자금으로 분재를 구입하기도 했다. 한쪽엔 귤나무, 다른 한쪽엔 정원수를 심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형의 권유로 돼지와 소도 키웠다. 하지만 내 성격에 짐승 키우는 것이 맞지가 않아 다 팔아버리고 나무에만 전념했다. 이들을 판매한 자금으로 분재용 식물을 사들여 땅에서 재배한 후 분으로 옮겼다.

―정원이 시내에서 떨어져 있는데.

▷초창기 제주도청 관계자들이 찾아와 이곳은 관광객이 찾아오기 어려우니 제주시 쪽에 2만~3만평 대체용지를 줄 테니 옮기자고 했다. 나는 즉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이곳이 제2의 고향이 되었으니 해주려면 이곳에 해달라고 했더니 기가 막혀 했다. 물론 제주 시내로 나가면 영업도 잘되고 땅값도 올라가 빨리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부 중산간 지역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유명 인사도 많이 찾았다고 하던데.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잘 알려져 있는 것 같다. 유명 인사들도 꽤 찾았다.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 후진타오 전 중국 주석, 쯔엉떤상 전 베트남 국가주석, 푼살마긴 오치르바트 초대 몽골 대통령, 짐 볼저 전 뉴질랜드 총리,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 등이 찾았다. 201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모옌과 우웨이신 중국미술관장도 이곳을 방문했다.

―장쩌민 전 주석이 방문한 것이 인상적인데.

▷당시 판징이 인민일보 총편집장이 사전 답사차 다녀간 후 한중 양국의 경호국과 외교부 소속 약 40명의 답사팀이 방문해 점검한 후 돌아갔다. 그리고 3일 후 우리 외교부에서 장쩌민 전 주석이 방문하기로 결정됐으니 철저히 준비해 달라고 했다. 전 직원이 철야 작업을 했고 연일 각 기관에서는 점검 방문이 이어졌다.

―장 전 주석은 방문 후 어떤 소감을 말했나.

▷1995년 장쩌민 전 주석이 150여 명의 수행원과 기자단을 데리고 방문했다. 다행스럽게도 따뜻한 봄날이었고 날씨가 좋았다. 그는 근엄해 보이지 않고 마치 이웃집 아저씨같이 자상했다. 방문 예정시간은 30분이었지만 약 40분이 연장돼 1시간 10분이 소요됐다. 장 전 주석은 휘호를 써주고 정원을 둘러보고 돌아갔다. 장 전 주석이 "한국 제주도의 한 농부가 정부 지원도 없이 개척해서 이뤄 놓은 것을 한번씩 가서 보고 배우라"고 하면서 국내외에 관심이 높아졌고 관광객이 늘어났다.

―후진타오 전 주석 방문으로도 이어졌는데.

▷후진타오 전 주석은 장쩌민 전 주석의 방문기념비 앞에서 "이곳은 한중 우호관계의 상징적인 곳"이라면서 150년생 육송으로 기념식수를 했다. "앞으로 이 소나무처럼 한중 우호관계가 높고 푸르게 발전하기를 기원한다"는 말도 남겼다. 후 전 주석이 이곳을 방문하고 돌아간 후 중국이 한국을 여행 자유화 대상국으로 지정했다.

`생각하는 정원`에는 약 100종, 2000여 점의 분재와 정원수가 있다. 성범영 원장은 4만㎡(약 1만2000평) 규모에 달하는 분재정원과 건축물을 설계도면 없이 스스로 구상하고 만들었다.
―그 후 중국 관계자들이 많이 찾았겠다.

▷중국 고위 관계자들은 문화예술 수준이 대단히 높고 분재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중국의 VIP들이 방문하면서 생각하는 정원이 중국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후 각국에서 이곳을 찾아오는 손님들도 늘어났다.

―어려움은 없었나.

▷1990년대 후반 국제통화기금(IMF) 한파를 비켜나지 못했다. 1999년 6월 생각하는 정원이 위기에 봉착했고 반평생을 바친 이곳도 경매로 넘겨야 했다. 이곳에서 7년간 직원으로 일하며 재기를 노렸고 결국 정원을 되찾았다. 늘어난 부채에 고민이 많았지만 이후 입장객이 늘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나무를 통해 위안을 얻는다고.

▷실의와 좌절에 빠지기도 했지만 나무들이 무럭무럭 잘 자라줬다. 각기 개성 있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모하면서 나를 위로해줬다. 자연에서 얻은 진리는 많은 깨달음을 얻게했다. 특히 시간이 갈수록 일한 만큼 열매는 커져간다는 확신을 얻었다. 자연은 참으로 정직한 것이다.

―분재 관리는 어떻게 하나.

▷이곳은 겨울에도 별로 춥지가 않아 분재를 대부분 밖에 놓아두지만 추위에 약한 나무와 분갈이한 나무는 비닐온실에 들어가야 한다. 분재도 사람과 같다. 수술환자를 중환자실에서 보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겨울이 와서 나무들이 휴면기에 들어가도 분갈이를 하고 온실에서 보호해줘야 한다.

―분재 하면 일본이 유명한데.

▷분재 정원 하면 세계에서 일본이 최고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 아쉽다. 일본이 먼저 영국 브리태니커백과사전에 '본사이(bonsai)'라는 영어 표기를 정식 명칭으로 올려 공용어가 되면서 일본 분재가 이름을 얻었다. 분재는 중국에서 시작된 문화이고 그다음은 한국으로 이어진다. 중국은 약 1600년 전, 한국은 약 8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깊다.

