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라이즈’ 몽유도원도, 조선판 데스노트? 이름 올리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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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엔 김명미 기자]

몽유도원도에 이름을 올린 이들이 연달아 죽게 된 이유가 뭘까.

1월 13일 방송된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는 조선시대판 데스노트에 대해 소개했다.

1453년 조선에 피비린내가 진동하게 됐다. 문종이 죽은 후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이 왕위를 뺏기 위해 계유정난을 일으킨 것. 같은 해 11월 단종의 편에 섰던 좌의정 김종서가 철퇴에 맞아 사망했고, 며칠 뒤 안평대군이 역모죄로 사사됐다. 또 1456년 6월 단종 복위운동을 도모하던 박팽년이 고문을 당하다 옥중에서 사망하는 등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놀랍게도 몽유도원도가 그들의 죽음을 불러왔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조선 회화사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몽유도원도는 조선 초기 화가 안견의 작품이다. 안견이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된 이유는 안평대군 때문이었다.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6년 전인 1447년, 안평대군은 무릉도원을 노니는 꿈을 꾸게 됐다. 그는 꿈에서 본 도원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했고,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에게 꿈에서 본 풍경을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안견은 사흘 만에 그림을 완성했고, 그 작품이 바로 몽유도원도였다.

놀라운 건 몽유도원도에 죽음을 당한 이들의 이름이 모두 적혀 있었다는 점. 당시 안평대군은 몽유도원도 완성 후 발문을 남겼고, 그림을 본 문인들은 찬문을 써 올렸다. 찬문을 남긴 인물들은 총 21명으로, 그 길이가 무려 20m에 달했으며, 계유정난에 사망한 김종서와 박팽년 등이 포함돼있었다. 이처럼 몽유도원도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이들이 수양대군의 손에 목숨을 잃자 해당 작품은 '죽음을 부르는 그림'으로 불리게 됐다. 공교롭게도 박팽년이 죽은 다음 날 동부승지 성삼문 역시 역모죄로 처형당했다.

이처럼 조선판 살생부가 된 몽유도원도. 현대에 들어 일부 학자들은 "몽유도원도가 안평대군의 정치적 야망이 반영된 그림"이라며 "찬문은 안평대군에 대한 사대부들의 충성 맹세로, 몽유도원도에 이름을 남긴 이들의 죽음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한편 몽유도원도는 계유정난 이후 자취를 감췄고, 1893년 일본 가고시마에서 발견된 후 일본 덴리 대학교에서 구입해 소장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돼있다.(사진=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캡처)

뉴스엔 김명미 mm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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