―일본 정원과 비교하자면.

▷단적으로 1994년 5월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대사가 방문해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내가 일본에 잘못 온 것이 아니냐. 일본에도 없는 분재 정원이 한국 제주도에 있다니 놀랍다. 김영삼 대통령에게 올라가서 세계적인 작품을 가서 보라고 권유하겠다"고 하더라.

―정원 설계는 직접 하나.

▷그렇다. 직접 한다. 폭포와 연못 작업은 기술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힘든 작업이다. 관리 운영은 정원을 가꾸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1차 공사 기간이 1년인데 공기가 3년으로 연장됐고, 자금 투자가 늘어나면서 가족과 직원들 고생도 많았다. 나는 토목공학도 조경학도 배우지 않았으니 시간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고 확장 공사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설계도면도 없이 조경에 문외한인 내가 직접 구상하며 작업을 진행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주변 반응은 어떻게 바뀌었나.

▷정원이 모양을 갖추자 점차 찾는 사람이 늘어났다. 향기가 있는 꽃에는 벌과 나비가 찾아온다더니 이 먼 곳에도 꽃이 피고 벌과 나비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나를 미친놈이라고 하던 마을 사람들은 내 노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자신도 정원을 만들고 싶어 찾아왔다며 자문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이름을 '생각하는 정원'으로 지은 이유는.

▷'창조, 예술, 철학'을 테마로 정원 안에 화두와 읽을 거리가 곳곳에 걸려 있다. 그래서 생각하는 정원이다. 나무를 가꾸면서 깨달은 삶의 지혜와 인생철학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적어 놓았다. 프랑스의 한 신부는 가톨릭교회 성인이신 성 베르나도의 말씀을 인용해 "우리는 책보다 숲속에서 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적어 놓고 갔다.

―중국 교과서에도 실렸는데.

▷2015년부터 중국 교과서에 한국 정신문화의 상징적 인물로 소개돼 9학년 의무 교육교재로 쓰이고 있다. '한강의 기적으로 본 문화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이 정원을 한국인의 진취적인 자강불식(自强不息)의 상징이라고 표현했다.

미국 뉴욕에서 발행되는 분재 전문잡지인 'International Bonsai'에 생각하는 정원에 대한 특집이 8쪽에 걸쳐 나온 적이 있다. 이 잡지는 세계 57개국에 독자가 있어 생각하는 정원이 세계 분재인에게 알려지는 좋은 계기가 됐다.

[사진 제공 = 이충우 기자]
―북측 인사들도 찾아온 것이 인상적이다.

▷2000년 9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제주와 서울을 방문한 김용순 북한 노동당 비서가 생각하는 정원을 방문했다. 그는 방명록 앞에서 "나는 다 100점을 받았는데 서예만은 빵점이었다"며 망설이다가 "아름다운 곳에 왔으니 안 쓸 수 없다"고 글을 남겼다. "내 나라, 내 조국을 위해 재능과 로력(노력)을 깡그리 바치자!"라는 내용이었다. 또 당시 남북 최초 국방장관 회담이 제주에서 개최됐고 그것을 계기로 김일철 북한 인민무력부장 일행이 방문하기도 했다.

―왜 정원에 집착하는 것인가.

▷사람들이 낯선 곳에 찾아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 경험에 비춰볼 때 '감동'이라고 생각한다. 견문을 넓히는 관광이든, 심신을 재충전하는 관광이든 감동이 없다면 그저 일회적이며 피로한 여행일 뿐이며 다시 찾아올 이유도 없어진다. 제주도는 외국인이 선호하는 관광지이지만 한국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장기적 안목으로 우리 것을 찾아 창조해야 하는데 모방에만 집중하다 보니 경쟁력 약화를 가져온다. 세계인이 찾아올 수 있는 감동을 주는 관광시설을 만들어야 한다고 봤다. 나는 그게 정원이라고 생각했다.

―향후 목표는.

▷정원을 아직 절반밖에 완성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새롭게 변화할 것이다. 우리 정원을 방문한 분들이 남기고 간 사진, 휘호, 그림, 서예 작품 등을 전시 공간을 갖춰 일반인에게 공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정원 운영은 어떻게 하나.

▷정원 입장료는 1만2000원이다. 현재 직원 20여 명이 일하고 있다. 정원 관리는 물론 관람객을 위한 카페, 식당, 매점 같은 편의시설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정원을 둘러볼 수 있도록 정원 내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게 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이용 가능하며 제주 식재료로 만든 30여 가지 종류 음식을 준비해 놓고 있다.

▶▶ 성범영 원장은…

성범영 원장은 1939년 1월 당시 경기도 용인군 수지에서 태어났다. 제주가 고향인 군대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그것이 계기가 돼 제주에서 삶을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두루외(미친놈이라는 제주 사투리)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갈밭을 일구고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고난 끝에 1992년 정원을 개원했다. 장쩌민·후진타오 전 중국 국가주석,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 김용순 전 북한 노동당 비서 등이 정원을 찾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나무에서 인생의 진리를 배운다"는 그는 자신을 '미친 농부'라고 소개한다.

[제주 = 김정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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